[152] To The Top(5)
어제부터 엄마한테 전화 온다.
올 추석에 은서 데려올 거냐고.
아들이 연예인이랑 사귄다고 어디 가서 자랑하실 분들은 아니지만.
나중에 적당히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은서가 직접 나와서 일이 꼬여버렸다.
"아오, 스트레스받아."
"왜애?"
"...."
엄지유는 사무실 책상에 달라붙어 내게 물었다.
"오빠, 오늘 악마가 되었다 촬영 끝나는 거 알지?"
"혹시 네가 보냈어?"
"응? 뭐를?"
"어제 우리 부모님이랑...."
"뭐야, 은서 언니 지인 만난 거 아니었어?"
".... 지인?"
은서가 말 안 해줬나 봐.
본인이 직접 찾아왔다고.
"뭐야 뭐야, 설마 마음에 들었어? 뭐하는 분이래?"
"조용히 해, 머리 아파."
"오키."
처음부터 얘한테 괜히 말을 꺼내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복잡해 졌을까.
'아니, 애초에....'
은서만 안 나왔으면 되는 일인데.
무슨 생각으로 여친인 척을 했나.
순간, 사무실 입구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예지와 눈을 마주쳤다.
"지유야, 예지는 언제 온 거야?"
"나랑 같이 방금."
지유는 방긋 웃으며 굳이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다.
"어제 부모님이랑 가짜 여친 만났다고 말해줌."
"...."
잘했다, 이 자식아.
나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미팅룸에서 예지에게 손짓했다.
김 리다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간식을 기다리는 멍멍이처럼.
"대표님!"
밝은 미소로 다가와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냈으니.
"예지야, 어제는 은...."
"대표님, 기억해요?"
"응?"
예지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오며 말했다.
"여자친구 생기면 흑화한다고 했는데."
".... 아."
그거 아직도 유효한 거였냐.
"그래. 흑화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별건 아니고."
예지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쓸어내렸다.
"인터뷰하다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말할 수도 있죠."
"그건 좀...."
"제작발표회 때 연애 중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것도 좀...."
"되는 게 없네요."
"보통 걸그룹이 다 그래."
"아하."
몰랐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 줄래.
"그래도 이번엔 가짜 여친이니까 봐줄게요."
"그게 누구냐면...."
예지는 손을 휘저으며 내 입을 막았다.
"아니아니, 대표님, 저 질투심 많은 여자 아니에요."
"예?"
"그래서 안 물어볼래요. 저는 질투 같은 거 안 하니까."
"...."
보통 돈 싫어한다는 사람이 돈에 미친 사람이더라고.
"저기, 예지야?"
"저 가볼게요!"
예지는 얼굴을 붉히고 급하게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구석에 있는 매니저를 불렀다.
".... 엄지유 튀어나와."
"대애애애애─박."
사실, 아까부터 지유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부르지 않았다.
"오빠! 예지 언니 어떻게 꼬셨어!?"
"그런 거 아냐."
"맞구만, 뭘!"
너어는 대표님한테 꼬셨다가 할 말이냐.
"내가 미안하다. 회사 대표로서 도의적으로...."
"뭔 소리 하는 거야! 당장 결혼해야지!"
"???"
엄 매니저는 아직도 내가 동네 오빠로 보이나 봐.
"크으, 미쳤다리, 수호 오빠가 예지 언니 미래 남편?"
"아 좀 닥쳐. 누가 듣는다고."
"내가 팍팍 밀어줄게! 결혼까지 가즈아!"
"밀기는 뭘 밀어."
절벽에서 처밀어버릴라.
"너 어디 가서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연하지. 나도 매니저야. 눈치가 있어요."
"멤버들한테도 말하지 마."
"응. 소미가 얼마나 입이 가벼운데."
"...."
엄지유는 예지랑 내가 썸탄다고 생각하는지.
부모님께선 은서를 여자친구로 알고 계신데.
'와아, 어지럽다.'
뒤통수는 오늘도 쉬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 * *
「악마가 되었다」 촬영장.
영화 촬영의 종료와 함께 잡힌 제작진 단체 회식 날.
배우 이수연은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밴에 탑승했다.
"으아, 드디어 끝났드아!"
"고생했어."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고 하루 동안 쌓인 톡을 확인했다.
'정 대표님, 연락 한 번을 안 해?'
미국 진출하느라 바쁜 건 알겠는데.
이제 한국 돌아온 지 좀 되지 않았나.
"오빠, 대표님도 회식 때 오신대?"
"글쎄. 들은 건 없는데."
"흐음."
뚜루루루─
수연은 곧장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없는 국번이거나....]
".... 롸?"
매니저는 수연을 힐끔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 대표님 번호 여러 개 쓰시잖아. 그 번호는 정리했나 보네."
"아니, 지금 장난하나."
누가 보면 여자가 남자한테 매달리는 줄 알겠네.
"참나, 진짜. 허, 참나."
"...."
수연은 매니저에게 새로운 연락처를 받고 다시 전화했다
"여보세요! 대표님!"
-네. 누구세요.
".... 이수연이요. 당신 회사 여배우."
-아, 수연 씨! 촬영 끝나신 거 축하드려요!
"네. 축하는 고마운데."
누가 보면 남의 소속사 배우인 줄 알겠네요.
"진짜 서운하게 이러실 거예요!?"
-미안해요. 요즘 정신이 없네.
"오늘 회식은 오시는 거죠?"
-으음, 스케줄이....
"오케이. 나도 안 가."
-간다고, 가요, 가.
이번 촬영은 순전히 대표님 선택을 믿고 달려왔다.
'왕의 품격은....'
엎어진 후로 제작이 될까 말까 하더니만.
결국, 악마가 되었다 촬영이 끝나버렸다.
잠시 후,
이수연은 회사 자리에서 진세은을 발견했다.
어쨌든 몇 달 동안 동고동락한 동료 아닌가.
한 칸 떨어져서 앉은 이수연과 진세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금은 버뮤다 삼각지대보다 위험한 자리.
두 여배우 사이에 앉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 세은아! 요즘 많이 힘든가 봐? 가방 짭이네?"
"언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거 지올 은서 픽! 혹시 모르세요?"
"그게 뭔데."
"에휴, MZ 세대들이 좋아하는 그런 거 있어요."
".... 우리 몇 살 차이 안 나."
그때, 회식 자리에 유명 인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오, 정수호 대표님!!!!"
격하게 환영하는 분위기 속.
스탭들은 합심해서 그를 버뮤다 삼각지대로 안내했다.
"저도 이 자리는...."
"대표님, 어서 앉으세요."
"아."
정수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여배우 사이에 앉았다.
"대표님, 요즘 이 바닥 후배들이 버릇이 없는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수연은 세은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후우, 라떼는 선배님 오면 수저, 물컵 세팅이 기본이었는데."
".... 제가 할게요."
"됐어요."
이내, 세은은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 선배님께 전해주세요. 세팅 다 했는데 늦게 오신 거라고."
"네? 그건 직접...."
"대표님, 세은이한테 전해주세요. 제가 오늘...."
".... 오케이."
수호는 카메라 감독님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감독님, 요즘은 회식 자리 촬영 안 해요?"
"네?"
"메이킹 필름 같은...."
"아!"
이내, 옆자리에 내려놓은 카메라를 드는 감독님.
"아이, 그런 게 어딨...."
"스마일."
"헤헷."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친한 선후배.
흥행에 성공하면 투 샷 찍힐 일이 많았다.
"두 분, 앞으로 좀 더 친해집시다."
"...."
이 작품, 프랑스 영화제 출품작이라던데.
깐느 가서 싸우면 국제적인 망신 아닌가.
"대표님! 우리 원래 친해요!"
"맞아요, 언니!"
카메라 불 들어오니까 없던 친분도 생겼다.
"그럼 둘이 러브샷 하던가."
"아."
"아."
시킨다고 러브샷 할 줄은 몰랐는데.
'.... 진짜 하네.'
* * *
며칠 뒤.
걸스 오퍼레이션은 논란을 애써 무시하고 방송을 진행했다.
특히, 다이애나가 프로듀싱한 F조.
나름 선방하며 무대에 올랐는데.
"팀장님, 지금 논란이 몇 개 터졌나요."
"그, 다섯 명 정도."
"...."
지금까지 이런 걸그룹 오디션은 없었다.
이것은 학폭인가 방송인가.
폐지하기엔 너무 멀리 왔나.
추가 폭로도 이제 슬슬 잠잠해진 것 같지만.
"A, B, C, D, E조에 한 명씩이죠?"
"네? 아, 네!"
"다행히 우리는 피했네요."
"아....!"
딸깍, 딸깍─
구 팀장님을 뒤로한 채 해당 방송에 대한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각종 커뮤니티에서 다이애나의 발언이 화제였다.
[저는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유일하게 논란이 없는 F조 프로듀서의 소신 발언.
사실, 원래는 내가 지어낸 말이었지만.
방송국에 잘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표님, 혹시 알고 계셨던....?"
"아뇨, 그냥 F조 애들이 가장 순수해 보였어요."
"세상에...."
제가 뒤통수로 뽑았다고 해도 안 믿어줄 거잖아요.
"대표님께서는 연예계에 보석 같은 분입니다."
"그건 좀 오바네요."
"아뇨! 진심이에요."
".... 예."
나는 어색한 기분에 대화 주제를 돌렸다.
"팀장님, 팬 서비스는 준비하고 있나요?"
"아, 몰래카메라요."
"네. 그거."
솔라 멤버들이 자체 기획한 컨텐츠.
몰카를 너튜브에 올릴 예정이었다.
"당첨자는 아직 안 뽑았죠?"
"네. 대표님."
누군가에겐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될지도 모르는 이벤트.
팬들 중에서 공평하게 선정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태양빛 회원 중에 뽑는 걸로 하죠. 다른 이벤트라고 속이고."
"네. 인원 조정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이내, 구 팀장님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9월에 에미상 수상 후보로 굿버스킹이 올랐습니다."
"아, 그래요."
"네. 인기상 후보에 솔라 멤버들이 올랐습니다."
"그럼 참석을...."
순간, 뒤통수에서 서서히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
무려 에미상 수상 후보에 올랐는데 왜 이러는 걸까.
"그냥 보류하죠."
"네!?"
"인기상이면 그렇게 큰 상은 아니니까요."
"그, 그래도...."
무조건 가야 한다면, 뒤통수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겠지.
이제 곧 루나 컴백 시즌도 다가왔다.
곡이나 안무는 한 번씩 보고 있는데.
"아무튼, 루나도 방송 잡아야죠."
"네. 대표님"
추석 때 리듬체조로 떡상할 테니.
타이밍 맞춰서 뭐 하나 찍아야지.
"루나도 솔라빔 같은 리얼리티 찍으면 좋을 텐데요."
"이클립스 팬클럽 측도 계속 요청합니다."
"...."
리얼리티 방송은 원래 돈이 잘 안 된다.
어디까지나 팬들만 좋아하는 방송이라.
'무슨, 스타 피디가 연출하고....'
돈 펑펑 쓰면서 세계 일주라도 하면 모를까.
방송국 입장에선 콧방귀도 안 뀔 일이겠지.
띠리리링─
그때, MBS 예능국장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보통 직접 전화를 하시는 경우는 드물 텐데.
"여보세요.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정 대표님, 잘 지내셨나.
"그럼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방송이 있어서 연락했어요.
"아."
순간, 뒤통수에서 살살 느껴지는 똥촉의 기운.
본능적으로 에미상을 보류한 원인을 찾아냈다.
'시상식 날짜와 촬영 예정일이 겹친다면....?'
결국, 시상식은 보여주기식 트로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시상식에 데려다 줄 작품을 잡는 게 더 중요하겠지.
"국장님, 어떤 방송인가요?"
-일단 만나서 얘기하시죠.
"넵, 미팅 잡으시죠."
* * *
MBS 예능국에서 준비한 대형 프로젝트.
현실판 부루마블 세계일주.
그 스케일은 어마어마했다.
일단, 국장님께서 건네주신 시놉시스를 읽었는데.
"솔라만 참여하는 게 아니었네요."
"네. 솔라, 루나, 이클립스 세 팀 전부요."
"...."
각자 주사위를 굴려 여행지를 정하는 단순한 규칙.
여행 국가, 여행 경비, 잠자리, 세끼 식사.
거의 모든 것을 주사위 하나로 결정했다.
"아프리카 나오면 분위기 살벌하겠네."
"잘 뽑으면 됩니다."
"...."
소미 똥손이잖아.
과연, 시놉시스만 봐도 느껴지는 거대한 역배의 기운.
모든 불운과 불안감을 모아놓은 듯한 똥촉의 결정체.
'와, 이건 찐이야.'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에 머리가 주뼛 서는 기분이다.
"이거 누가 기획한 거예요?"
"함 피디님이요."
"아하."
나의 작은 텔레비전 때도 트렌드는 아니었지.
원래 그런 마이너한 장르를 좋아하시더라고.
"그럼 세 팀이 각각 다른 여행지를 가는 거죠?"
"네. 그래서 피디도 세 명입니다."
"중간에 한번 반드시 만나는 지점도 있고."
"오, 룰을 금방 파악하시네."
"...."
이내, 부루마블 판 위에 적힌 나라들을 확인했다.
동남아부터 유럽을 물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국장님, 이거 제작비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투자받아야죠. 솔라니까요."
"아하."
솔라 이름값이면 투자사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넥플렉스랑 동시 방영할 겁니다."
"음, 나머지 피디 두 분은 누구예요"
"한 명은 얼마 전에 프리 선언한 김지훈 피디."
"Tvm이요?"
"네."
학교 후배랑 또 같이 하게 생겼네.
"그럼 나머지 한 분은요?"
"우리 방송국에서 퇴사한 분."
"설마."
대한민국 예능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프로그램.
현재 폐지됐지만, 그의 이름은 모두 기억했다.
"김선호 피디입니다."
* * *
그날 저녁.
나는 MBS 카메라 감독님과 함께 솔라 멤버들을 호출했다.
"주작은 안 되겠죠?"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감독님.
부루마블 판에 위험 지역은 하나였다.
".... 5 나오면 몽골."
드르륵─
이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솔라 멤버들.
그녀들은 카메라를 보며 한 명씩 입을 열었다.
"대표님! 무슨 방송이에요?"
"오, 머징."
"주사위는 뭐예요?"
"조용히 하고, 이거 신중하게...."
그때, 소미는 이미 주사위를 들고 하늘 높이 던져버렸다.
"아니, 너 말고 다른.... 아."
첫 주사위에는 '거의' 꽝이 없었다.
대부분 유럽이나 동아시아였는데.
툭, 투투툭─
멤버들은 순진한 표정으로 주사위를 바라봤다.
"우리 몽골 가야겠는데."
"???"
소미가 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