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To The Top(4)
MBS 방송국 예능제작본부.
함호진 피디는 아육대 촬영을 앞두고 미팅을 잡았다.
그동안 양주희 없는 아육대가 얼마나 욕을 처먹었나.
"피디님, 정 대표님이 허락할까요?"
"글쎄."
아육대 7관왕의 전설.
남자 씨름부 우승자를 이긴 장면은 아직도 명장면으로 손꼽혔다.
그 후로 천상계에서만 놀더니 결국 빌보드 상위권 차트에 올랐다.
아육대는 양주희 전과 후로 나뉘었다.
그만큼 그녀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번에 무조건 MC로 섭외해야 해."
"넵! 피디님."
모든 종목에 능통한 아이돌은 얼마나 MC로 적합할까.
어차피 선수 출전은 의미가 전혀 없겠지.
양주희의 기록은 아직도 압도적이었으니.
"정수호 대표님 오셨습니다!"
"오, 벌써."
이내, 예능국에 거물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 깃발 꽂고 돌아온 스카이 엔터 대표님.
"아이고, 정 대표님!"
프렌즈의 뒤를 잇는 신생 기업의 CEO.
재작년 아육대 출연할 때 팀장급이었나.
"함호진 피디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오오,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
"그럼요! 나의 작은 텔레비전 피디님이잖아요."
"아."
기억하시는구나.
"사실, 나작텔 지금은 폐지됐습니다."
"시즌제니까요. 곧 돌아오실 거 아닙니까."
"그, 그럼요! 하하하."
몇 년 사이에 능청스러워지셨네.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시고.
"이클립스 멤버들 계약하러 왔습니다."
"아, 네. 그러시죠."
"루나의 류시아는 솔로로 리듬체조 부문만...."
"저기."
함 피디는 조심스럽게 양주희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 혹시 주희 씨 스케줄 되시나요?"
"네? 언제요?"
"아육대 촬영일에 MC가 필요해서요."
"아, 음, 잠시만요."
정 대표는 스마트폰을 꺼내 솔라의 스케줄을 체크했다.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 수호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어쩌죠, 그날 스케줄이 있네요."
"아, 그렇군요."
"그렇긴 한데...."
"???"
미국에서 피디 조련 기술을 배워온 걸까.
정수호 대표는 말꼬리를 질질 늘어뜨렸다.
함 피디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스케줄이 있지만....'
과거의 친분 때문에 고민하시는 건가.
아주 높은 위치에 올라도 여전히 따뜻한 마음씨.
뒤통수를 벅벅 긁는 그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함 피디님 믿고 아육대 출연하죠."
"감사합니다! 그럼 조건은...."
"서로 믿고 가는 거죠. 하하."
"!!!!"
이런 게 바로 방송국과 엔터 사이의 믿음과 약속.
계약서 조항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끈끈한 우정.
보통은 방송국이 갑이지만, 월드 클래스는 말이 다르지 않은가.
정 대표님, 미국물 먹고 오더니 배포가 남달랐다.
연예계에 이런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따뜻할까.
"함 피디님, 왜 손을 떨고 그러세요."
"너무 감동해서요."
"에이, 왜 그러세요. 우리 사이에."
"...."
크으, 이것이 사나이의 우정인가.
"저기, 대표님, 빚진 건 꼭 갚겠습니다!"
"빚이라뇨. 우리 사이에 빚이 어딨습니까."
"그렇죠. 하하."
정수호 대표는 씨익 웃으며 악수를 제안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방송에서 진 빚은 방송 섭외로 갚는 게 불문율.
제작비 빵빵하게 해외 여행을 보내주면 어떨지.
「솔라빔 시즌 3」
사실, Tvm에서 찍은 솔라빔은 팬들만 보는 비주류 예능이었다.
MBS에서 황금 시간대에 편성해주면 어떻게 될까.
함 피디는 미팅을 마치고, 곧장 국장실을 방문했다.
* * *
시간이 흘러,
MBS 방송국 부속 종합운동장 아육대 촬영장.
나는 이클립스 멤버들의 스타일링을 점검했다.
"뭔가, 뭔가...."
개별로야.
박아영 코디님, 진짜 나랑 안 맞나 봐.
같은 츄리닝인데 이렇게 별로일 수가.
그래도 강화 뒤통수는 미세한 감각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코디님,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감사해요. 헤헷."
이내, 양주희는 밴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주희야, 너 출전하는 거 아니야."
"알아요, MC 보러 온 거."
"...."
이클립스 멤버들은 양주희 앞에서 순한 양처럼 조용했다.
한본어 쓰는 엠마도, 가끔 철없는 남민지도.
내가 훈련 너무 빡세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군들, 가즈아."
"가즈아!"
"...."
MC가 중립 안 지켜도 되는 거냐.
.
.
.
.
.
잠시 후,
진행자석에 앉아 다른 MC들과 대화를 나누는 양주희.
나는 지유와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습했나 봐."
"그러게."
가장 인기 종목인 달리기.
주희는 전문가와 대화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특히, 이클립스 멤버와 친분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거 남민지 양이 실수했죠.
-그러니까요.
MC의 말에 주희는 속사포처럼 불평을 쏟아냈다.
-에휴, 내가 스타트 자세 등이랑 지면 평행 맞추라고 분명히....!
-크라우칭 자세는 100번도 넘게 설명했잖아요.
-민지야, 정말로 그게 최선이었니?
-남민지 씨, 내년 설 때 봅시다!
-아니, 그냥 지금 보자. 너는 뒤졌다.
그라데이션 분노냐.
주희는 민지 뿐만 아니라, 친한 걸그룹 후배들에게 똑같이 행동했다.
그 모습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되고, 제작진 분위기도 점점 밝아졌다.
선수로 활약한 주희가 MC로 활약했으니.
'시청률, 기대해볼 만할 수도....'
이내, 현장의 특파원 MC는 탈락자들의 소감을 물었다.
신인 중에서 핫한 이클립스에게 먼저 마이크를 건넸다.
-남민지 씨, 떨어진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하아, 너무 분하네요.
-많이 아쉬운가 봐요?
-크윽, 하늘은 왜 나를 낳고....
남민지는 숨을 몰아쉬며 결승 진출한 라인을 바라봤다.
-김자경, 성애정, 전여민, 윤지희, 남궁수련, 허혜림, 성유미, 이장미, 유희연, 올리비아를 낳았을까요.
-.... 예?
그 정도면 전부 다 아니냐.
올리비아는 우리 팀이잖아.
-속상하네요, 증말.
-오케이.
아육대 제작진은 어지러운 분위기 속에 경기를 속행했다.
달리기, 양궁, 풋볼 예선전을 치르는 가운데.
마침내, 류시아의 리듬체조 순서가 다가왔다.
종합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실내 체육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새벽부터 현장에 방문한 루나의 팬들은 열심히 시아를 응원했다.
솔라의 대형 팬덤과 매번 비교되는 「달빛별빛」 팬클럽.
인원이 더 적어서 그런지, 유대감이 오히려 더 끈끈했다.
"지유야, 시아 리듬체조 연습하는 거 봤냐."
"응. 진짜 선수처럼 잘해!"
"그래?"
어렸을 때 무용 전공이라고 들었다.
예지만큼이나 재능이 많은 친구라.
-자, 이번 순서는....
그때, MC의 소개와 함께 류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나의 류시아 양, 리본을 이용한 리듬체조 경기를 감상하겠습니다.
특히, 리본은 아육대 리듬체조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리본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멘탈도 같이 꼬였기에.
-라라라, 라─♬
이내, 류시아는 고급스러운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율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드러운 움직임.
아이돌 댄스와 구분되는 예술의 영역이었다.
-역시, 유연성이 굉장히 뛰어난 선수네요!
-포에테 피봇, 침착하게. 아주 잘했습니다.
-와, 5회전인가요! 아육대 최초로군요.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을까요?
수백 명의 아이돌 앞에서 차분하게 동작을 이어가는 류시아.
큐앤지 레이블 시절부터 솔라와 함께 열심히 키운 멤버였다.
"오빠, 언니 멋지다."
".... 그러게."
내 뒤통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신 수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와아아아아─!!!
무대를 마치자마자 쏟아지는 박수갈채.
엄청난 함성 소리가 체육관을 뒤덮었다.
다른 아이돌 팬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응원을 받으며.
류시아는 온 세상을 얻은 듯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지유야, 루나 컴백 일정이 어떻게 되나."
"다다음 주였나."
"그래."
미국에 있는 동안 이미 뮤비까지 찍었다.
곡이나 안무도 이미 끝났다고 들었으니.
'내가 좀 더 신경 써야지.'
컴백하기 전에 곡이랑 안무도 좀 보완하고.
키우는 아티스트가 많아서 할 일이 많았다.
* * *
아육대 최종 스코어 금메달 3개.
물론, 전부 류시아가 리듬체조에서 딴 성적이었다.
이클립스 멤버 중에 '양주희'는 없었으니 당연했다.
"본 멘토는 너희에게 실망했다."
"주희야, 조용히 좀 해."
"네, 형님."
주희는 내 말에 대답하면서도, 곁눈질로 이클립스 멤버들을 흘겨봤다.
우리의 신입 걸그룹 멤버들은 뒷자리에 손을 모으고 정자세로 앉았다.
"주희야, 애들 째려보지 좀 마."
"아, 그럴까요."
"...."
오늘 스케줄 있어서 빠진 권시연만 승자네.
아육대 금메달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잖아.
"주희야, 원래 금메달 어려워."
"쉽던데요?"
"...."
그건 네가 이상한 거야.
"아니, 걸그룹끼리 경쟁하는데 그게 어렵나."
"주희야, 너도 걸그룹이야."
"아 맞네."
"...."
그걸 어떻게 까먹냐.
데뷔한 지가 언젠데.
"너 지금이라도 태릉 가볼래?"
"에이, 늦었죠. 제 나이가 몇인데요."
"그래. 그럼 계속 솔라 하자."
"예아."
잠시 후,
사옥에 도착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클립스.
주희는 멤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잘했어."
"???"
그동안 칭찬을 얼마나 안 했으면.
이렇게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는지.
"저, 정말요?"
"응. 노력했잖아."
"아아....!"
남민지는 가벼운 칭찬에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내년 설에는 더 잘해보자!"
"앗, 아아...."
".... 주희야, 적당히 해."
"오키."
쟤는 걸그룹 안 했으면 진짜 뭐 하고 살았을까.
삼촌들은 운동선수 맞겠지?
무슨, 어깨 삼촌들 아니겠지?
이내, 주차장에 밴을 세우고 내리는 지유와 함께 사옥에 들어갔다.
"지유야, 왜 아직 소식이 없어?"
"무슨 소식."
"은서가 지인 소개해준다는 거 아닌가."
"그거 날짜 맞춰서 방문한다던데."
"...."
부모님께 소개해 드리는 여자친구.
최소한 말을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솔라 멤버들 어딨어?"
"배우님덜 두 명은 스케줄, 소미는 학교 끝났겠네."
"다이애나는?"
"지금 작업실에 있을걸."
"아, 걸스 오퍼레이션?"
"응. 지금 F조 연습생들이랑 있을 거야."
"그래?"
나는 곧장 다이애나의 작업실로 향했다.
안 그래도 연습생들 얼굴 보고 싶었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프로필을 봤을 때는 큰 문제가 없는 친구들이었는데.
똑, 똑─
노크하고 들어온 작업실.
걸스 오퍼레이션 제작진이 설치한 방송 세팅.
몇몇 연습생들은 나를 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
"저, 정수호 대표님!"
"앗,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 하던 거 계속 집중하세요."
괜히 나 때문에 녹음 중인 연습생이 삑사리를 냈다.
'역시, 여기엔 문제가 없네.'
상위권에는 곧 터져나갈 연습생들 몇 명 있더만.
오히려 하위권에서 재평가받고 날아오를 수도.
"저기, 대표님."
이내, 조연출님이 내게 한마디 조언을 부탁했다.
"제가 무슨 조언을...."
"아무 말이나 하셔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음...."
이제 곧 터질 방송이니까 하는 말인데.
"여러분, 다이애나는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 제가요?"
"응. 니가요."
사실, 도하나도 욕을 가끔 하지만.
그건 외노자의 고충이라고 생각해.
"아이돌은 우상입니다. 인성에 문제 있는 우상은 없어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방금 대답한 연습생을 빤히 바라봤다
원래 컨셉인지, 표정이나 리액션이 약한 멤버.
프로필을 볼 때도 저 친구만 눈에 들어왔는데.
"레미라고 했죠?"
"네?"
전형적인 역배각이었다.
현재 스카이 엔터는 포화상태라 키울 여유가 없었다.
근데, 저런 자세로는 어디에 가도 뜨기 어려워 보였다.
"응원하고 있어요."
"저, 저를요?"
감정이 없던 레미의 눈빛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오히려 주변에 있던 연습생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와, 부럽다. 레미 이름만 기억해주시네."
"이런 게 바로 재능....?"
"...."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작업실을 벗어났다.
다이애나가 알아서 잘하겠지.
이제 내가 더 할 일은 없었다.
* * *
얼마 후,
오늘 오시기로 약속한 부모님 두 분을 기다리며.
스마트폰으로 걸스 오퍼레이션 기사를 확인했다.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1위 연습생을 향한 폭로, 그 진실의 향방은....》
"벌써 시작했네."
이 정도면 거의 미래 예지.
1위는 시작에 불과할 거야.
대충 모자이크로 정리하기엔 너무 많은 친구들이 거슬렸다.
물론, 내 기준에도 실력과 외모가 좋고 스타성도 풍부하지만.
'.... 뒤통수가 간지러운 친구들.'
걔들 다 쳐내면 방송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빅 3에서 야심 차게 준비하고 망하게 생겼네.
"그나저나...."
오늘 은서가 보낸다는 사람은 언제 오는 거야.
설마 우리 부모님보다 늦게 오는 건 아니겠지.
띵똥─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여성의 실루엣.
".... 장은서?"
참한 복장으로 집에 들어오는 둘째.
설마 부모님께 소개해 드릴 사람이.
"은서야, 뭐하는 거야?"
"여자친구 필요하다면서요. 저도 여자예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부모님께서 문을 열었다.
"문이 왜 열려있...."
"수호야? 누구셔?"
"...."
장 폭스는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모으고 어머니께 인사드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어디서 본 것 같...."
"수호 오빠 여자친구, 장은서라고 합니다!"
"...."
은서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사귄 지는 석 달 정도 됐어요!"
"어쩌다 수호랑....?"
"제가 먼저 좋아했어요."
"...."
거짓말도 잘하네.
진짜 배우 맞구나.
"제가 저녁 준비할게요, 어머니!"
"아니, 어떻게 그래요."
"제가 할게요!"
당연히 부모님도 은서를 알고 계셨다.
천만 관객을 찍은 국민 첫사랑이니까.
'.... 머리 아파.'
지금 내가 뒤통수에서 느끼는 간지러움은 어떤 의미일까.
혹시 거짓말이 아니라면.
설마 은서가 나를 정말로.
"수호 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어?"
"어머니 혼자 저녁 준비하는 거 안 보여?"
"아."
은서는 허리에 팔을 두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결혼하면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며!"
".... 내가?"
"그럼 오빠 말고 누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
"...."
그런 컨셉인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