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확장(1)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장.
스테이지에 오른 이클립스를 보니 옛 생각이 떠올랐다.
솔라 신인 시절에도 여기서 무대에 올랐는데 기억나네.
'그때도 지금처럼....'
무대가 존나 마음에 안 들었지.
지유는 옆에서 감상에 젖은 내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이클립스, 그렇게 잘해?"
"...."
그 반대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네."
"내가? 그래 보여?"
"응. 솔라 신인 때처럼."
".... 그때랑 비슷하긴 하지."
"그니까!"
걸스온탑에서 80명 중에 거르고 거른 역배 전사들.
그들 모두 뒤통수를 간지럽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내 취향이나 마음과 반대로 결정하는 게 익숙해졌다.
스케줄, 음악, 멤버 한 명까지.
전부 똥촉으로만 판단했으니.
"오빠, 우수상 발표한다."
"...."
이내, MC는 드라마 부문 여자 우수 연기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드라마 「미래를 보는 변호사」에서 멋진 열연을 펼쳐주신 이수연 씨, 축하드립니다!
짝, 짝짝짝─
객석에서 터지는 팬클럽 회원들이 박수갈채.
바쁜 영화 일정 쪼개서 참석한 보람이 있었다.
'결국, 수연 씨가 탔네.'
드림 에이전시 시절부터 알고 지냈는데.
오늘처럼 환한 미소를 본 기억이 없었다.
-미래를 보는 변호사는 신생 방송국 ETV에서 제작한 드라마로....
MC의 소개를 들으며 친한 지인들과 포옹을 하는 수연 씨.
솔라 멤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달려가 스크린에 실렸다.
-와아아아─!!!
나는 환호성이 터지는 객석에서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역시, 역배는 짜릿해.'
평생 질리지 않는다니까.
"오빠, 최우수상도 노려볼 만했는데."
"그건 어렵지."
"하긴...."
지유는 객석에서 어떤 여배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계희연, 저분 폼이 압도적이긴 했지."
"그건 인정."
".... 계 씨의 희망?"
"엄 씨는 조용히 해."
여자 최우수 연기상은 이미 맡아놓은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영화 들어갈 거라고 들었는데.
"저분 영화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응. 올해 말쯤에 사극."
"...."
사극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왕의 품격....'
예지랑 은서 덕분에 다시 투자받기 시작했다는 영화.
피플 프로덕션에서 제작 확정 나면 연락해 준다던데.
'.... 엎어진 건가.'
잠시 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장.
어느새, TV 및 영화 부문 대상 후보만을 남겨두었으니.
-올해 백상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요!?
상대적으로 TV 부문의 경쟁이 훨씬 더 치열했다.
지상파와 케이블 모든 드라마, 예능의 전쟁이었다.
"걸스온탑은 대상 후보에 없어서 아쉽네."
"그럴 만하지."
지금까지 OTT 작품이 대상을 탄 건 단 한 번뿐이었다.
"오징어 서바이벌."
"그건 인정."
그 정도 작품이 언제 한국에서 다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부문만 생각해도, 대한민국 3대 영화제.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장 마지막 순서가 다가왔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MC는 쟁쟁한 후보들을 스크린에 띄우며 하나씩 발표했다.
무엇보다, 올해 멜로 영화의 새 지평을 연 「첫사랑」.
은서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팬들와 환호가 터졌다.
두근, 두근─
나 역시 떨리는 심장으로 천천히 결과를 기다렸다.
처음 양주희가 가져온 대본을 봤을 때.
판권을 사러 삼류 영화사에 방문했을 때.
은서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잠시 후,
대상 수상작을 말하는 MC의 입에서 '첫사랑'이 나오고.
그녀는 내게 했던 말을 시상식장 위에서 똑같이 뱉었다.
-정수호 대표님, 우리 아버지 시나리오를 세상에 내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서의 순수한 마음이 내게 전해졌다.
나도 진심으로 솔라 멤버들을 응원했다.
한 사람의 팬으로, 혹은 회사 대표이자 제작자로.
* * *
백상예술대상의 화려한 밤이 지나고.
스카이 엔터 소속 아티스트는 사옥에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만 수상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다들 수고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지는 자랑스러운 듯 주변 아티스틀들을 바라봤다.
특히, 은서의 첫사랑은 무려 영화 부문 대상을 탔으니.
"대상 후보에 올랐다고 파티할 필요도 없었네."
"그러게, 진짜 대상을 탈 줄이야."
"오늘도 하면 되지."
"그러네!"
그만큼 대표님의 안목이 대단하시다는 뜻.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워낙 경쟁이 치열했으니.
기자들도 첫사랑의 수상 확률을 높게 보진 않았다.
"저기."
이내, 남민지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우리 이사는 언제 가요?"
"...."
대표님이 없는 자리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잠시만, 언니들."
"???"
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민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 가는 거야?"
"모르겠어."
"소미는 민지를 편애하네."
"그러게."
우리 소미가 후배를 정말 많이 아끼고 사랑하나 본데.
학교 다닐 때도 매일 붙어 다니면서 예능도 데려가고.
'민지는 좋겠네.'
솔라 데뷔 때 큐앤지 레이블에는 그런 선배가 없었거든.
솔라의 여동생 그룹인 이클립스.
블루숄츠 여동생 그룹 러비돌스.
오늘 두 그룹이 나란히 1부와 2부 개막식 무대에 올랐는데.
"이클립스, 너희 무대가 훨씬 더 좋았어."
"정말요?"
예지의 칭찬에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멘토님!"
"감사는 무슨, 대표님도 만족하신 것 같더라고."
"저도 봤어요! 뒤통수 긁적이시는 거!"
"그걸 봤구나."
이제는 스카이 엔터를 넘어, 연예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듯했다.
뒤통수를 긁으면 '느낌'이 왔다는 뜻.
그만큼 무대가 완벽했다는 의미겠지.
'아직 대표님 계시려나....'
민지 말처럼 이클립스 숙소 문제도 있었고.
오늘처럼 좋은 날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예지는 조심스럽게 연습실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이동했다.
똑, 똑─
이 늦은 시각에 혼자 컴퓨터를 두드리는 사람.
"대표님."
"어, 예지야."
"뭐하고 계세요?"
"그냥."
다른 작품이나 시장을 분석하고 계시는 건가.
"미국에서 활동할 앨범 확인하고 있지."
"...."
역시, 일하고 계시네.
그 좋은 안목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자신도 그의 이런 성실함에 반한 게 아닐까.
"대표님, 멋있으세요."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배시시 웃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는 예지.
순간, 한쪽 구석에 쌓인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생일선물 안 열어보셨네요."
"아, 요즘 바빠서."
"제 것도 있는데."
"그래?"
"네."
눈치 없는 그를 위해 예쁜 시를 써서 선물했다.
언젠가 반드시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안에 편지도 있어요."
"그럼 지금 한 번...."
"안 돼요! 저 없을 때 읽어보세요!"
"???"
예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그대로 도망갔다.
"뭐야, 왜 그러지."
설마 고백각인가.
혼자 남은 수호는 조심스레 선물 포장을 뜯었다.
값비싼 명품 시계를 확인하고 편지를 읽었는데.
'잠깐만, 이거....!'
사랑하는 임을 위해 쓴 예쁜 노랫말.
작사하고 싶으면 그냥 말해도 되는데.
'.... 재능 있네!?'
고백각이고 뭐고,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이건 가사로 써야 해!'
* * *
"결국, 대상까지 타는구나."
《올해 백상예술대상, 그 주인공은 첫사랑과 국민 MC─! 화려한 개막식을 연 이클립스는....》
연예계 뉴스 메인 화면에 커다랗게 실린 손녀딸, 은서.
방순자는 기쁘면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기사를 읽었다.
작품 보는 눈 하나는 누구보다 뛰어나가도 자부했는데.
"쯧, 늙으면 죽어야지."
딸아이와 '사위'에게 몹쓸 짓을 한 기분이다.
이런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쫓았으니까.
철컥─
이내, 방 마담은 스포츠카 문을 열고 어딘가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수호 대표의 안목은 자신을 능가했다.
잠시 후,
그녀는 드림 에이전시 대표실에 들러 커피를 홀짝였다.
"방 마담, 요즘 뜸하네."
"바쁘니까."
모기업으로서 드림 에이전시는 스카이 엔터의 지분을 상당 부분 보유했다.
"손녀딸이 대상 탔으면서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그냥."
어두운 건 아니고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드림 에이전시 주식은 전부 포기하겠네."
"!!!"
방 마담의 폭탄 발언에 박 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신 스카이 엔터 주식을 전부 넘겨."
"방 마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물론, 스카이 엔터 잠재력은 굉장히 높지만.
현재의 가치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프렌즈 만큼 성장할 거라고 보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솔라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이돌 엔터도 아닌 드림에 묶어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정 대표, 이제 미국 진출할 생각이더라고."
"...."
박 대표 역시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도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방 마담,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는 있다만."
"그럼 그렇게 해."
"후우."
물론, 세계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박 대표, 나도 큰 결심하고 온 거야."
"알고 있네."
원래 방 마담은 가능성에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정도로 큰 건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으니.
"자네도 많이 변했네."
"가족 때문이지."
그러고 보니, 박 대표도 스카이 엔터에 자식이 있지 않나.
"자네 딸래미 말이야."
"응?"
이수연 씨, 백상예술대상 베스트 드레서에 올랐던데.
물론, 최우수 연기상 수상자 버프도 살짝 있었겠지만.
"스카이 엔터에서 좀만 실력을 더 키우게 내버려두게."
"이제 나랑 상관없는 회산데?"
"급할 거 없지 않나."
"...."
세계적인 월드스타의 스타일리스트.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커리어 아닌가.
"한번 지켜보게나."
정수호 대표는 미국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지.
* * *
드림 에이전시한테 손절당했다.
요즘 회사 분위기는 좋지 않나.
'갑자기 왜 이러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방순자 할머니 지분이 상담이 커졌다는 것 외에는.
'권 상무는....'
이제는 정말 닭 쫓던 개가 돼버렸네.
호시탐탐 시비 걸 생각만 했을 텐데.
"오빠, 지금 들어가야 해."
"아, 그래."
박철민 본부장님 결혼식 당일.
지유와 함께 식장에 방문했다.
"오늘 예지 언니가 축가로 뭐 부른다고 했지?"
"헝그리래빗 러빙유."
"명곡이네."
"명곡이지."
얼마 전에 시상식장에서 본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수많은 연예계 유명 인사가 바글바글하게 몰려왔으니.
"실물로 처음 보는 연예인도 많네."
"대박! 여기 Young한데!? 완전 MZ인데?"
"그게 뭔데."
이수연 씨를 비롯한 유명한 배우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만큼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노력했다는 증거였다.
"대표님!"
이내, 얼굴이 익숙한 피디님과 인사를 나눴다.
아무리 솔라가 잘나가도 피디와는 공생이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네. 피디님."
"대표님께서 KBC는 싫어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에이, 설마요."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대충 명함을 받고 시선을 돌렸다.
축의금을 얼마나 할지 고민된다.
'.... 계좌로 보내야겠네.'
이내, 빛이 반짝거리는 조명 아래 반짝이는 본부장님과 마주했다.
"수호 왔냐."
"네. 본부장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더이상의 말씀은 없으셨다.
회사에서 매일 보던 사이에 특별히 할 말도 없었다.
'최소 500만 원은 해야겠네.'
큐앤지 레이블 때부터 나 대신 높으신 분들이랑 술 먹느라 고생하셨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중년인의 목소리.
이 바닥에 빅보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꽤 오랫동안 연예계를 주름잡은 프로듀서 중 한 명.
과거 소문으로는 손 씻은 깡패 출신이라고 하던데.
"일단 명함부터 받으시고."
"아, 네. 저도...."
악수할 때 느껴지는 악력이 어마어마했다.
"정수호 대표님 보고 자극 많이 받고 있습니다."
"네? 저를 보고요?"
"MZ세대 엔터 경영이 뭔지 보여주고 있으니까."
"...."
MZ 경영이 뭔데요.
"그래서 오디션 프로그램 하나 기획 중이거든요. DK, 턴업이랑 같이."
"네. 대박 나길 바랍니다."
"혹시 참여하고 싶으면 연락해 주셔도 됩니다."
"아, 네."
프렌즈를 제외한 기존 빅3 엔터가 힘을 모았으니.
프로그램은 망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지 않을까.
'.... 는 아니네.'
미안한데 망할 것 같아요.
뒤통수가 갑자기 간지러워.
"오빠, 빅 3가 모였으면 대박 아니야?"
"음, 글쎄."
그 방송, 간지러운 게 아니라 따끔따끔한 걸 보니.
".... 존망할 것 같아."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엄지유.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정 대표."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귀한 손님의 목소리.
"할머니!"
은서 할머니께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죠?"
"그럼."
당장 은서가 앉아있는 자리로 안내하려고 했는데.
"자네, 내가 원하는 부탁 하나 들어준다고 한 거 기억하나?"
"아.... 네. 기억하죠."
그때가 언제였더라.
병문안 갔을 때였나.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네?"
내 부탁을 대신 생각해주신 건가.
"스카이 엔터 매니지먼트 지사를 미국에도 설립하지."
"그건 너무 사업이 커지는데요."
"생각 좀 해보게나."
"...."
간질간질한 뒤통수를 긁으며 멀어지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핀 브라운 씨, 어떻게 지내시나.'
결혼식 축하 문자는 보냈다던데.
오랜만에 전화 한번 해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