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새 출발(6)
정글의 밤은 수많은 야생동물의 활동 시간이다.
나무 옆에 사는 타란툴라.
밤에만 일하는 병정개미.
그래도 스탭이 사전답사를 많이 했다더니.
근처에 위험한 독성을 품은 생물은 없었다.
찌르르르─
고요한 분위기 속에 울려 퍼지는 풀벌레 소리.
텐트 입구에 달라붙은 거미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마존 모기가 그렇게 세다더만."
습관처럼 미세한 가려움도 느낄 수 있도록 연습했는데.
그 때문인지, 간지러운 감각이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옆 자리에 서 피디님이 생소한 노래를 들어도.
"뭐냐, 역배각."
"오오, 이 노래 괜찮아요!?"
"글쎄요."
가사나 보컬도 없이 MR만 있는 노래.
개인적으로 별론데 호불호는 갈렸다.
"혹시 뜰 것 같습니까?"
"...."
평소였다면 뜰 것 같았겠지, 이게 바로 역배각이라.
근데 지금은 그냥 모기한테 물려서 간지러웠으니.
"누가 만든 노래에요?"
"아, 우리 조카가 만든 노랜데."
"어쩐지 좋더라."
"오."
서 피디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촬영 초반에 분량 걱정이 많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주희 씨 덕분에 걱정이 없네요."
"다행입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저한테요?"
"네. 우리 방송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주실 줄은...."
"...."
그냥 주희가 혼자 다 한 거에요.
나는 오히려 말리고 싶었는데.
"어라, 잠깐만."
순간, 텐트 입구에 달라붙은 거미는 천천히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아씨! 텐트 입구 제대로 안 잠궜어!"
"으아아."
"좀 잡아봐요!"
누가 그러던데, 타란툴라는 겁이 많은 거미라고.
근데 손바닥만 한 거미를 보면 인간도 무서웠다.
"아, 그러게 나무 옆에 텐트 치지 말자니까요."
"대표님, 같이 좀 잡아봐요."
"아오."
찌이이익─
나는 텐트 입구를 열고 곧장 탈주했다.
다큰 남정네 둘이 벌레 때문에 다투니까 현타가 찾아왔다.
그 와중에 뒤통수는 간지러워서 온통 역배각 투성이었다.
이제 고작 저녁 6시.
해는 빨리 떨어졌지만, 생각보다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주희야, 뭐 하니."
"아, 대표님."
나는 근처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는 주희를 발견했다.
"니가 맥주를 먹는다고? 양주희가?"
"한국이었으면 절대 안 먹었죠."
".... 그러네."
근데 어디서 구했대.
"게임 이겨서 제작진이 주셨어요."
"아하."
"한 입 하실?"
"됐네요."
근처에 스탭들도 돌아다니는데 조심해야지.
"실장님, 고마워요."
"뭐가."
"최성락 씨, 다 알고 정글 데려온 거잖아요."
"???"
알기는 뭘 알아.
뒤통수 간지러.
모기 쉑을 원망하며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거 봐, 민망할 때마다 뒤통수 긁으시잖아요."
"뭔 소리야."
모기 물린 건데.
"그런 사람인 줄도 몰랐네요."
"...."
이내, 피식 웃더니 맥주를 들이켜는 주희.
"존경하는 삼촌이 욕먹는 거 보고 연예인이 되기로 했는데."
"결국, 다 잘 됐네."
"네? 뭐가요."
"최 씨 아재 덕분에 월드 스타가 탄생했잖아."
"에이, 무슨."
아마 주희는 운동을 했어도 이름을 알렸을 것 같지만.
매니저로서 이런 아티스트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대표님 덕분이에요."
"응?"
"최 씨 아재 말고 대표님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요."
"...."
아, 뒤통수 간지러워.
아마존 모기는 한국의 시골 모기보다 강력했다.
"대표님이 그렇게 긁을 때는 무조건 진실만 말한다고 하던데."
"누가 그래?"
"예지 언니요. 수호학개론 권위자예요."
"...."
수호학개론은 누가 개설했니.
"여기들 계셨네."
그때, 소미는 품 안에 털 짐승을 안고 걸어오며 말했다.
"다이애나 언니는 벌써 자요. 요즘 잠이 많아졌어."
"그건 정글에서 만난 애완동물이니?"
"네. 먹이 줬더니 저한테만 와요!"
"참나."
더럽게 왜 쥐새끼를 안고 있어.
"소미야, 그거 이름이 뭐니."
"이거 아구티! 귀엽죠!?"
"아구창?"
".... 아구티! 설치류요!"
그럼 쥐 맞잖아.
털이 고르지 않고 삐쭉삐쭉 대충 삐쳐 보였다.
"한 번 삶았냐."
"으앙, 너무해!"
"니가 더 너무해."
"히잉."
이내, 소미는 한쪽 풀숲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저기 카메라 설치됐네."
"응?"
그녀의 시선 끝에 보이는 빨간색 불빛.
우리가 나눈 대화는 전부 녹화 중이었다.
'최성락 씨, 미안.'
그렇게 다사다난한 정글 1일 차 밤이 저물어갔다.
"내일 야우리족 만나러 가는 거 알지?"
"그럼요."
"위험하다고 들었으니까 조심해."
"네에."
뒤통수에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감각이 거슬렸다.
네비게이션 없이 부산 내려가는 기분.
아직도 정글 생활은 이틀이나 남았다.
* * *
같은 시각, 솔라 맏언니 라인 두 명만 남은 한국.
두 여인은 함께 라디오 스케줄에 참여했다.
라디오 1부 방송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
예지는 억지로 텐션을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서야, 이거 뉴스 봐!"
"뭔데?"
"김찬호 감독님 왕의 품격 엎어졌나 봐!"
"그래?"
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슬픈 소식 아닌가?"
"아 그러네."
"그거 수연 언니가 엄청 하고 싶어했잖아."
"아 그러네."
"...."
분위가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
그냥 뉴스 기사를 말한 건데.
"은서야, 오늘 저녁에 같이 뭐 먹을까?"
"음, 지유가 불렀는데."
"그럼 어쩔 수 없고."
"미안."
"아니야."
라디오 스탭들도 있는 자리에서 민망한 기류가 흘렀다.
뭐지, 어색한 분위가 어쩔 거야.
솔라 멤버 중에 제일 친했는데.
예지는 습관처럼 입술을 꼭 깨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저기, 혹시 요즘 힘든 일 있어?"
"언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은서.
사람 마음은 전부 똑같다. 당연히 느꼈겠지.
"내가 새치기하는 것 같아서 참아보려고 했는데."
"으응?"
"미안. 너무 질투가 나서."
"아아...."
순간, 예지는 그녀가 하는 말을 100% 이해했다.
'연기 욕심이었구나....!'
할리우드에 먼저 진출한 나를 질투하고 있었어!
연기욕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솔직하게 말해주니 되려 고마웠다.
"은서야, 내가 배려했어야 했는데. 그동안 몰라줬네."
"아니야. 내 잘못이지."
"앞으로 선의의 경쟁을 할게."
"진짜!?"
"응. 대표님께서 주시는 건 뭐든."
"...."
그게 어떤 작품이라도 공평하게 나눌 거야.
자신에게 들어온 작품도 양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양보하겠다는 건 아니고."
"마음을 반으로 나눌 수 있다고?"
"당연하지. 대표님께서도 우리 둘 다 아끼는 마음은 똑같으실 거야."
"세상에...."
은서는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을 바라봤다.
"언니가 이해심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다 이해해. 괜찮아."
".... 괜히 내가 더 미안해지네."
"미안할 필요 없어. 질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와, 대인배!"
대인배는 무슨.
이 정도 가지고.
"선의의 경쟁, 알겠어. 언니."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헤헤."
은서의 냉랭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라디오 부스에 있는 스탭들도 미소를 지었다.
"언니,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끙끙 앓고 있었는데."
"왜 그랬어. 편하게 말을 하지."
"내가 어떻게 그래."
"...."
참, 은서도 마음이 너무 여려서 탈이었다.
연기 욕심이 있다고 마음껏 말도 못하고.
'그동안 그런 것도 모르고....'
연습생 시절부터 함께 지낼 세월이 얼만데.
여태까지 마음도 몰라줘서 미안할 지경이다.
"이제 나도 다 알았으니까. 편하게 경쟁하자."
"알겠어. 언니."
예지는 은서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돌아오시면 네가 먼저 말해."
"내가? 먼저?"
"응. 그렇게 해."
"...."
좋은 작품 골라달라고 먼저 솔직하게 고백해.
"나는 괜찮으니까 네가 먼저 말해도 괜찮아."
"아니, 언니 왜 이렇게 쿨해?"
"너랑 나랑 둘 다 잘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야."
"둘 다 동시에....? 그게 가능해?"
"당연하지!"
예지는 혼란스러워하는 은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제주도 때는 시기가 겹쳐서 그랬지."
"아, 음...."
제주도에 있을 당시 개봉한 첫사랑.
로이랜드와 상영관이 많이 겹쳤다.
"대표님께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실 거야."
"어, 으응."
"서로 날짜만 피해서 일정을 잡아보자."
"...."
한편, 은서는 예지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 같아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러니까....'
대표님이 날짜만 피해서 두 명이랑 데이트해도 된다고!?
여기가 대한민국이 맞는지.
언니, 할리우드 갔다 오더니.
"진짜 많이 변했구나?"
"???"
거의 할리우드 현지인이 다 됐다.
"두분 혹시...."
그때, 라디오 MC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왕의 품격 영화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아."
순간, 은서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맞아요. 우리 둘 다 연기 욕심이 많거든요."
"오, 그렇군요!"
예지 언니, 거짓말이 많이 늘었다.
두 사람이 한 남자를 두고 싸울 뻔한 이야긴데.
* * *
다음 날, 아침.
먼 이국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왕의 품격 제작 연기...."
물론, 나쁜 스캔들이나 이슈가 터진 건 아니었다.
제작사와 투자사의 사정으로 무기한 연기됐을 뿐.
'영화 들어갈 때가 되긴 했는데....'
「악마가 되었다」 서브 여주는 자존심 상하려나.
배역은 좋지만, 하필 여주인공이 진세은 씨라서.
'자존심 때문에 안 하시려나.'
그때, 텐트 밖에서 조감독님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잠시 후,
정글 제작진은 야우리족을 만나러 모두 함께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카메라에 담을 장면이 계속해서 나왔다.
"주희 씨는 대체 무슨 훈련을 시킨 거예요?"
"...."
서 대표님은 의문을 가득 품고 질문했다.
"걸그룹이 아니라 운동선.... 아니, 특수부대원 같아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훈련시킨 게 아니라 혼자 알아서 컸어요.
"아, 대표님."
"네?"
"수연 씨 작품 소식 들었습니다."
"아, 네."
"상심이 크시겠네요."
"어쩔 수 없죠."
수연 씨가 알아서 선택하시겠지.
작품 선택 추천해 줄 수는 있지만, 선택은 본인의 몫.
기약도 없는 왕의 품격을 기다리든, 다른 걸 고르든.
'.... 알아서 하시겠지.'
그때, 피디님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야우리족."
"협의는 된 거죠?"
"네. 가이드랑 사전답사는 충분히 했습니다."
"아하."
멀리서 들려오는 강인한 전사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
과연, 강인한 전투민족의 향기가 느껴진다.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우우우우─!
규칙적인 음성에 절로 심장이 움츠러드는 느낌.
전사들은 죽창을 들고 눈빛에 살기를 내뿜었다.
'어휴, 살벌하네.'
제작진 대표로, 김병주 씨는 출연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해선 안 돼!"
"아, 위험해서요?"
"아니, 돈이 더 들어."
"???"
이내, 퍼포먼스를 마친 야우리족.
곧장 머리에 깃털을 꽂은 할아버지가 천천히 다가왔다.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말했는데.
"인별그램은 50달러, 너튜브 100달러."
"네?"
"업로드 시 추가 요금이 있습니다. 손님."
"...."
자본주의 원주민 뭔데.
"너무 비싸요, 좀만 깎아주세요."
"비자 카드? 아니면 현금?"
"아, 현금이요."
"그러면 10% 할인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전 세계 만국 공통이었구나.
자본주의 맛을 보면 쉽게 못 끊지.
심지어, 전사들은 솔라 멤버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걸스온탑 봤어요."
"진짜요?"
"예압. 넥플렉스로. 개꿀잼."
"...."
이 정도면 그냥 문명인 아니냐.
"저기."
그중 부족민 할아버지는 헛기침하며 내게 다가왔다.
"솔라 멤버들 셀카 좀 찍읍시다."
"예?"
"SNS에 올리면 홍보가 될 것 같거든."
"근데 왜 저한테...."
"그쪽 허락 맡아야 한다던데."
"아하."
나는 서 피디님과 눈을 마주치고 입을 열었다.
"솔라랑 셀카 찍는데 4달라."
"4달라는 너무 비싸서 부담되오. 2달러로 갑시다."
"놉. 무조건 4달라."
"어후, 쓰리 달라."
"사딸라!!!"
"올라잇, 포 달라!"
"오케이 땡큐!"
우리는 짭 부족민들과 사전에 준비한 컨텐츠를 진행했다.
'자본주의에 찌들었지만....'
카메라 앞에선 프로 워리어.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하시네.
특히, 양주희 앞에서 힘자랑하는 야우리족 최고의 전사.
그는 자본주의 헬스로 단련한 헬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희가 무거운 거 더 잘 드네요."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여자가....?"
"쟤는 여자가 아니라 아이돌이에요."
"꿈인가."
꿈은 아니고, 주희는 밥 먹고 쇠질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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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의 정글 생활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한국에도 돌아왔다.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