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재능(5)
예지의 마음을 알게 된 이후.
나도 모르게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연습실 쉬는 시간에.
스케줄 가는 중간에.
밴에 올라탈 때에도.
지금처럼 단둘이 차를 타고 스케줄을 갈 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실장님, 왜 자꾸 쳐다보세요?"
"음, 연말 가요제 준비는 잘하고 있어?"
"그럼요."
엔넷 마미 시상식은 다 끝났지만.
아직 공중파 3사 가요제가 남았다.
'예지는....'
솔라 멤버 중에서도 유독 나를 잘 따르는 친구.
그게 하필이면 예지라서, 리더라서 행복했지만.
끼이익─
이내, 너튜브 스튜디오 현장에 도착했다.
"지유랑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에."
이번에 흉가 체험이었나.
그런 게 뭐가 무섭다고.
멤버들과 합류하는 예지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톡, 토톡─
이내, 인터넷 검색창에 타이핑을 두드렸다.
[기분 안 나쁘게 거절하는 법]
"귀하의 역량은 우수하나 본인과의 성격 차이로 인해...."
뭔 소리야.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면 거짓말이겠지.
한국에서 예지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아직은....'
너무 일렀다.
솔라는 다섯 멤버가 피땀 흘려 만든 소중한 브랜드.
공든 탑을 내 손으로 무너뜨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 그러기엔.'
이제는 잃어버릴 게 너무 많아졌다.
당장 얼굴도 팔렸는데 어떡하겠어.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제대로 성공하면....'
그럼 지금이랑 상황이 많이 바뀔 수도 있겠지.
만약에 세계적인 여배우로서 정상에 오른다면.
"오빠! 무슨 생각해."
"아, 지유야."
그때, 지유가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오빠, 팬들이 보낸 선물 확인했어?"
"어, 봤지."
"응. 그중에 오빠한테 온 것도 있어."
"나한테?"
"패딩."
지유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겨울 패딩인데, 이거 입고 멤버들 잘 챙겨 달래."
"삼촌팬인가, 엄청 따뜻한 분이네."
"응. 실제로 봤는데 인상 좋더라."
"...."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유야, 솔라 멤버 중에 한 명이 연애하면 어떨 것 같아?"
"뭐? 절대 안 돼!"
"...."
상상만으로도 싫으냐.
"누구야, 누가 문제야? 은서 언니? 소미?"
"예지....?"
"거의 핵폭발이지."
"...."
역시, 그중에서도 예지가 가장 타격이 클 거야.
코어층 남성팬들은 거의 대부분 예지 팬이니까.
"역시, 오빠도 그 소식 들었나 보네."
"응? 뭐를?"
"로이랜드 촬영 때 톰이 계속 들이대다가 까였다던데."
"...."
그런 일이 있었니.
"톰이면 남자 주인공이잖아."
"맞아. 나이도 서른 넘었는데. 뒤질라고."
"...."
나도 서른 넘었는데요. 뒤질래요?
"아오, 그 자식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
주제도 몰라서 미안하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아우, 놈팽이 같은 놈이 들이대니까 개빡치잖아."
"...."
놈팽이 같은 놈이라 죄송합니다.
"뭐야, 오빠는 안 빡쳐?"
"더 말하면 개빡칠 것 같으니까 그만해."
"오키."
엄지유, 복수할 거야.
"너도 오늘 솔라비티 촬영이 흉가 체험인 거 알지?"
"응. 알지."
"거기 네가 출연해."
"내, 내가? 오빠가 나가는 거 아니었어?"
"꼬우면 네가 실장해."
"힝. 너무해."
지유가 멀어지고, 한동안 현타가 찾아왔다.
멤버들과 웃고 떠드는 예지.
그 환한 미소를 쳐다보니까.
'.... 졸라 예쁘네. 진짜.'
순간, 예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나도 반가워."
"네?"
예지는 내게 다가와 다시 말을 걸었다.
"실장님 오늘 왜 그래요?"
"내가? 뭐가?"
"흐음, 좀 이상한데."
"...."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다음 생각해 보자고 할까.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
"예지야, 우리 여행가는 거 말인데...."
"에이, 그거 때문이구나?"
"응?"
예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멤버들도 다 같이 여행 가고 싶대요."
".... 우리 단둘이 아니고?"
"단둘이 가든지, 멤버들이랑 가든지, 저는 상관없는데요."
"읭....?"
뭔데, 미국물 먹더니 쿨해졌냐.
"뭐예요, 실장님."
".... 오해야."
시봉. 개쪽팔리네.
나 혼자 설레발 쳤다.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하신 건....?"
"내가? 설마요."
"아하하. 그럼 저는 회의 진행하러 가볼게요."
"어, 그래."
잠깐 행복했다.
띠링─
그때, 서연정 대표님께서 내게 톡을 보냈다.
[내일쯤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여왕님께서 직접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보통은 박 본부장님을 통해 전달했으니까.
"뭐지."
* * *
여자의 촉이라고 해야 할까.
정수호 실장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단둘이 여행 가자는 이야기 이후로 변했으니까.
'역시, 너무 성급했나.'
예지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 생각에 잠겼다.
고백하다 차여도 포기할 마음은 없었지만.
'아직은 아닌가 봐.'
당분간 썸 타다 적당한 때 비밀 연애도 괜찮은데.
최소한 로이랜드는 개봉하고, 성적표를 보고 나서....
'아니지.'
아무리 크게 성공해도 결과는 똑같을 터였다.
솔라의 성공은 전부 그분의 예상 범주였으니.
'.... 내 힘으로 성공해야 해.'
그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성과가 필요했다.
한국의 팬덤을 덮을 만큼 미국에서 성공하면.
'그때는....'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언니, 모해."
"응?"
그때, 소미는 오늘의 팀 선택을 제안했다.
"흉가 체험, 나랑 같이 가게 해줄까?"
"...."
무슨, 큰 혜택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줘.
신소미 팀과 양주희 팀.
당연히 후자가 좋겠지.
"언니가 원하면 내가 같이 가주고."
"그럼 안 갈게."
".... 같이 가주세요."
"그럴까?"
"응!"
군자의 연애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일단, 다른 경쟁자만 견제하고 한발 물러나야지.
드르륵─
그때, 강력한 경쟁 상대가 회의실에 들었다.
매일 야한 옷을 입고 실장님을 꼬시는 코디.
역시, 오늘도 슴골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영 언니, 안녕하세요."
"아, 예지 씨."
흉가 체험을 위한 의상을 내려놓는 그녀.
"예지 씨, 가짜 흉가라도 밝은 옷보다는 어두운 계열로...."
"언니,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네? 아뇨. 관심 있는 사람은 있죠."
"누구요?"
아영은 방긋 웃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정 실장님이요."
"!!!"
이 사람, 거침이 없다.
누군 2년이 걸렸는데.
이내, 엄지유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그녀를 불렀다.
"아영 씨, 회사에서 그러지 말랬죠!"
"엥, 우리 회사 연애 금지였어요?"
"당연하죠! 놀러 왔어요!?"
"아하, 우리 회사 유교 회사였네. 나중에 바꿔야겠다."
"나, 나중에 바꾸긴 뭘 바꿔요!"
"나중에 제가 높은 사람 될 수도 있죠."
"아이 참!"
생각과 행동이 쿨하고 자유로운 영혼.
미국에 가서 이런 마인드부터 배울걸.
'연애도 많이 해봤겠지....?'
지유한테 듣기를, 회식 때 클럽을 간다던데.
앞으로 얼마나 능숙하게 실장님을 꼬시겠어.
"아영 언니, 저랑 더 친하게 지내요."
"오, 저는 너무 좋아요!"
누군가 친구보다는 적을 더 가까운 곳에 두라고 했다.
"앞으로 연애 상담은 저랑만 해요."
"콜! 좋아요!"
"헤헤."
"...."
성공적. 한 시름 덜었다.
"음, 그래서 오늘 팀은 어떡할 거야?"
곧이어, 오늘의 흉가 체험 멤버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주희 언니랑."
"나도."
양주희, 엄지유, 신소미, 다이애나.
주희도 공포 좋아하진 않을 텐데.
예지는 소미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미야, 너랑 나랑 둘이 가."
"엥, 두 명만?"
"응."
다들 양주희랑 같이 하고 싶은 눈치.
예지는 소미를 콕 찍어서 호명했다.
"어차피 다섯 명이니까 둘셋 나눠야지."
"으음, 그럼 세 명이 좋은데."
"됐어. 나만 믿어."
"진짜루 믿어도 돼?"
"응. 언니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어요."
"오, 정말?"
"그렇다니까."
공포 영화도 상당히 잘 보는 편이었다.
흉가라도 해도 그냥 세트장일 뿐인데.
'그게 뭐가 무서워.'
실장님한테 못난 모습을 보일 마음은 없었다.
'쿨하고 차갑게....'
.
.
.
.
.
"꺄아아악!"
"엄마아...."
예지는 소미의 뒤에 숨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소미이, 누가 방금 내 발목 붙잡았더...."
"으아앙, 언니. 나도 무서워."
"엄마아아...."
"언니, 울어?"
토닥토닥 위로하며 손수건을 꺼내는 막내.
"언니, 여기에 흥-, 해."
"흥."
"빨리 가자."
"빨리이."
겁쟁이 두 명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냈다.
"소미야, 나 지금 검은 눈물 나와써?"
"아냐. 예뻐."
".... 고마어."
* * *
「첫 사랑」 촬영지.
장은서는 마지막 씬을 기다리며 대본을 확인했다.
이번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과거사.
할머니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은서야, 드디어 마지막이네."
"그러게요."
아시아의 프린스, 정상훈 배우.
이제는 그와도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다.
정 실장님이 처음으로 맡은 배우라던데.
"은서, 그동안 고생 많았어."
"오빠도요."
문득, 처음 연예계에 입문한 정 실장님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이전 회사에선 불운을 몰고 다녔다던데.
손대는 작품마다 망해서 파괴왕이라고.
"그때는 나도 갓 데뷔했고, 수호 형도 매니저가 처음이었지."
"오오....!"
"뭐야, 이게 그렇게 신기해?"
"당연하죠!"
천재 프로듀서의 초보 매니저 시절.
그 누구라도 궁금할 만한 주제였다.
"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뭐냐."
정상훈은 팔짱을 낀 채로 은서를 빤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
그러게. 나 왜 그렇게 관심이 많지.
"누가 보면 짝사랑하는 남자 얘기하는 줄."
"뭐요?"
"왤케 화났어."
"후우."
그냥 한 번씩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더욱더.
"그냥."
데뷔 때부터 솔라를 키우려고 가장 노력한 사람.
어쩌면, 솔라 멤버들보다 더 열심히 뛰었을 테니.
'짝사랑은 아니고....'
고마운 마음이겠지.
그냥 딱 그 정도겠지.
"상훈 씨, 은서 씨! 마지막 장면 갈게요!"
그때, 멀리서 소리치는 조감독님.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오빠."
"그래."
마침내, 이번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찍으러 가는 길.
정수호 실장님께서 가져온 소중한 기회가 아니던가.
은서는 곧바로 배역에 몰입했다.
대본에는 없지만 장은서가 추가한 장면이었다.
직접 입으로 전해 들은 은서만 아는 씬이었기에.
"레디.... 액션!"
상훈이 준비한 차가운 도시락.
은서는 그 앞에서 입을 열었다.
"내가 따뜻하게 데워줄까?"
"응."
풋풋한 고백을 앞두고, 은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리 와."
"응?"
은서는 도시락 대신 상훈을 꼭 껴안았다.
"괜찮아.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
"...."
도시락은 차가워도 마음은 따뜻해지는 씬.
열린 결말을 닫힌 결말로 바꾼 엔딩이었다.
".... 내가 진짜 잘할게."
"감당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고마워."
부모님의 연애사를 전 국민이 알게 되는 건가.
또르르─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아니었는데.
어째선지 감독님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도.... 처음부터 너였어."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컷을 외치는 감독님.
은서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현장의 모든 스탭들은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장은서가 보여준 풍부한 감정의 여운을 즐기면서.
* * *
구 팀장님께 소식을 전달받고 짠한 기분이 들었다.
'은서가 많이 힘들었나 봐.'
그래도 끝이 나는구나.
첫 사랑 영화 제작도 어느새 마무리 단계.
오늘 여왕님도 그걸로 부르신 게 아닐까.
똑, 똑─
서 대표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아, 거기 앉으세요."
"네. 대표님."
고혹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실장한테는 항상 고맙네요."
"네?"
"우리 회사, 솔라 데뷔 전에는 정말 힘들었거든요."
"...."
그래서 회사도 팔린 거겠죠.
"솔라 성공은 전부 대표님께서 열심히 짜주신 세계관 덕분입니다."
"오오, 뭘 좀 아시는군요!"
"...."
빈 말이었는데요.
"아무튼, 오늘 부른 이유는 이거 때문이네요."
"이게 무슨...."
나는 대표님께서 건넨 시놉시스 한 장을 확인했다.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 「걸스온탑」.
서바이벌 방송이 요즘에도 먹히려나.
"여기 심사위원 제안을 받았거든요."
"아, 그러십니까?"
"방송 어때요?"
"시놉만 봐서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장점이에요."
"네?"
서 대표님은 씨익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 방송, 큐앤지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서연정 대표님은 방송의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무슨 짬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빅 3가 동시에 손절한 방송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누가 뭐래도 큐앤지 레이블은 걸그룹 명가니까요."
"...."
어쩐지, 홍보를 엄청 거창하게 해놨더라고.
아직 심사위원도 비공개로 진행했으면서.
'그럴 만도 했네.'
DK 뮤직, 빅보스 사운드, 턴업 레코즈.
과거, 빅 3로 불렸던 화려한 라인업이었으니.
"거의 우리가 뒷수습해달라는 거네요."
"대신 많은 요구를 할 수도 있죠."
"무슨 요구요?"
서 대표님은 팔짱을 낀 채로 대답했다.
"우선, 다른 회사 연습생은 안 받는 조건이에요."
"아, 그러면...."
"상위권 연습생은 우리 회사에서 데뷔시켜야죠."
"...."
순간, 뒤통수에서 익숙한 감각이 피어났다.
"솔라 멤버들이 멘토가 돼서 좋은 이미지를 챙길 수도 있고."
".... 그래요?"
"뭐, 심사위원을 전부 우리 회사에서 채울 수도 있겠네요."
"혹시 그 중 한 명이 저예요?"
"당연하죠."
그게 왜 당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 제가 심사위원을 어떻게 해요."
"하아, 또 겸손하시네. 그것도 습관이에요."
"아니."
겸손이 아니라 자아 성찰인데요.
막귀에, 막눈에, 취향도 독특해서.
"심사위원을 아무나 해도 되는 거예요?"
"아무나, 라뇨?"
"...."
서 대표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뒤통수에서는 간질간질한 감각이 밀려왔다.
"정 실장님은 솔라의 아버지 아닌가요?"
"...."
그놈의 아버지는 진짜.
그래서 엄마는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