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재능(4)
「로이랜드」 크랭크 아웃 뉴스 기사를 확인했다.
이미 영화는 편집과 프로모션 단계에 들어갔다.
"구 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업무에 복귀한 구현식 팀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실장님, 헥토파스칼킥 데뷔곡 연습 영상입니다."
"아, 그래요?"
"내년 1월에 데뷔한다고 들었습니다."
".... 얼마 안 남았네요."
슬쩍 영상을 확인해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쉽지 않겠네.'
무대는 괜찮은데, 뒤통수에서 신호가 왔다.
"지금 춤이랑 노래 싹 다 바꾸라고 하면 가능할까요?"
"....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죠?"
"네. 데뷔를 반년쯤 늦추면 모를까."
"그야."
이제 와서 춤이나 노래를 바꿀 수는 없어서.
"누구나 데뷔하자마자 성공할 순 없으니까요."
"...."
이내, 민망한 표정을 짓는 팀장님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미국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실장님께서 더 고생하셨죠."
"저야, 뭐...."
겉보기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동안 회사에 꽤 많은 일이 있었다.
당장 다이애나는 도하나가 됐고, 신입 코디도 들어왔으니까.
"태양빛을 공식 팬카페로 인정하자마자 스페이스 어플에 입점했고...."
"아, 저도 큐앤지가 분리될 수도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맞아요. 소문 아니고 팩트에요."
"오오, 그럼....!"
구 팀장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정수호 대표님이 되시는 겁니까!?"
"???"
이분은 내 그릇을 얼마나 크게 평가하는 걸까.
"공동대표 두 분 중에 한 분이 하시겠죠."
".... 아하."
아쉬워하는 표정 뭔데.
"아무튼, 지금 블루숄츠 컴백한 거 아시죠?"
"그럼요."
송나연에서 다이애나, 그리고 블루숄츠.
연말에 음원 차트 경쟁이 어마어마했다.
"엔넷 마미 시상식 3인조, 의상 신경 좀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가볍게 업무를 이관하고, 밀린 대화를 이어갔다.
"실장님, 요즘 첫 사랑 영화 촬영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거의 끝나갑니다. 최근에는 제가 촬영장 들르고 있어요."
"실장님께서 직접이요?"
"네. 이제 촬영도 마무리 단계라서."
"앞으로 은서는 제가 케어하겠습니다."
"아, 그럼 부탁드리죠."
없을 때는 몰랐는데, 구 팀장님이 일당백이었구나.
다음부턴 엄지유를 보내야겠다.
옛정 때문에 봐주는 건 끝났어.
"다음 솔라비티 촬영은 흉가 체험이라면서요."
"네. 그렇긴 한데."
혹시 그것도 대신 해주실래요?
"즐기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하하."
"...."
즐기긴 누가 뭘 즐겨요.
"미국에서 예지가 작사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요?"
"네. 정식으로 교육받았는데 재능이 있더군요."
"...."
우리 예지는 재능이 진짜 끝이 없네.
"예지는 당분간 스케줄이 없는 건가요?"
"네. 한동안 로이랜드 프로모션 활동 위주로."
"알겠습니다."
고생했으니 당분간 쉬어도 괜찮지
영화 개봉하면 많이 바빠질 테니까.
"이틀 뒤에 마미 시상식 있으니까, 그것부터 신경 쓰죠."
"네. 실장님."
구 팀장님이 사무실을 벗어나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뚜루루루─
곧장 예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여보세요.
"예지야."
김 리다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다.
"요즘 힘든 일 있어?"
-네. 있어요.
미국에서 고생하더니 번 아웃 왔구나.
-실장님, 여자친구 생겼죠.
"아니."
-거짓말. 제가 다 봤어요.
"뭐를."
여자 손도 못 잡아봤어요.
-저는 미국에서 남자랑 말도 안 했는데.
"나도야."
-거짓말. 저는 진심이에요.
"...."
아니, 아이돌이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소미 사춘기 끝나고 예지한테 옮겼나.
"예지야, 요즘 많이 힘들어?"
-살짝?
"내가 어떻게 해줄까."
-.... 저랑.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저랑 여행가요.
"알겠어."
-진짜요?
"응."
솔라비티 컨텐츠 중에 단체로 캠핑가는 것도 있거든.
어차피 저번에 은서도 여행 가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사실은 안 그래도 조만간 가려고 했어."
-저, 저랑요?
"응. 그렇다니까."
-그럼 기대할게요!
"그래."
* * *
며칠 뒤, 엔넷 마미 시상식장.
"형식아."
구현석 피디는 리허설을 준비하며 한 스탭과 대화를 나눴다.
올해도 뮤직스타 스탭들이 마미 무대 준비에 대거 참여했다.
"너는 올해 가수상을 누가 탈 것 같냐."
"그야...."
사실상, 송나연은 수상권에서 제외되었다.
단 한 번도 마미에 참석한 적이 없었기에.
"하이엔드는 요즘 해외 활동에 집중했으니까."
"그럼 블루숄츠?"
"아뇨. 솔라요."
"그래?"
"네."
해외팬은 몰라도, 솔라의 국내 팬덤은 세 그룹 중에서도 최상위권.
솔라는 1년 반짝 떠오르는 태양이 아니었다.
이미 찬란하게 빛을 발산하는 별이 되었다.
'오늘 결과에 따라....'
어쩌면, 내년 코첼라 무대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블루숄츠도 마지막에 컴백하지 않았던가.
코첼라 음악축제의 '헤드'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서.
"신인상 후보는 쟁쟁합니다."
"그렇겠지."
그야말로, 걸그룹 전성시대.
솔직히 4세대 걸그룹은 솔라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신인 걸그룹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성적도 준수했으니.
이러다 내년까지 이어질 수도.
"올해 신인 보이그룹은 씨가 말랐네요."
"대중성에서 멀어졌으니까."
"...."
사실, 신인 보이그룹도 극소수 고래 팬들 덕분에 돈은 잘 벌었다.
팬들의 니즈만 맞추다 보니 대중에게는 외면받고.
당연히 음원 차트에서도 매번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내년 초에 큐앤지에서 보이그룹 데뷔한다던데."
"네. 티저 봤습니다."
"그룹명이 헥토파스칼킥이랬나.... 이름이 좀 특이해."
"지켜보면 알겠죠."
"그렇겠지."
큐엔지 레이블에는 정수호 실장이 있으니까.
그의 안목이 걸러낸 연습생들과 음원이라면.
"피디님, 다음 솔라 3인조 차례입니다."
"아, 그래?"
솔라의 정규 앨범 타이틀곡 「검은 태양」.
절묘한 편곡은 처음부터 3명이 부른 듯 자연스러웠다.
작년에도 SAS로 도하나가 편곡상을 탔는데.
다이애나가 '본인'의 상을 대리로 수상했었나.
'진짜 대단하긴 하네.'
무대 구성, 팬 서비스, 퍼포먼스.
그 무엇하나 부족한 면이 없었다.
'.... 재능의 깊이가 달라.'
혹시 솔라 멤버들은 전부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태어났나.
이어서, 블루숄츠 무대의 감상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는 역시인가.'
블루숄츠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전 세계 정상에 오른 걸그룹.
이제 두 팀의 경쟁은 본격적으로 이어질 듯했다.
솔라는 3인조로 밀리지 않는 무대를 보여줬으니.
띠리리링─
구 피디는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 뒤쪽의 흡연실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오, 현석아."
작년에 「탑아이돌」로 스타피디가 된 탁성수 피디.
올해도 뭐 하나 제작하고 시청률 0프로대 찍었던데.
"오늘 무대 어땠어요?"
"죽여줬지."
오늘따라 탁 선배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선배, 요즘 뭐 하나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 걸그룹 오디션 프로."
"걸스온탑."
"맞아."
역시, 탁 피디는 서바이벌이 어울려.
현역 걸그룹의 경쟁을 그린 「탑아이돌」과는 달랐다.
데뷔하지 않은 연습생의 스타성과 실력을 보는 방송.
"그거 제작비 빵꾸 났다고 들었는데."
"심사위원도 빵꾸 났다."
"뭐, 한 명 정도는 어떻게든...."
"DK 뮤직이랑 빅보스, 턴업이 전부 손절했어."
".... 아하."
"요즘 걸그룹이 너무 많아서 안 될 것 같대."
"...."
초반부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좌우하는 심사위원진.
세 명 중에 세 명이 다 나갔으면 끝났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양아치 새끼덜, 계약 직전에 파기했다니까. 분명히 짰어."
"에휴, 대형 엔터가 원래 그렇죠."
".... 오늘 큐앤지 레이블 여왕님께 급히 연락드렸다."
"흠, 쉽진 않겠네요."
"방법이 없을까?"
"글쎄요."
그거 벌써 참가자 지원 서류 받고 있지 않았나.
심사위원을 비공개로 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냥 다 탈락 처리하면 안 되겠지?"
"선배, 좆된 거 같은데요?"
"아, 방송이 엎어졌는데 어떡해."
"지금도 열심히 준비하는 연습생들의 노력은?"
"하아...."
요즘 애들 무섭거든.
갑질 피디라고 SNS에서 신상이 털리겠지.
아니면, 당장 어디서 심사위원을 구하던가.
띠링─
그때, 탁 피디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여, 여왕님께서 답장하셨어!"
"네?"
"미팅 잡혔다고!!!"
"...."
심사위원 한 명으로 될 게 아니잖아요.
'에이, 본인이 알아서 하시겠지.'
* * *
내 눈이 동태 눈깔인가.
리허설 무대에서 깔짝거리는 실력으로는 구분이 안 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탑 아이돌 그룹도 마찬가지.
'쟤들이 그 정도라고....?'
내가 볼 때는 별로인 거 같은데.
구 팀장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크으, 저는 엑스레이가 이렇게 잘하는 그룹인 줄 몰랐네요."
".... 그래요?"
"네. 당연히 실장님 기준에는 못 미치겠지만."
"...."
기준이고 나발이고, 리허설이라고 대충하니까 모르겠어.
"근데 플립나인은 오늘 100% 실력 발휘를 못 했군요."
"...."
제가 볼 때는 개잘하던데요.
솔라 데뷔 때보다 잘했는데.
"플립나인이면...."
"네, 맞습니다. 도라희가 탈퇴한 그룹."
"...."
프렌즈에 있던 구 팀장이 퇴사한 원인.
지금은 깔끔하게 잊고 잘 살고 계시지만.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구 팀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저는 언제쯤 실장님 안목을 따라갈지 모르겠네요."
"네?"
"헥토파스칼킥, 제 눈에는 도저히 스타성이 안 보였거든요."
"...."
제 눈에도 안 보였어요.
"근데 안무를 보니까 또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예예."
제가 못 보는 걸 상당히 잘 보시는군요.
구 팀장님 스카웃이 신의 한 수였네요.
'그래도....'
두 팀 정도는 팀장님과 의견이 정확히 일치했다.
"블루숄츠는 명불허전이네요."
"그야 당연하죠."
빅보스 사운드의 보석 같은 소녀들.
현재는 솔라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리고....'
오늘 뒤에서 두 번째 무대에 오른 솔라 3인조.
그녀들의 실력은 이미 똥촉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검은 태양, 편곡이 기가 막히네.'
양주희의 댄스 브레이크 시간을 연장했고,
소미의 보컬과 다이애나의 랩을 강조했다.
덕분에, 오늘 무대에 없는 멤버들의 빈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빌보드에 진출한 자타공인 천재 프로듀서.
다이애나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 애들도 잘하네요."
"네. 블루숄츠와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
솔라가 3월에 데뷔했으니까.
아직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솔라를 실장님께서 키우지 않았습니까. 하하."
"...."
지들이 큰 거 같아요.
저는 한 게 없거든요.
이내, MC들은 무대와 시상을 번갈아가며 진행했다.
명목상 아시아 어워드로 이름을 지었지만.
한두 팀을 제외하면 전부 K팝 아이돌 그룹.
오늘 솔라는 올해의 가수상, 노래상, 앨범상 후보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오늘 대상 하나쯤 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작년에 SAS로 노래상을 타지 않았던가.
올해도 하나 정도는 기대해 볼 만했다.
* * *
그날 새벽.
나는 회사에 출근해 연예계 기사를 확인했다.
[블루숄츠, 엔넷 마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상 수상! 오랜만에 국내 컴백한 4인조 걸그룹....]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그룹이니까.
당연히 탈만 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딸깍, 딸깍─
다음 뉴스는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세 가지 대상 중에 두 개를 탔으니까.
[솔라, 엔넷 마미 시상식에서 2관왕을 차지하다. 올해의 가수상과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스코어 2대 1이라고 본다면...."
일단, 이번에는 솔라가 우세한 건가.
이 늦은 시각에도 축하 인사는 끊이지 않았다.
각종 연예계 관계자들에게 연락이 쏟아졌으니.
벌컥─
그때, 문이 열리고 엄지유와 멤버들이 들어왔다.
다섯 명이 사이좋게 들어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
"아니, 이렇게 늦게...."
이내, 내게 달려와 꼭 안기는 예지.
"뭐, 뭐야."
"정말 고마워요!"
"...."
예지는 멤버들 몰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둘이 여행가는 거, 다른 멤버들한테 비밀이에요."
"???"
그게 무슨 말이야.
둘이 여행을 왜 가.
'솔라 단체 캠핑을 말하는 건가....?'
이내, 예지는 배시시 웃으며 허리에 두른 손을 풀었다.
"예지 언니! 누가 보면 언니만 상 탄 줄 알겠네!"
"좋아서 그러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하는 김 리다.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며 뒤통수를 긁었다.
'여행을 왜 둘이서....?'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멤버들에게 입을 열었다.
"애들아, 해외 인기는 블루숄츠 발 끝에도 못 미치는 거 알지?"
"에이, 좋은 날 너무해."
"팩트니까."
"우리 블루숄츠랑 비교하시네요."
"너희 위로 블루숄츠밖에 없으니까."
".... 그러네."
멤버들은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청 컸네."
"나는 아직도 신기해."
"...."
지유는 눈치껏 멤버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다들 내일 보자."
"실장님도 어서 퇴근하세요!"
".... 그래."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하는 리더.
지유와 멤버들이 물러나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예지가 내게 보여주었던 설레는 행동들.
".... 나 바본가."
남자랑 단둘이 여행을 왜 가겠냐고.
그냥 성실해서 따른 게 아니었다니.
"이거, 여행을...."
어떻게 가야 잘 갔다고 소문이 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