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오해받는 연예계 생활-26화 (26/200)

[26] 여배우(3)

내가 담당한 배우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배우부터 3년 동안 바뀐 네 명의 피해자들.

재수 없게 망했든, 작품 미스였든 내 담당이었으니.

"이수연 배우님."

"네?"

감정이 다채로운 천상 연기자.

내가 맡았던 유일한 여배우님.

"어떤 일로....?"

"...."

워낙 의존적인 성격이라 내 담당 중 피해 규모가 가장 컸다.

최근에 조금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연락하셨잖아요.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아 그랬죠. 제가."

"???"

지금은 남남이라 물어보기 민망한 모양인데.

"새 드라마 들어가신다면서요?"

"...."

SBC 법정 드라마, 내가 오디션 기회를 날려버린 작품.

대본도 재밌고 느낌도 좋았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워서.

"저기, 그거 솔라도 오디션 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근데 개인적으로 법정물은 저랑 안 맞아서요."

"개인적으로....?"

"아, 네. 뭐 그냥 감이죠. 하하."

".... 감!?"

무슨 방청객처럼 단어마다 리액션하는 게 귀엽네.

"게다가, JTBS 드라마에 오디션 일정이 겹쳐서요."

".... 재벌가 시집가기."

"네. 그거요."

대본을 읽을 때 가장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던 작품.

생각 없이 술술 읽히는 뻔하디뻔한 로맨스 드라마.

이 정도 했으면 대충은 알아들었겠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왠지 모르게 이수연 배우님 표정이 사뭇 복잡해졌다.

"정수호 씨, 어떻게 이렇게 바꿀 수 있어요?"

"그야...."

오디션 기회를 바꿀 수도 있죠.

"그냥 회사에서도 믿어주셔서요."

"믿음....? 겨우 그런 걸로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네?"

"아무튼, 제가 많이 오해한 것 같네요."

"???"

뭔 소리야.

"좋은 작품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커리어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또로맨스 미니시리즈.

웬만큼 대박 나지 않으면 한 줄짜리 필모일 뿐이지만.

'나한테 역배는 정배야.'

이제 나도 역 베팅에 뇌가 절여져서 그래.

아무리 불안해도 오로지 직진밖에 없다고.

곧장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예지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만 가자, 예지야."

"네에!"

곧이어, 약속 장소 미팅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종일 다채롭게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제트킥, 피처링 되려나.'

오늘 퇴근하기 전에 1본부에 한번 들러야겠네.

똑, 똑─

곧 사무실 앞에서 노트를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박 팀장님은 김 작가님과 함께 기다리고 계셨다.

"팀장님, 벌써 계약하신 건 아니죠?"

"작품 얘기하고 있었지."

"아하."

확실히, 김고은 작가님은 스타작가 중에서도 특별했다.

막장으로 시작해서 막장으로 끝났다.

그런데 또 시청률은 항상 잘 나왔다.

즉, 절대다수의 대중들이 뇌 빼고 시청하는 드라마 극본을 본능적으로 집필했다.

'나 같은 사람 말고, 이런 분이 진짜 천재지.'

김 작가님의 작품은 아무 때나 봐도 재밌다.

나처럼 홍대병 걸린 몇몇 힙스터들 말고는.

"정수호 매니저가 제 대본을 재밌게 봤나 봐요."

".... 네?"

옆에서 툭 하고 건들며 눈치를 주는 예지 덕분에 곧바로 반응했다.

"아후, 그럼요.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웠습니다!"

"엥,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닌데."

".... 여러 번 읽었어요."

가끔은 나도 나를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취향이고 나발이고 사회생활이 먼저지.

"오오, 그 정도야? 극찬이네."

"그만큼 재밌으니까요. 하핫."

주변 인물은 공기에, 주인공 원툴인 「나의 이중생활」.

웹드라마라 그런지 사건 진행이 미친 속도로 흘러갔다.

개인의 내면 성장을 그리는 모노 드라마.

고등학생 여주인공이 친구들 몰래 SNS 스타가 되는 내용인데.

너튜브 웹드라마 특성상, 10대가 주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반부터 막장 느낌이던데.'

아싸가 SNS로 인싸들보다 훨씬 인기인이 되는 흔한 클리셰.

근데 화장 떡칠로 뇌절, 삼절하더라고.

딱 그 부분을 읽을 때 뒤통수 가렵더라.

그냥 무난하게 외계인까지는 등장하지 않고 끝났으면 좋겠다.

"제가 조카 채널에서 웹드라마는 처음 해보거든요."

"아, 그렇죠."

"운이 좋아서 투자를 해주는 회사도 있었네요."

"그야, 김 작가님이니까 당연하죠."

"제가 지금 장소 섭외를 몇 군데 알아봤는데."

".... 여기는."

실제로 소미가 다니는 중학교.

교정이 예쁜 학교로 유명했다.

"여기서 허가해주셨어요."

"...."

살다 보니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아니,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 * *

큐앤지 레이블의 공동대표.

서연정 대표는 늦은 시각까지 음반 작업을 매진했다.

함께 작업하는 프로듀서도 지쳐서 곯아떨어질 무렵.

띠리리링─

오랜만에 친한 후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그럴까요?"

"어차피 하루 이틀 더 해서 될 것도 아닌걸요."

"알겠습니다."

어쩌면 몇 달, 혹은 반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더 오래 걸렸다.

이내, 연정은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수연이니?"

-네. 언니!

드림 에이전시 소속 배우이자 좋은 후배.

과거, 드라마 촬영 때 인연으로 친해졌다.

-저 지금 큐앤지 레이블 사옥이에요.

"오, 그래? 언니 보러 왔구나?"

-어.... 겸사겸사?

"뭐야, 대표실로 와."

-알겠어요!

한때는 커리어가 나락에 떨어지고, 그 후로 절치부심한 이수연.

한 작품으로 기사회생하더니 결국 <탑아이돌>로 탑을 찍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배우로서 필요한 연기력과 스타성, 빼어난 외모까지.

일견 완벽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큰 단점도 존재했다.

".... 선택 장애 왔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 딱 알 수 있었다.

중요한 선택을 대신 정해달라고 왔다는걸.

똑, 똑─

이내, 수연이 노크하고 대표실에 들었다.

"이번엔 무슨 작품 때문에 그렇게 갈팡질팡하는데?"

"어....? 어떻게 알았지?"

연정은 안부도 묻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어서 말해 봐."

"그게...."

서연정은 수연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경청했다.

요즘 정수호 매니저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려왔다.

'원래는 원망하지 않았나.'

하긴, <탑아이돌>에 함께 출연하면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봤겠지.

최근 정수호 매니저의 실력은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

서태성 프로듀서, 댄서 레드와인, 김고은 작가와 인연까지.

회사를 옮기고 나서 열심히 시장을 분석했겠지.

노력으로 안목이 성장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걸그룹 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수호가 키웠어."

"회사 서포트는요?"

"홍보나 영업은 하지. 근데 그건 루나도 마찬가지라."

"...."

연예계는 언제나 위험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언니, 고마워요. 완전히 정리했어요."

"그래? 작품은 고른 거야?"

"아뇨, 작품 말고. 정수호 매니저에 대한 제 입장."

"흐음."

결국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야.

'사실 나도...'

서연정 대표는 수연 덕분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지금 직접 제작하는 앨범을 왜 1본부에 맡겼을까.

'그냥 여태까지 늘 그랬으니....'

관성에 따라 익숙한 환경을 따랐다.

큐앤지의 메인 아티스트, 제트킥 사단과 함께했을 뿐인데.

혹시 정수호가 그들 전체보다 뛰어난 프로듀서는 아닐까.

"수연아, 고마워."

"저요?"

"응. 내가 생각이 너무 경직됐었어."

"그게 무슨....?"

"차기작 기대할게."

"아, 네에!"

서연정 대표는 당장 공세원 실장을 호출했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1팀 사무실에 짐을 풀고 멤버별 스케줄을 확인했다.

김예지랑 장은서는 대본 연습.

신소미는 학교, 다이애나는 작업실.

그리고 양주희는 연습.... 아니, 운동.

"이거 운동 스케줄 좀 줄여야 하는데."

브레이크 댄스 목적이라고 박박 우기니까 할 말이 없네.

드르륵─

그때, 한 남자가 껄렁껄렁한 자세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명품 선글라스나 신체 비율을 보면 연예인이 확실한데.

"정 매니저님이...."

"전데요."

"호우! 와썹, 브로!"

"???"

이내, 상대는 선글라스를 스윽 벗더니 친한 척 손을 내밀었다.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 피처링을 맡아줄 제트킥 멤버.

한껏 올려 입은 팬티 밴드를 바지 위로 대놓고 노출했다.

"안녕하세요, 블래키 씨."

"에헤이, 브라더. 뭐가 이렇게 딱딱해?"

"...."

이 새끼 뭐야.

"매니저 브로, 나 존댓말 같은 거 할 출 몰라."

"아.... 그러시구나."

"올 피플 프렌즈. 미국에선 나이 차이 그런 거 없어. 스껄."

".... 미국 사람이세요?

"아뇨. 안동 김씨입니다."

너 존댓말 할 줄 모른다며.

컨셉이 아니라 찐이었구나.

"힙합하는데 그런 구데기 마인드로 피처링을 어떻게 해?"

"아, 그럼 같이 말 놓을까?"

"91년 양띠입니다. 연세가?"

"서른인데요."

"내가 두 살 형이네?"

".... 형."

이런 미친, 미국 꼰대 새끼는 현실에서 처음 보네.

"브라더, 연습실로 가볼까? 스껄."

"스껄은 뭔데요."

"그냥 추임새, 힙합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

"아."

그래도 혹시 다이애나랑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름도 블래키면 당연히 영어도 엄청 유창할 테고.

잠시 후,

다이애나는 멍한 표정으로 쩨트킥 선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헬로."

블래키는 그녀의 블론드 헤어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아임 프롬 미시간에서 살았는데. 유남생?"

"오, 얼마나요?"

"한 달 어학연수."

".... 그럼 영어는?"

"몰라. 스껄."

"...."

이 새끼는 혼모노다.

바지 존나 내려 입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연예계는 누가 뜨고 망할지 모르는 거야.

"자, 그럼 나는 피처링도 구했으니까."

"매니저님."

"다들 연습 열심히 하고, 나는 갈 데가 있어서."

"매니저님."

"이렇게 금방 친해진 것 같아서 참 다행이네."

"매니저님."

믿음직한 블래키를 바라보고, 멤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자자, 우리가 탑아이돌 무대 찢어버려야지."

".... 우리 멘탈이 찢어질 것 같은데."

"열심히 하고."

드르르─

곧장 연습실을 빠져나와 근처 사무실로 이동했다.

예지와 은서가 딕션 연습을 하는 곳.

두 명 다 내일부터 일정이 빠듯했다.

"와,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매니저님, 누구요?"

"있어. 모르는 게 나아."

"???"

어차피 <탑아이돌>만 끝나면 볼 일도 거의 없겠지.

"자, 여기 일정표."

"와 벌써 다 나왔네요?"

"응."

아직 오디션을 준비 중인 은서와 달리.

예지는 한 달간 스케줄이 전부 나왔다.

"내가 주로 케어하고, 지유가 보조할 거야."

"넵!"

회당 15분 분량의 짧은 드라마.

한 달이면 촬영도 전부 끝났다.

"아마 소미 학교에서 촬영할 것 같거든."

"대박, 정말요?"

"그래서 소미 특별출연도 생각 중이야."

"그럼 너무 좋죠!"

가슴을 따뜻하게 힐링해주는 리액션 기계.

예지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능이 있다.

"그래서 내일부터 김고은 작가님이랑...."

"오오, 대박!"

".... 사전답사를."

"와, 진짜요? 엄청 기대돼요!"

"아직 말 안 했는데?"

"벌써 재밌어요!"

"...."

혹시 놀리는 건가.

* * *

얼마 후.

<탑아이돌> 두 번째 경연이 전파를 타고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너튜브에서 수없이 돌아다니는 움짤.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팬카페 규모.

다이애나의 천재성과 양주희의 댄스 실력에 대한 극찬이 온갖 커뮤니티를 점령했다.

"오빠, 주희 언니 올림픽 나가도 되겠다던데."

"그냥 하는 말이지."

"팬클럽은 태양빛만 계속 커지네."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데."

"나는 이제 포기했어."

"...."

전화를 해도 말이 안 통해서.

나중에 만나서 얘기해야겠다.

띠리리링─

그때, 스마트폰에서 예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본리딩 준비를 마쳤으니 픽업해달라는 뜻.

"오늘 피노키오 스튜디오 갔다 올게."

"응."

대본리딩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무척 궁금했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은 사실상 분량이 없었으니.

당장 예지를 밴에 태우고 약속 장소로 향했는데.

잠시 후,

피노키오 스튜디오에 도착하고 나서 확인했다.

대본리딩 참여자는 오직 우리 예지뿐이라는걸.

".... 실화냐."

피노키오 스튜디오 정식 직원은 십여 명 정도.

촬영 장비는 최신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주현성 씨라고 했나요?"

"네. 총괄 연출을 맡고 있습니다."

"감독님이셨네요."

주 감독은 직원들을 뒤로한 채 마실 것을 대접했다.

"진짜 가문의 영광입니다! 예지 님!"

"감독님이 재밌으시네요."

"아휴, 감독님은 무슨. 그냥 연출이라고 불러주십쇼!!!"

"네! 주 연출님!"

예지 착한 거 보소.

리액션이 혜자라서.

이내, 벽에 붙은 「나의 이중생활」 제작진 명단을 확인했다.

극본 김고은

연출 주현성

촬영 주현성

조명 주현성

편집 주현성

음향 주현성

출연 ★김예지★

김 작가님 조카랬나, 혼자서 저걸 다 해먹냐.

우리 예지 이름에만 별표 쳐놓은 거 킹받네.

"감독님, 이 많은 작업을 혼자서 다 하신다고요!?"

"아뇨. 직원들이랑 같이 하죠. 하하."

"그럼 왜 명단에는....?"

"간지?"

또라인가.

직원들이 참여해도 제작사 규모가 작은 건 팩트였다.

모노 드라마라서 규모가 작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지.'

자제 제작으로 촬영하는 건지 이제야 알았다.

"매니저님, 대단해요."

"응?"

예지는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렇게 작은 스튜디오 제작은 처음 봐요."

".... 그래?"

"네!"

나도 그래.

"근데 대본을 보자마자 보석을 한눈에 알아보시고....!"

"그런 거 아니야."

찍은 거야.

이게 맞냐.

뒤통수에서 스멀스멀 간지러움이 밀려들었다.

주 감독은 눈치도 없는지 넌지시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혹시 대본리딩 마치고 시간 괜찮으시면...."

"죄송해요. 회식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뇨. 오늘 티저 촬영 바로 가시죠!"

"아."

진짜 적당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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