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길조(1)
작곡가와 아티스트를 연결해주는 퍼블리싱 회사.
미국에서 들어온 시스템은 어느새 한국에도 완전히 정착했다.
이제는 엔터와 직접 계약하는 작곡가가 더 희소한 정도였다.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크으, 대기업 스멜."
잘나가는 작곡가 몇 명만 있으면 돈을 쓸어담는다더니.
고급진 내부 인테리어만 봐도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인포메이션.
단아한 차림의 직원이 미소와 함께 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오셨나요?"
"큐앤지 레이블에서 나왔습니다."
"아, 정수호 매니저님?"
"네. 맞아요."
큐앤지 레이블의 제휴 기업, 턴업 퍼블리싱 뮤직.
빅 4로 불리는 기획사인 턴업 레코즈에서 설립한 기업.
현재 국내 음반시장의 1할쯤은 이곳을 통해 유통했다.
"여기 방문증 받으시고, 302호에서 대기하고 계시면 담당자가 나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기서 곡도 받고, 우리 애들 많이 컸어."
지금 큐앤지 레이블에서 1티어로 잘 나가는 그룹은 두 팀.
그중, 솔라도 이제 라이징 스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대충 미팅룸 내부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똑, 똑─
곧이어, 담당 A&R이 노크를 하고 회의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이영미 대리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지적인 외모의 커리어 우먼.
상대는 가볍게 말을 건넸다.
"큐앤지 레이블 2본부 아티스트랑 계약하는 건 처음이네요."
"네. 쩨트킥이 곡 많이 받아갔죠?"
".... 제트킥."
그동안 큐앤지 레이블을 먹여 살린 남자 아이돌, 쩨트킥.
드림 에이전시가 인수했을 때 가장 중요시했던 팀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던데."
"글쎄요. 저도 1본부 사정은 잘 몰라서."
"아, 실례했네요."
"괜찮습니다."
더이상 할 말도 없고 해서,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저기, 그럼 곡부터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경연용 댄스곡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네. 맞아요."
"그럼 바로 들어보시겠어요?"
"좋습니다."
이영미 대리님은 가져온 가방에서 곧장 노트북을 꺼냈다.
"여기 폴더에서 들어보시고, 열 곡 정도만 골라주세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고르고 연락해주세요."
"아, 네."
노트북을 두고 사라지는 직원을 뒤로한 채 마우스에 손을 가져갔다.
일단, 다이애나 편곡까지 생각하면 넉넉하게 골라야지.
흡사 낡은 무기상에서 명검을 고르는 용사의 마음으로.
딸깍─
A&R이 준비한 곡을 차례대로 하나씩 청음 했는데.
새삼스레 요즘 작곡가들 수준을 체감할 수 있었다.
'어우, 다들 흠 잡을 데가 없네.'
괜히 이 바닥이 레드오션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지.
과연, 요즘 작곡가 실력은 전부 수준급이었다.
특히나 이곳 퍼블리셔와 계약할 수준이라면.
'.... 다들 프로니까.'
정형화 된 틀에 딱 맞춘 느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쁜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계처럼 완벽했기에.
딸깍─
그러던 중, 어떤 곡을 듣자마자 뒷목에서 간지러운 감각이 밀려들었다.
[Get up, Beat up (Produced by 스트레이트)]
평소였으면 내 취향이 아니라 무시했을 곡이지만.
".... 이걸?"
심지어 아직 미완성인 곡.
오직 트랙만 덜렁 있어서.
"오케이, 일단 킵."
이 죽일 놈의 촉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당장 청순 걸그룹 컨셉이랑 거리가 좀 멀었지만.
"역배는 사랑이니까."
딸깍, 딸깍─
대충 뒤통수 가려운 곡이 있을 때마다 저장하니 열 곡을 금방 채웠다.
죄다 내 취향은 아닐지언정, 장르만 놓고 보면 대중적인 편이었으니.
"그래. 이게 맞지."
지금이라도 솔라가 제대로 대접받는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다.
보통 100곡 중 하나쯤 겨우 고르는데.
데뷔곡 2지선다 중에 고른 거 실화냐.
"두고 봐. 내가 솔라 키워서 드림 에이전시 돌아간다."
내게 좋은 음악은 똥촉이다.
* * *
이영미 대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했다.
다른 평범한 매니저들처럼 적당히 듣고 고를 줄 알았는데.
'뭐지.... 이 사람?'
유명 프로듀서가 서브 작곡명으로 작곡한 노래만 귀신같이 뽑았다.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릴 줄 알았건만, 고작 한 시간밖에 안 걸렸으니.
'혹시 이런 게 천재....?'
매니저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너무 재능 낭비 아닌가.
아무리 듣는 귀가 좋아도, 사람이라면 한계가 있는 법인데.
열 곡 모두 자신이 아껴둔 곡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매니저님, 한 시간도 안 걸렸네요....?"
"네. 대충 도입부만 들었어요."
".... 세상에."
원래 도입 파트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
그렇다고 이렇게 좋은 곡을 10초 만에 고를 순 없겠지만.
"어후, 곡이 다 좋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 그렇죠?"
"네. 정규 앨범이면 전부 가져갔을 텐데요. 하하."
"!!!"
오싹─
이 사람, 이렇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구나.
전부 타이틀곡 급으로 채우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시네.
'와아, 개털 될 뻔했네.'
정규 앨범이 아니라 다행이야.
기둥뿌리 뽑아서 갖다 바칠 뻔.
요즘 같은 상향 평준화 시장에선 '잘' 듣는 능력도 재능이었다.
음악을 전공하고 이 바닥에서 10년을 굴러도 불가능할 텐데.
최근 신인 걸그룹 중 가장 잘나가는 솔라를 혼자 키웠다더니.
'진짜 안목이 엄청나구나.'
언감생심, 욕심부리기 전에 한 곡을 고르라고 해야겠다.
"그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곡이 뭔가요?"
"음, 다 별로-, 아니, 다 좋은데."
[Get up, Beat up (Produced by 스트레이트)]
"이게 제일 끌리네요."
"역시."
이영미는 수호가 가리킨 곡을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왜 하필이면 아직 미완성인 곡을....?"
"믹싱, 마스터링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 알겠습니다."
모기업, 턴업 레코즈 소속 탑급 프로듀서.
서태성이 최근까지 붙잡고 있던 곡이었다.
'수백 곡 중에 미완성 음악을 골랐는데....'
하필이면 그 곡이 빅 4 엔터 탑급 프로듀서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곡이라니.
마치 영화에서 등장할 법한 미친 재능.
이런 안목이면 본인 회사도 차리겠네.
"근데 제가 알기로 어떤 래퍼 분과 계약 논의 중인 곡으로 알고 있어요."
"아, 그래요?"
유명래퍼 제이콥, 성질은 더러워도 실력은 확실했다.
"그래도 아직 계약한 건 아니라서, 제가 연락드려볼게요."
"아, 저는 괜찮아요. 그래서 열 곡이나 골랐으니까요."
"...."
그중 한 곡만 당신 거라니까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만족 못하는 듯한 표정.
다른 곡에도 눈독 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단 프로듀서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수호 매니저,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엄청난 실력과 끝없는 욕심을 겸비한 음악 전문가.
A&R 신인발굴팀에서 스카웃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뚜루루루─
이영미 대리는 곧장 서태성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프로듀서님, 이영미 대리입니다."
-오,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
"네?"
-제가 준 그 곡, 주인이 따로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주면 안 될 것 같거든.
"아, 그래요?"
당연히 제이콥을 언급할 줄 알았지만.
상대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꺼냈다.
-큐앤지 레이블, 다이애나랑 계약하고 싶거든.
"누, 누구요?"
-솔라의 다이애나. 자네가 큐앤지 레이블에 연락 넣어주면 안 되나?
"...."
그 말을 듣는 순간, 잠깐 뇌 정지가 찾아왔다.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로워서 어이가 없었다.
'이게 우연일까....?'
어쩌면 누군가 예상한 결과일지도 모르지.
저기, 멋쩍게 뒤통수를 만지고 있는 인물.
"미팅.... 잡으시죠."
"네."
이영미 대리는 회의실을 벗어나는 수호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 보통이 아니구나."
큐앤지 레이블 같은 작은 회사가 품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 * *
큐앤지 레이블 개꿀.
통장에 찍힌 성과급이 월급을 넘어섰다.
드림 에이전시에서는 상상도 못한 금액.
"와, 금융치료된다."
생각해 보니까 드림 에이전시에 안 돌아가도 될 것 같아.
이미 이전 팀은 해체됐고, 환영해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여기도 나쁘지 않지."
한국대 졸업하고 중소 다니는 것만 빼면 딱히 단점도 없었다.
드르륵─
회사에 돌아와 안무팀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수호야!"
뒤쪽에서 박철민 팀장님이 빡빡머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아, 네. 팀장님."
"서태성 프로듀서 곡 잡았다며?"
"???"
아닌데요, 작곡명이 스트레이트였나.
이영미 대리님도 그런 말 없었는데.
"서 프로듀서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고!"
"?????"
그니까 왜요.
"와, 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어...."
그때, 실장님이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나를 호출했다.
"지금 도착하셨어! 어서!"
"수호야, 실장님이 부르신다. 어서 가봐."
"아, 네. 팀장님."
잠시 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2본부장실로 불려 왔다.
<탑아이돌> 촬영 중에도 못 만난 인물.
서태성 프로듀서와 계약했다는 이유로.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어이구, 정수호 매니저 왔는가?"
"네. 정식으로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니, 내가 마음속으로는 자네랑 인사 많이 했어."
"...."
본부장님께서 능구렁이 같은 말투로 나를 반겼다.
"일단 앉아봐."
후덕한 인상에 술 배로 단련된 복근.
친근한 아저씨 같은데 인맥은 상당했다.
솔라가 성장한 데에는 이분의 공도 절대 적지 않았다.
방송국 국장급들 사이에서 평판은 굉장히 좋은 편이라.
"지금 서태성 프로듀서님이 오고 계신다고."
"아, 네. 본부장님."
"정수호 매니저한테 더이상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
곧이어, 내가 고른 곡의 주인이 서태성 프로듀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친, 똥촉 무엇.'
스트레이트가 서태성 작곡가였냐.
미완성 곡을 고를 때 걱정했는데.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이렇게만 하게."
"아, 네. 본부장님."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필요한 거...."
엄청 많긴 한데, 굳이 하나만 말하자면.
"솔라에 대한 건 믿고 맡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그건 당연하지. 여태까지도 그랬잖아."
"...."
은근한 질책이 섞여 있을지도.
그동안 내 마음대로 했으니까.
결과가 좋지 않았으면, 내쳐져도 할 말이 없었겠지.
똑, 똑─
그때, 문밖에서 노크를 두드리며 서태성 프로듀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아, 오셨습니까?"
"혹시 그쪽이...."
빅 4 엔터 소속에,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급 프로듀서.
TV에서나 보던 인물을 직접 마주하니 심장이 콩닥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정수호입니다."
"반가워요. 솔라를 혼자서 키우셨다면서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옆에 본부장님까지 계시는데 무슨 말씀을.
"다이애나 천재성을 발굴한 사람도 정수호 매니저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천재성을 발견하지 못했는데요.
"이영미 대리님이 그렇게 칭찬을 하시더군요."
"저를요?"
"네. 보통 안목이 아니라고."
"...."
그분 오늘 처음 만났는데요.
꽤 오랫동안 이어지는 서태성 프로듀서의 질문.
나는 본부장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 사회생활 힘들다.'
탑 프로듀서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모르는구나.
덕분에, 까마득한 상사 앞에서 한동안 진땀을 빼야만 했다.
"아무튼, 앞으로 좋은 비지니스 했으면 합니다. 하하."
".... 예."
* * *
고된 하루를 마치고,
마침내 솔라 멤버들을 숙소에 데려다 주었다.
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썩 피곤했다.
"얘들아, 내일은 새벽 스케줄 없어."
"으아, 오랜만에!"
".... 아침에는 있어."
"시무룩."
우리 막내는 볼 때마다 표정이 다채로운 것 같아.
"소미야, 게임이 하고 싶어?"
"넹."
"그 실력으로?"
"아."
뇌지컬은 몰라도 피지컬은 쓰레기더라.
게임에 재능 없으니까 접는 걸로 하자.
"다들 일찍 자라. 내일 오전부터 안무 창작이랑 곡 작업할 거니까."
"네에!"
"아, 그리고 은서야."
"네?"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술은 끊자.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슬프시겠어.
"새벽에 편의점에서 뭐 사 먹지 말고."
".... 예압."
멤버들이 숙소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뒤로 돌아섰다.
사실, 사람 만나는 일 없이 운전만 하는 건 편했다.
스케줄이 많은 날은 아예 밴에서 자기도 했으니까.
대충 일과를 마쳤으니 마지막으로 지유에게 질문을 건넸다.
"지유야, 집에 데려다 줄까?"
"오빠."
"응?"
순간, 엄지유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서태성 프로듀서랑 곡 작업하는 건 좋은데. 좀 걸리는 게 있어서."
"뭔데."
"그거 원래 제이콥이랑 작업하기로 했었다며."
".... 근데?"
계약도 안 한 사이에 그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다이애나 실력에 완전 꽂혔던데.
"제이콥, 그 사람 래퍼들 중에 성깔 더럽기로 유명해."
"에이,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이야."
"디스라도 하면 어떡해?"
"글쎄."
아무리 유명 래퍼라도 서태성의 영향력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 프로듀서님을 디스한다고? 매장될 일 있어?"
".... 아니. 다이애나."
순간, 뒤통수에 쎄한 감각이 밀려왔다.
"걔도 다이애나는 만만하겠지."
"에이, 그게 말이 되냐."
무슨 래퍼가 가만히 있는 걸그룹 디스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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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너튜브의 한 채널에 올라온 인기 급상승 영상.
제이콥이 기습 발표한 디스곡을 멍하니 들었다.
-아이돌이 랩을 해? 옹알이가 아니고? 니들 랩은 쓰레기, 내 랩은 월 천 정도. 기레기들은 니들 랩을 빨겠지. You will die, 집에 가서 애나 봐.
다이애나 뿐만이 아니라 아이돌 랩을 다 까고 있다.
랩만 보면 쫀득하게 귀에 때려 박히는 맛은 있는데.
'이 새끼, 완전 노빠꾸네.'
국내 유명 래퍼의 디스랩 매운맛.
나는 동요하는 멤버들을, 특히 다이애나를 다독였다.
안 그래도 소심한데 오늘따라 더욱더 쭈글이가 됐다.
"다이애나, 가야지."
"네에."
스마트폰에 깨작깨작 뭔가를 쓰는 것 같은데.
원래 소심한 친구들이 이런 면이 있지 않던가.
"매니저님, 이제 어떡해요....?"
"어떡하긴."
걸그룹 멤버를 저격하는 디스곡이라니.
얼핏 보면 꽤 나쁜 징조인 것 같았지만.
"그냥 나만 믿고 신경 쓰지 마."
"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밀려드는 불안감을 만끽했다.
길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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