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예능 살아남아라!(2)
박정후가 신경질을 내면서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서 박정후의 목에 걸린 카드를 확인했다.
‘스페이드잖아.’
그렇다면 스페이드의 능력은 뭘까? 그때 이서혁이 프라이팬을 들고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뭐야? 이러려고 우리 텐트 쪽으로 온 거였어?”
“예, 당연히 이러려고 왔는데요?”
“아까는 구경하러 왔다며!”
그래서 이서혁이 가만히 있었군.
“그건 거짓말이죠. 그걸 믿는 서혁 형이…….”
“뭐!”
“바보 아닌가요……?”
그러더니 박정후는 같이 온 참가자한테 다른 텐트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이미 볼 건 다 봤다는 건가. 이서혁이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욕설을 뱉었다.
“다 봤으면 썩 꺼져.”
“예, 예.”
그런데 박정후는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까지 우리를 비웃었다. 쟤 아이돌 아닌가?
‘이제 막 나가네.’
나를 따라 하던 박정후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돌연프에서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거칠고 돌덩이 같은 느낌만 들었다.
“정후야, 우리 사이에 어떻게…….”
“디아 누나, 이건 다르죠…….”
“이제 후배가 아니라고 그러는 거니?”
디아 선배님이 나서서 박정후를 회유했다.
“누나도 제 사정 뻔히 아시면서. 저도 어쩔 수가 없잖아요.”
“어쩔 수 없으면 네가 가져간 나비 가방이라도 돌려줘.”
디아 선배님이 훔친 가방을 돌려달라고 손을 내밀자 박정후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누나, 그건 아니죠. 가방에 얼마나 대단한 게 들어 있으면 이렇게 무겁겠어요?”
…돌이 들어가 있어서 무거운 건데. 나는 박정후한테 말했다.
“정후 형, 가방 안은 살펴봐야죠?”
그러자 박정후가 헛웃음을 쳤다.
“그사이에 가방을 가져갈 거잖아. 나는 네가 제일 무서워.”
“…제가요?”
나는 당신이 제일 무서워. 그러자 이서혁이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후야, 그러다가 네 아이돌 이미지 다 망가질 텐데?”
“어차피 RT 엔터도 나왔어요.”
“뭐?”
RT 엔터를 나왔다는 말은 즉, 이제 아이돌을 안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아이돌이 하고 싶다고 난리를 치던 사람이.
가만히 지켜보던 이남주가 박정후한테 물었다.
“정후 형, 이제 아이돌 안 하는 거예요?”
“…어, 그치.”
“같은 돌연프 동기로서 같은 길을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러냐?”
“당연하죠. 같은 팀도 했으니까.”
박정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도 노력은 했는데 잘 안 됐어.”
잘 안 됐다는 건.
“나만 잘렸거든.”
그래도 박정후의 노래 실력은 출중했는데 아이돌을 그만둔다니까… 안타깝긴 하네.
“정후 형, 제 가방은 그냥 가져가세요.”
“…뭐야. 너, 혹시 동정이냐?”
동정은 무슨.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긴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정이에요.”
“…아무튼 고맙다.”
가져가서 돌이나 마음껏 드시든가. 박정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가겠습니다.”
박정후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덩그러니 우리만 놓인 상황에서 이서혁이 냉큼 나한테 물었다.
“나비야, 네 가방 어떡하냐?”
“물건은 미리 빼놨으니 괜찮아요.”
아까 전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자 디아 선배님과 이서혁은 헛웃음을 쳤다.
“그걸 숨겼어?”
“텐트에 누가 돌아다니고 있길래 가방에 있는 물건을 숨겼어요.”
“역시 우리 나비야.”
이서혁이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으면서 등을 토닥였다.
“하여간 나비가 이런 건 얍삽하게 잘해.”
“얍삽…….”
“그만큼 머리를 잘 굴린다는 뜻이지.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잔머리를 잘 굴린다고 먹이는 것처럼 들렸는데, 분명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디아 선배님은 계속 무언가를 곱씹는지 눈동자를 굴렸다.
“디아 선배님.”
“어, 왜?”
“우리 어떻게 할까요.”
“…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어서요.”
그러자 디아 선배님이 생각을 마쳤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선배님이 저희 중 리더라고 생각해서요.”
“뭐, 내가……?”
“디아 선배님이 상황 파악도 잘하시고.”
“…고맙다?”
“거기다가 특히 말솜씨도 좋으시고, 정글 예능을 해보셔서 생존 지식도 가지고 있잖아요.”
디아 선배님은 위즈에서 리더를 맡고 있다. 그래서인지 머리도 빨리 돌아가고 실행력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리더를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작 1박이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불만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을걸요?”
내 물음에 이서혁과 이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리더를 맡을게.”
그때 이서혁이 말했다.
“그럼 나는?”
“서혁 형은 행동 대장이죠.”
“음, 행동 대장… 마음에 드네.”
이서혁은 급발진을 잘하니까. 리더로는 역부족이다.
“나비야, 나는?”
“남주 형은 진두지휘를 맡으세요. 지도도 가지고 있잖아요.”
“아, 괜찮네.”
그때 디아 선배님이 나를 향해 턱짓했다.
“그러면 너는 어떤 포지션인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막내요.”
“순진한 막내?”
나는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얼굴이 순진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자 이서혁과 이남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윽고 머리를 굴리던 디아 선배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미지로 연막을 치자는 거야? 괜찮은데?”
그때였다.
[30분 뒤에 찢어진 보물 지도가 필드에 생성됩니다.]
[무인도 첫 번째 바닷가 작은 배에 찢어진 보물 지도가 있습니다.]
[무인도 세 번째 바닷가 텐트에 찢어진 보물 지도가 있습니다.]
스피커에서 찢어진 보물 지도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면서 눈동자를 굴렸다.
“…찢어진 보물 지도?”
그러고 보니 찢어진 보물 지도를 찾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지. 그때,
[한 명이 탈락했습니다.]
[한 명이 탈락했습니다.]
[한 명이 탈락했습니다.]
또다시 참가자들이 탈락했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나자 이서혁은 소름이 돋는다면서 팔을 문질렀다.
“…오, 무섭다.”
“그러게요.”
연달아 탈락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돋긴 했다. 참가자들의 광기가 느껴지는 듯해서.
“리더, 이제 우리 어떻게 해?”
“가봐야 할 것 같긴 한데.”
디아 선배님이 짧게 고민을 하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방송의 재미도 챙겨야지.”
디아 선배님의 말에 동감했다. 그건 곧 분량이 없어진다는 말이니까.
“일단 어디라도 가보자. 우리 분량은 우리가 챙겨야지. 얘들아, 텐트랑 다 챙겨.”
우리는 빠르게 물건을 빠짐없이 챙겼다. 그리고 디아 선배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서혁이 방금 전 만들었던 해골 깃발을 들었다.
“우리는 해적 군단!”
이서혁이 깃발을 흔들면서 카메라에 대고 소리쳤다. 디아 선배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보았다.
“우리, 어디로 갈까?”
“…어, 지도를 한번 볼까요.”
그때 이남주가 지도를 꺼냈다.
“우리가 지금 네 번째 바닷가에 있거든요.”
섬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네 번째 바닷가. 이남주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은 첫 번째 바닷가예요.”
이남주가 첫 번째 바닷가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나는 이남주를 보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다면 남주 형, 우리는 첫 번째 바닷가로 가면 되겠네요.”
“응, 그렇지.”
그때 디아 선배님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리더로서 앞장을 서볼까나. 남주야, 그런데 내가 길치라서 잘 모르거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줄래?”
“계속 이쪽으로 쭉 가면 돼요. 되는데…….”
“되는데?”
이남주가 고개를 들어서 정면을 주시했다.
“그곳에서 다른 참가자들이랑 마주칠 가능성이 커요.”
“…그렇긴 하겠네.”
거기다가 박정후 무리는 세 번째 바닷가로 향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 번째 바닷가와 떨어져 있는, 첫 번째 바닷가로 향해야 하는 게 맞았다.
“이 지도를 보시면 첫 번째 바닷가로 갈 수 있는 길이 두 갈래가 있어요.”
이남주는 돌 위에 지도를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우리가 갈 방향을 가리켰다.
“모래 쪽으로 돌아서 가면 바로 찢어진 보물 지도가 있다는 배로 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모래 쪽으로 돌아서 가는 게 좋지 않을 수도 있어요.”
“왜?”
디아 선배님이 물었다.
“어떤 참가자는 무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무기가 있다?
“맞아! 나도 작가님한테 물어봤거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참가자가 있는지? 그러니까 있을 수도 있다며 애매한 대답을 하긴 했는데…….”
이서혁이 이남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여기를 봐주세요.”
이남주가 숲속을 거쳐서 지나가는 방향을 제시했다.
“숲을 지나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숨을 수 있는 장소도 있고, 몸을 보호할 수도 있으니까요.”
“남주가 말한 방향으로 가보자.”
우리는 이남주가 말한 두 번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모래사장에서 축축한 흙을 밟자 이서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구두 신고 왔더니 힘드네.”
“슬리퍼 드릴까요?”
내가 가방에 슬리퍼를 챙겼을 텐데.
“너 그거지. 무엇이든 들어 있는 주머니를 가진, 이등신 파란색 고양이.”
“이등신 파란색 고양이?”
“모르면 됐고.”
혹시 물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미리 슬리퍼를 넣어놨다. 나는 가방에서 슬리퍼를 꺼내서 이서혁한테 건넸다.
“여기요.”
이서혁이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슬리퍼를 신었다.
“고맙다.”
그렇게 모두가 첫 번째 바닷가에 있는 작은 배 쪽에 가까워졌다. 배는 바다가 아닌, 땅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서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사람이 있나 없나 살펴보았으나,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배와 텐트만 덜렁 있고, 다른 참가자들도 없는지 사방이 조용했다. 그래도 1억을 갖고 싶으면 배에 올 수밖에 없을 텐데.
“…왜 참가자들이 없을까요.”
디아 선배님이 간단하게 말했다.
“어쩌면 잠복하고 있을 수도 있지.”
“…잠복을요?”
“찢어진 보물 지도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는 안 나와 있었잖아. 있다고만 했지.”
이서혁은 디아 선배님을 향해 엄지를 치켜올렸다.
“역시 예능 짬바!”
“너는 누나한테 짬바가 뭐냐.”
“그러면… 역시 예능 경력!”
“그렇지.”
그러는 와중에 이남주가 디아 선배님한테 말했다.
“선배님, 그냥 배에 올라가 보는 건 어때요?”
“그냥 올라가자고?”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요.”
어쩌면 어딘가에 숨어서 우릴 지켜볼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하긴… 슬슬 무섭기도 하니까. 행동 대장?”
디아 선배님이 이서혁의 등을 밀었다. 덩달아 앞에 선 이서혁이 구두를 양손에 쥐었다.
“간다, 행동 대장.”
이서혁은 담담하게 작은 배로 다가갔다. 뒤에서 걷던 나와 이남주는 주변을 둘러보며 여전히 첫 번째 바닷가에 있는 텐트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했다. 나는 이남주의 팔을 잡으며 내 생각을 말했다.
“남주 형, 우리는 텐트로 가는 게 어때요.”
“…텐트?”
“바닷가마다 텐트가 하나씩 있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네.”
내 말을 듣자 이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저랑 남주 형은 텐트를 확인해 볼게요.”
“그래, 조심하고. 위험하면 소리라도 질러.”
아무래도 바닷가에 설치된 텐트에 아무도 없는 게 수상했다. 아무리 참가자가 많이 죽었다고 한들, 이렇게 아무도 없을 리는 없다.
어쩌면 박정후가 첫 번째 바닷가에 일찌감치 와서 텐트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어?”
그런데, 텐트의 입구가 막혀 있었다.
일부러?
수상함을 느낀 나는 텐트를 건드리는 이남주의 팔을 잡아 막았다.
“…잠깐만요.”
“왜?”
“이상하잖아요.”
내가 바닷가에 도착해서 텐트를 확인했을 땐, 텐트 입구가 열려 있었으니까. 최대한 몸을 가까이 두지 않고 발로 텐트를 찼다.
묵직하네?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 찰나의 순간에 텐트의 입구가 열리더니 사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