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2화. >
고개를 푹 숙이고, 나 홀로 상석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에헤이, 여기 어디 몰래카메라 설치 되어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거 또 고조선일보나 동북아일보에서 '건방진 천우진 회장'이라는 타이틀로 메인에 나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절대 그럴리 없다는 듯 조양구가 서둘러 말한다.
"아닙니다 회장님, 우리 이제 고조선일보, 동북아일보와의 유착관계 끊었습니다."
최태수가 날카롭게 조양구를 쏘아본다.
난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호오, 그 말씀은 유착관계를 인정 하시는 듯 보이네요?"
"그, 그게. 이, 이제와서 숨길 게 뭐 있겠습니까...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글쎄요, 예상하는 것과 아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걸 모르시지 않으면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조양구의 선창을 다른 회장들 모두가 따라했다.
최태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이들 중 가장 우두머리는 최태수라 볼 수 있었다. SKY다음 대현, 그리고 GL다음으로 KS가 줄 서 있기 때문.
그래서 난 첫 타켓을 최태수로 잡았다.
"통신은 못 내 주시겠다? 여차하면 KS를 통째로 살 수도 있습니다만. 공정위에서 내게 뭐라고 협작질 할 것도 없고, 정당하게 돈을 주고 인수하는 행위니까요. 외국 자본이라면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금니를 짓 씹는 최태수.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 앉아있는 회장들 중, 최태수회장 만큼 내 입맛에 맞는 먹잇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머지 회사들은 있으나 마나 했다. 얼마든 SKY가 마음을 먹는다면 진출할 수 있는 시장들 뿐이었다.
"나는 에너지랑 화학, 반도체가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포기하기 어렵거든요? 그간 명분이 없고, 국가의 눈치를 보느라 참고 있었습니다만."
"현 SKY가 명실공히 에너지, 화학, 반도체 분야의 1등이 아닙니까? 부디 자비를 베푸시지요."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최태수가 어느때보다 간절하게 얘기했다.
"듣기로는 말이죠."
"말씀하십시오."
"우리 할아버지가 최 회장님께 찾아갔다 들었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잡으라고."
"... 그러셨습니다."
"본인은 어떻게 하셨나요?"
푹 고개를 숙인 최태수가 말했다.
"이 놈이 멍청해... 그 줄이 명줄인지도 모르고 뿌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용서해달라?"
"역사바로알기 재단의 최대 후원자 중 한명이 아닙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호석에게 손짓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호석이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대현그룹 230억, GL그룹 180억..."
역사바로알기 재단에 후원한 기업들의 후원금 목록이었다. 당연히 한달 전 있었던 모임에서 이곳에 있는 회장들 역시 후원을 하였으니 그들의 이름도 호명되었다.
"한국항공 및 그 계열사 19억 8천만, 대서양건설 및 그 계열사 13억 4천만... KS그룹 33억."
"거기까지."
계속 낭독 하려는 호석을 만류하고 다시 최태수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들어보니까? 대현이랑 GL은 굳이 우리를 적대하지도 않았는데 후원금 액수가 상당 하죠? 용서의 뜻으로 33억이라. 과연 많은 돈이었을까요?"
"그, 그런!"
상대적으로 KS그룹보다 후원금이 적었던 회장들은 최대한 내 눈을 피해 시선을 옮긴다.
최태수 역시 생각이 많아 보였다. 무엇인가를 내줄 수 있는 배포가 없는 것이다. 욕심과 탐욕이 그의 머리를 잠식 했을 터.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로 바쁠테다.
"자 그럼 결정 해 봅시다."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집중하는 회장들.
"SKY는, 그러니까 나는. KS그룹 하나를 갖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했으면 싶은데. 다른 회장님들은 어떠신지?"
최태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피하고 있던 조양구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그 말씀은..."
"들으신 그대로 입니다. SKY가 KS의 전부를 가져간다면 여러분은 살려드리겠다 이 말입니다."
일순간 눈빛이 돌변하는 회장들.
최태수는 그것을 느꼈는지 도끼눈을 뜨며 다른 회장들을 날카롭게 쏘아본다.
"자, 나는 뜻을 정했으니까 나머지 합의는 회장님들이 알아서 하시는 걸로."
"처, 천 회장님!"
다급하게 날 부르는 최태수.
"그러니까, 기회를 드렸을 때 잡았어야죠."
"토, 통신 넘기겠습니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에너지가 갖고 싶어 졌네요."
"그, 그런!"
당황을 가득 품은 최태수를 무시하고는 다른 회장들에게 말했다.
"한 달. 그 안에 KS그룹 가져오세요. 안 그럼 다 죽는 겁니다."
조양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꼭 가져다 드리, 아니 바치겠습니다!"
"이 개 같은 놈이!"
최태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조양구의 멱살을 잡는다.
"우리도 다 살자고 하는 짓 아니오?"
"네 놈들을 믿은 내가 미친 놈이지! KS가 호락호락해 보이더냐!"
"죽자고 달려들면 못할 것도 없지!"
다른 회장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최태수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붇는다.
"그러니까 욕심 좀 버리고 통신을 넘겼으면 좀 좋아? 끝까지 잘났지 빌어먹을 놈."
"네 놈이 우리 옆구리를 찔러서 언론에 헛돈이나 쓰게 만들었지! 그 헛짓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맞아! 모두 최태수 네 놈이 사주한 것 아니야?"
그들이 시끄럽게 서로 싸우는 와중에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 차량에 올랐다.
"이이제이 입니까?"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 싸우면 우리 돈도 안 들고 좋잖아요?"
피식 웃는 호석.
"할아버지만 아니었으면 그냥 싹 먹어버리면 되는데, 이것도 많이 참은 겁니다."
"대현과 GL에는 나머지를 양보하시는 겁니까?"
"깜냥이 된다면 알아서 주워먹겠죠."
"바로 공항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러죠, 할아버지 잘 하고 계시니까 바로 중국으로 넘어갑시다."
"예, 회장님."
***
중국 사천의 성도 청두.
오사마 빈 라덴은 삼엄한 경비를 뚫고 가까스로 그곳에 숨어 들 수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위기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친위대를 희생시키며 도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더 내륙으로 진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정도 위치에서 기타 아랍권 인물처럼 행동하면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신분을 버린다."
처음 서른 명으로 출발했던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친위대. 그러나 현재 남은 숫자는 여섯이 고작이었다.
빈 라덴의 오른팔이라 볼 수 있는 인물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신분을 버리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대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세를 확장 할 필요가 있다."
"아아... 미국과 유럽의 동포들 처럼 단순 이민자로 행동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듣기로 중국은 출생신고 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으니까... 어쩌면 숨어 살기에 적합할지 모르지."
"신께서 도와주실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빈 라덴이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을 꺼내며 말했다.
"가진 것 모두 꺼내 봐."
주섬주섬 친위대들이 꺼내는 돈.
"쯧."
현재 그들이 머물고 있는 허름한 여관을 이주 정도 빌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식사까지 생각한다면 일주일도 빠듯한 금액.
"칸다하르."
"예!"
"주변에 제일 가는 부호를 물색 해."
"돈 때문입니까?"
"어쩔 수 없다... 한 번은 위험을 감수 해야 해. 일자리가 부족한 중국땅이다. 대계를 위해 웅크리려면 어쩔 수 없어!"
"알겠습니다."
빈라덴이 주섬주섬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현금을 모아 칸다하르에게 전한다.
"이, 이건!"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그 돈이 빈 라덴의 목숨줄이라는 것을 모르는 친위대는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존경해 마지 않는 눈으로 빈 라덴을 우러러 본다.
"가라, 대계를 위한 자금을 구하라."
"신의 뜻으로!"
친위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여관에 나 있는 작은 나무창으로 그들이 산개해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빈 라덴.
품에서 송아지 가죽으로 된 지갑을 꺼내더니 달러를 확인한다.
"쯧, 멍청한 놈들."
***
끼이이익.
오래된 나무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제기랄."
빈 라덴이 욕설을 뱉으며 여관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권... 여권이라..."
침대에 걸터 앉으며 중얼거리는 빈 라덴.
"우리 라덴이 여권 필요 하구나?"
걸터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는 빈 라덴.
내 음성이 영혼에 각인이라도 된 듯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한다.
드르르륵.
의자 하나를 가져와 벌레 놈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수족은 다 버리고 혼자 살 길 찾아 왔니?"
"어, 어떻게?"
"뭐가?"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아, 아셨습니까?"
이런 벌레 같은 놈을 어떻게 신뢰 할 수 있을까? 필요하다면 수하의 목숨을 던져서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는 놈을 말이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회장님."
호석이 친절히 낡은 나무문을 여니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외치는 빈 라덴.
"카, 칸다하르! 네, 네 놈이?"
내게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이는 칸다하르.
"벌레가 걱정되서 마킹 하나를 붙여 놨지."
내말은 듣지도 않고 칸다하르를 죽일듯 노려보는 빈 라덴.
"어째서! 어째서 배신 한 것이냐!"
"애초에 나는 네 놈의 수하가 아니야 테러리스트."
"그런!"
칸다하르는 피식 웃으며 빈라덴의 복장을 거칠게 찢어내고는 송아지 가죽으로 된 지갑을 꺼낸다.
"뒷구녕으로 제 살 궁리만 하는 놈 주제에 배신을 운운해?"
분노로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뱉는 빈 라덴.
"그래... 어쩐지... 망할 악마들이 자꾸만 내 위치를 특정한다 했었지... 그런 이유였어."
애초부터 난 벌레 놈을 믿지 않았다.
해서, 아프가니스탄인 한 명을 포섭했고 마치 광신도인 양 빈 라덴에게 접촉 시켰다. 물론 제법 발품을 팔아 적당한 인물을 고르느라 힘을 썼다. 빈 라덴이 우리 대원들과 함께 정신개조를 받을 때, 이 인물 역시 다른 곳에서 우리 대원들에게 정신무장을 받았다.
"약속한 것 주세요."
"예, 회장님."
호석이 칸다하르에게 007 가방 하나를 건낸다.
"약속한 100만불이다."
"감사합니다."
"바깥으로 나가 우리 대원을 따라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잊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 나도, 이 벌레 같은 놈도."
"어떻게 잊겠습니까... 제 가족의 원수를."
"잊어라, 그래야 네가 살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 칸다하르가 흠칫 뒷걸음질 치다 이내 크게 대답한다.
"반드시 잊겠습니다. 아니 잊었습니다!"
"하나만 기억해, 네놈이 했던 약속."
"예, 꼭... 우리 마을에 학교를 짓겠습니다. 못 배우고 힘 없어 다시는 설움 받지 않게."
"지켜야 할 거야, 그게 아니면 대원들이 찾아 갈 테니까."
침을 꿀꺽 삼킨 칸다하르.
"사, 사신들을 볼 일은 없을 겁니다."
SKY PMC는 아직도 아프간에서 검은 사신들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만큼 SKY PMC는 탈레반과 알 카에다에게 자비란 없는 용병단체였다.
손을 휘저어 칸다하르를 내보내고 난 다시 빈 라덴을 바라보았다.
"같이 좀 가야겠다."
"어, 어디로? 서, 설마 그곳?"
피식 웃은 나는 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놈이 얘기하는 그곳이 내가 생각하는 그곳 맞겠죠?"
"예, 회장님. 훈련소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가! 못 가! 안 돼!"
입에 거품이라도 물 기세로 발광하기 시작하는 벌레.
퍽.
호석의 주먹은 놈의 턱주가리를 용서하지 않았다.
"갑시다. 부쉬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정신개조 시켜서."
"예, 회장님."
"우리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못하게, 무지렁이로 만드세요."
"명심하겠습니다."
< 제 25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