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1화. >
지글지글.
왁자지껄.
해가 저물고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허름한 고깃집.
연탄불에 구워먹는 막고기가 너무도 훌륭에 술을 술술 부르는 그런 집.
"이번 대통령은 아주 제대로 나오겠어."
한 사내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사내가 말했다.
"에이, 천혁수는 출신이 사채업자라니까? 나라 꼴 엉망 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그 사람은 뽑으면 안 되지."
"어허, 이사람! 시작은 고리 뜯는 걸 시작했어도, 지금은 다르지!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행보들을 보게 얼마나 믿음직스럽나?"
"쯧쯧, 사람이 근본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서 자네가 밀어주는 야당 놈들은 언론이랑 협작질을 하고 전경련이랑 협작질을 해서 천혁수한테 고소를 당했나?"
"다 조작이라니까?"
"조작은 무슨, 야당 놈들이랑 전경련이 한게 조작이지."
답답하다는 듯 소주를 털어 넣는 사내.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어, 천혁수 지지율이 70퍼센트가 넘는데,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에휴, 나라가 어떻게 될는지."
"이 사람, 도대체 뭐가 걱정인가?"
"천혁수 그 사람 돈 욕심이 많으니 사채를 한 게 아닌가? 그러니까 나랏돈으로 사리사욕을 채울까 걱정이 되서 그렇지."
피식 웃어버리는 사내.
"쯧쯧, 이 사람. 천혁수 손주가 SKY그룹 회장인 것 모르나? 아마 정치인들 중에 천혁수보다 재산이 많은 인물은 없을 걸?"
"그게 뭐?"
"그런사람이 무슨 국고로 사리사욕을 채우나? 국가보다 더 돈을 많이 버는게 SKY인데. 게다가 이번에 전경련이랑 사이가 틀어졌을테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른 기업들이 살려달라고 아등바등 하고 있을걸세."
"SKY가 그렇게 돈이 많아?"
"이 사람! 전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 전 세계 가전시장 점유율 1위, 떠오르는 IT기업 1위, 전 세계 자동차 시장 점유율 8위, 기타등등 계열사들이 얼마나 글로벌한데?"
"글로발? 그게 뭐야?"
"돈이 존나게 많다는 소릴세."
주변에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어느새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천혁수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모르긴 몰라도 여태까지 해 처먹은 놈들 싸그리 도매가로 처리해버릴 걸? 그러니까 여당이고 야당이고 전경련이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방해하는 게 아닌가? 무서운게지, 제 놈들 살림살이 거덜 낼까 봐."
"흐음, 정말 그럴까?"
"어허, 두고 보시게. 뭣하면 내기 해도 좋아! 내가 이번만큼 기대하는 대통령은 또 없었다니까? 게다가 이번에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다음 대통령 선거도 출마 할 수 있잖은가?"
"아, 법이 바뀌어서?"
"그래! 임기는 4년으로 짧아졌지만 재임을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벌써 이 썩어빠진 나라가 바뀔게 기대 돼."
"흐음..."
"생각해보시게, 지금 야당이 이 땅에 '독재'라는 단어를 만들었어."
어느새 고깃집 내부 모두의 뇌리속에 천혁수라는 인물이 깊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고급 요정.
오랜만에 모인 전경련의 회장들.
"벌써 한달이 됐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얘기는 없지만 우리도 빨리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항공을 주축으로 운송업에 매진하는 조양구 회장의 말에 다른 회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태수를 바라본다.
"무엇으로 살 길을 찾겠습니까? SKY가 돈이 없습니까? 인재가 없어요?"
최태수의 말에 동공이 흔들리는 회장들.
SKY란 거대한 공룡 앞에 자신들은 한낱 초식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헛 생각 하지 말고 목숨줄 지키고 싶거든 지분방어에 힘 쓰시오, 비자금 빼돌린거 다 가져와서 어떻게든 지분 끌어모으란 얘기입니다."
갖가지 똥씹은 표정들을 하고 있는 회장들.
최태수 역시 답답한 마음에 독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고 한 명의 인물이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최태수가 놀란 눈으로 그 인물을 바라본다.
"여, 여긴 왜?"
"노인네들 여기 다 모여 계셨네."
건방지게 말을 내뱉는 젊은이.
그러나 그에게 그 누구도 핀잔을 늘어 놓지 못했다. 그는 다름 아닌 천우진이었기 때문에.
***
충실한 육아 활동으로 루시에게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옹알이의 의미 없는 단어가 내 귀에는 '아빠' 혹은 '파파'로 들리고, 아이들이 '사랑해'라는 표현을 내게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설파하고 다녔더니 지겨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받은 일주일이라는 육아휴가를 알차게 써야 했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부드러운 실크 잠옷 위에 가운을 입고는 말했다.
"노인네들 어디 있다고요?"
"북창동 요정에 모여 있습니다."
"또 무슨 작당모의를 하려고 모여계시나."
호석은 픽 하고 웃을뿐 대답하지 않았다.
"우선 그리로 가죠, 내일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야 되니까 빠르게 처리 합시다."
"예, 회장님."
나는 잠옷 바람에 기내용 슬리퍼를 신고 공항을 벗어났다. 외부로 나오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회장님."
호석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제법 따뜻해 보이는 코트를 건넨다.
"벌써 이런 계절이네요."
"일교차가 심하니 감기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정의 주차장에 들어서니 고급 세단들이 즐비 했다. 누가 봐도 이곳에서 전경련이 모임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행원들을 비롯한 경호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요정.
둘이 와서 술을 마셔도 보통 2천만원을 훌쩍 넘는 술집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라니, 늙은이들이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나와 호석을 막아서는 사내들.
"비켜, SKY그룹 천우진 회장님이시다."
우리 대원 중 한 명의 말에 흠칫 놀라는 사내들. 호석의 뒤에 서 있는 나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본다.
"비켜, 비켜!"
저 멀리 머리가 히끗한 사내의 외침에 경호원들이 양 옆으로 길을 열고, 머리가 히끗한 사내는 얼른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이 이 곳에는 어떻게?"
"전경련 모임 있다면서요?"
"아, 예... 그렇습니다."
"나도 전국 경제인 연합에 포함되지 않아요?"
"그, 그렇죠."
"안내 하세요."
"예."
내부로 제법 깊숙하게 들어가고 나서야 커다란 미닫이 문이 보였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고 잔뜩 당황한 얼굴의 최태수를 마주 할 수 있었다.
"여, 여긴 왜?"
"노인네들 여기 다 모여있었네."
곳곳에서 불쾌한 표정들이 보였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역정을 내거나 화를 낸다? 제 정신이 박혀있다면 그러지 않을거란 것을,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아 있는 최태수의 곁으로 갔다.
"좀 앉읍시다."
"크음."
헛기침과 함께 최태수가 슬며시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내가 좀 바쁘거든요? 본론만 짧게 얘기합시다. 우리 합의 할 게 좀 많죠?"
곳곳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한국항공을 움직이는 조양구 회장이 무릎을 꿇고는 술 주전자를 들어 내게 내민다.
"한 잔 하십시오 회장님, 잘 오셨습니다."
그에게 술은 한 잔 받아 비우고는 술주전자를 건네 받았다.
"술 잔이 좀 작다 그렇죠?"
"예?"
"아니 왜요? 폭탄주를 그렇게 좋아하신다면서요, 그것도 무조건 원샷으로 드신다고?"
"그, 그것을 어떻게?"
슥 시선을 돌려 최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맥켈란 위스키를 좋아하시고, 듣기로는 집에 한정판도 있다는데, 캬~ 언제 한 번 한잔 하러 가겠습니다."
"으음... 그러시오."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앉은 대서양건설의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에 새 부인 얻으셨던데? 여섯번째인가 그렇죠? 양 회장님?"
"커험..."
또 시선을 옮겨 전국 최대규모의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새세계그룹 이영구 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바이 쪽이랑 바쁘신가 봐요? 비밀스럽게."
"헙."
그 밖의 회장들을 한명한명 지목해 그들이 숨기고 싶은 치부나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사업들을 언급했다.
자리에 앉은 모두의 얼굴이 날 처음 봤을 때 보다 더하게 찌푸려졌다. 첫 표정은 똥 씹은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설사를 씹은 듯한 표정들.
"우리가 SKY의 손아귀에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것이오?"
최태수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답."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최태수.
그의 얼굴에서 옅은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며 호석에게 신호를 주자, 사전에 준비되어 있던 서류들을 빠르게 회장들에게 전하는 대원들.
그 허연 종이가 무엇이냐는 듯 날 바라보는 최태수.
"여러분들이 우리 할아버지와 SKY에 흠집을 내고자 사용한 비용들이 적혀 있고, 그것 때문에 우리 SKY가 입은 피해에 대한 비용이 적혀있는 서류입니다."
1원짜리 하나 빠트리지 않고 적힌 서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회장들.
"6, 6조 4천억?"
조양구 회장의 놀란 얼굴에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예, 여기 계신 노인네들이 열심히 움직여주셔서, 우리 SKY가 6조 4천억의 피해를 입었네요? 그건 뭐 중요한 돈이 아니고, 여기."
난 내 가슴을 콕콕 찌르며 얘기했다.
"여기에 제일 큰 피해를 입었죠, 마음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맨 뒷장을 보시면 여러분들이 내게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따른 피해보상금의 적정선을 적어두었습니다."
최태수도 조양구도 빠르게 맨 뒷장을 확인한다.
"이런 미친."
점잖 빼고 있던 최태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통신을 내 놓으라? 말이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그쵸? 말이 안 되죠? 한달이란 시간동안 알아서들 피해보상 하시라고 시간을 줘놓고, 너무 자비로운 처사죠?"
최태수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 비꼼은 무시하고 제 할말을 토해낸다.
"물론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적정수준의 보상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과한 처사요!"
최태수의 말에 장내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이렇게 아픈데. 밤잠을 설쳤는데 겨우 그런 것만 내 놓으면 봐준다는게 참 말이 안 되잖아요?"
"뭐, 뭣?"
다시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강기태 본부장이랑 찰리 박 한테, 오랜만에 일다운 일 좀 하자고 얘기하세요, 여기 계신 회장님들의 지주회사들 공개매수 절차 밟으라고."
"예, 회장님."
최태수가 '흥!'하고 콧방귀를 끼며 말한다.
"SKY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쉽지 않을텐데?"
"어이구야, 대 KS 그룹이 우리 SKY그룹의 자금 사정을 다 걱정해주시고?"
"오히려 SKY가 흔들릴수도 있고, 대한민국 재계에 외세의 침입을 조장하는 행위가 될 수 있소!"
난 피식 웃으며 호석을 바라보았다.
"지금 SKY 인베스트먼트 유보금이 얼마입니까?"
"약 680억입니다."
호석의 말에 코웃음을 치는 회장들.
"아이고, 화폐를 말씀 안 하셨네."
내 말에 호석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시 말한다.
"아, 정정하겠습니다. 680억 달러입니다."
"유보금만요?"
"예, 회장님."
나는 밝게 웃으며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회장들을 쳐다보았다.
"너무 적죠? 여기 있는 회사들 다 SKY가 먹으려면 돈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렇죠?"
조양구 회장이 더듬 거리며 말했다.
"8, 80조가 넘, 넘는다고?"
그 말에 전경련 회장들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최태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주사들 공개매수 시작할까요?"
최태수가 거만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슬그머니 바꾸며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그를 시작으로 이내 모든 회장들이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조아렸다.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 제 25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