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33화 (133/458)

< 제 133화. >

시간이 흐르는 걸 모를 정도로.

울다가 진이 빠질 정도로 우리는 넋 놓고 울었다.

팅팅 불어 터진 눈두덩이로 다 지쳐 빠진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우희.

“잘 다녀와~ 오빠.”

“그래.”

우리는 양파의 껍질을 한겹 한겹 벗기듯.

서로가 서로에게 더 끈끈한 남매의 우애를 느꼈다.

팅팅 불어 볼품없겠지만 밝게 웃어주며 손을 흔들고는 다시 차량에 올랐다.

“그 새끼, 어디 있습니까?”

싸늘하게 굳은 내 음성에 정호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인천 창고에 부녀를 데려다 놨습니다.”

천가는.

내가 살아 숨 쉬는 천가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우선 자동차로 들어가죠, 바쁘니까.”

“예, 회장님.”

***

SKY자동차의 대회의실, 모든 임원이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자리에 앉고, 그들이 앉기도 전에 물었다.

“관련된 사람들 명단 나왔습니까?”

궁둥이를 붙이려던 임원들이 덜컥 자리에 굳었다.

이미 대양실업의 일은 그들에게 전해졌을 테다. 라인을 세우는 순간 당연하게 보고가 들어갔을 터.

“리베이트, 그 썩어빠진 관례가 SKY자동차에 남아있다는 게 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고작 1차 하청에서 미친놈처럼 양산 품질을 떨어뜨렸을 리 없다. SKY자동차 내부에 줄이 닿아져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내 말은 절대 의심일 수 없다. 확신이고, 그것을 임원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회의실에 찬 바람이 몰아치고, 서로가 서로의 눈을 보며 눈치를 살핀다.

SKY자동차의 사장 차승호를 바라보았다.

과거 삼현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을 가시적으로 끌어올렸던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그를 사장 자리에 앉혀 두었다.

“차 사장님, 말씀해보세요.”

그가 푹,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선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됐고, 관련자 명단 뽑았습니까?”

눈을 질끈 감은 그가 다시 눈을 뜨며 어디론가 손짓했다. 그러자 젊은 직원 둘이 내 앞에 서류를 내려놓는다.

퉁.

최대한 살살 내려놓았겠지만, 종이 쪼가리가 내려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양의 서류를 가져왔는지를 짐작하게 만들어준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게 다 관련자다?”

“이번에 모든 부품의 품질검사를 실시했고, 해당 부품의 담당 직원과 담당 부서장, 그리고 부서장의 보고를 받는 중역의 명단까지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대양실업 뿐만 아니라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네요?”

“면목 없습니다.”

역시 전 삶 능력으로 인정받았던 사람답게,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발본색원.

이참에 SKY자동차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하려는 시도일 터, 완성된 사내 정치 ‘라인’을 싹 지워버리겠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다들 여유가 있나 봅니다. 사장님 말고는 아무런 말씀들이 없으시네요? 라인이 지금도 멈춰있단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결코 무능한 사람을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빠르게 규모를 늘리며 제대로 솎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 수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는다는 얘기처럼 솎아내지 못한 놈이 점점 부를 늘려감에 따라 ‘나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에 전염된 모양이다.

살얼음판 위에 있듯 모두가 행동이 조심스럽다. 대한민국의 이런 사내 문화가 참 아쉬웠다. 누구라도 하나 대쪽 같이 큰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지만, 그러기 힘든 모양이다.

“관련자는 모두 해고 및 소송 준비하세요.”

‘아!’ 하는 짧은 절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중역들은 없었다. 적어도 대양실업의 오너 일가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저들은 조금이나마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해결책은 세웠습니까?”

차승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현재 문제 부품들의 금형을 바로 생산 가능한 다른 공장으로 이관하는 중이며, 라인이 멈춘 만큼, 다른 직원들까지 동원해 품질검사를 시행 중에 있습니다.”

“그중에 양품만 따로 빼서 일단은 만들겠다?”

“그렇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악의 피해를 방지하는 방편은 맞았다.

“이미 출시된 차량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리콜은,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회장님.”

대놓고 날 들이받는다.

나도 모르게 굳어있던 얼굴이 씨익 풀어졌다.

그래, 일은 이렇게 해야지 싶었다.

나보다 상급자라고 깨겡 하고 할 말 가리는 것은 내가 바라는 내 회사가 아니다.

“이유는요?”

“이미지입니다.”

쉽게 얘기하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의 말을 내가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을 테다.

“아니요, 리콜 감행합니다.”

차승호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회장님! 그건 안 됩니다!”

이어서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던 다른 중역 중 몇몇도 빠르게 제 목소리를 뽐낸다.

“안 됩니다!”

“고려해주십시오!”

“그건 정말 안 됩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다.

눈치껏 내게 귀를 가져온다.

“방금 반대한 사람들 명단 작성해서 올리세요.”

“네, 회장님.”

그들의 면면을 살피니 강단, 고집이 느껴진다.

“여러분도 이유는 이미지 때문입니까?”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비용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

만족스러웠다.

역시 멀쩡히 일 잘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래도 리콜은 진행합니다.”

차승호 사장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아아··· 기획팀과 회의 결과,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는 최대 3년 이상의 인적, 물적자원이 투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3년도 짧게 잡았다. 그만큼 최악의 상황에 대한 최선의 대비를 했을 때를 말할 테다. 그리고 또, 기획팀과 차승호 사장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요, 이번 리콜사태로 우리 SKY자동차의 이미지는 천정부지로 솟을 겁니다.”

차승호는 물론 임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신이 방금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는 눈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차승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동차 회사들 뿐 아니라, 모든 기업이 문제가 발생하면 발뺌하기 바쁩니다. 소비자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도 많은 날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죠,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오리발을 내밀며 기업의 힘을 과시하며 소비자를 찍어 누르려 합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임원들.

“그러나 우리 SKY는 다를 겁니다. 먼저 고객들에게 잘못이 있음을 시인하고, 교체해 줍니다. 여태껏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양심선언’이 될 겁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사례로 살펴도 매우 드문 일이 될 것입니다. 기업의 존망을 흔들 수 있는 대규모 자금 투입이 그 이유겠지요.”

아직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들.

“우리 멀리 봅시다. 당장 바로 앞, 이번 분기만 보지 말고 이번 연도만 보지 말고, 내년만 보지 말란 얘기입니다. 이번 기회에 완전하게 ‘믿을 수 있는 SKY’가 되자는 얘기입니다. 또한, ‘리콜’은 SKY의 각 정비소에서도 진행하고, 원한다면 ‘출장 서비스’도 지원할 예정입니다. 당장 기능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란 건, 고객들도 여기 있는 우리 중역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지금 SKY자동차의 문제는 본래 설계한 것 보다 내외장재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이지 ‘기능’ 자체가 하락한 것은 아니다. 물론 내구성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떠한 ‘환경’에서 문제가 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당장 양산되고 있는 자동차들에게 큰 결함이 발생한 적이 없었다. 보고된 사례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 자동차를 타는 고객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리콜’은 솔직히 과한 것이 맞았다.

굳이 기업이 먼저 ‘죄송합니다. 잘못 만들었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문제란 것이다.

“또한, 리콜 혹은, 출장 리콜이라고 하죠, 그것을 원하지 않는 고객들 그러니까, ‘제 차는 괜찮습니다.’하는 고객들에게는 추후 SKY자동차를 새로 구매할 때 신규 프로모션 할인을 넣어줄 계획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예정보다 많은 사람이 ‘굳이’ 부품교체를 받지 않을 겁니다.”

곳곳에서 ‘아아!’하는 장탄성이 들렸다.

이제 제법 내 말에 설득당한 모양.

바쁘게 머리를 움직이고 있을 차승호에게 말했다.

“언론은 내가 맡습니다. 차 사장님은 지금 내가 말한 것, A부터 Z까지,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주세요.”

“예, 회장님!”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고, 아까 분명히 말했습니다. 관련자들 용서는 없습니다.”

“예!”

***

나는 분명 대양실업을 나서면서 정호석에게 ‘인간 대우’를 하지 말라 눈으로 명령했고, 이제는 내 손과 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호석은, 내 뜻을 정확하게 반영해두었다.

인천 창고에 도착해 부녀를 보는 순간 직원들의 손이 최소한 수십 번은 닿았겠구나 싶었다.

내가 도착하니 직원 하나가 그들에게 찬 물을 끼얹었다. 기절하듯 뻗어있던 둘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주변을 휙휙 둘러본다.

“이, 이게 무슨!”

“꺄아악!”

이내 날 발견한 오 부장이라는 놈.

“회, 회장님 살려주십시오!”

오민희도 제 아비의 말에 날 확인하고는 아비와 같이 무릎으로 기어 온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까 오전에 우희 앞에서 가증스럽게 연기하던 그 쇼가 생각나니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놈들에게는 불행하고 아쉽게도, 난 우희와 같이 동정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오 부장, 오민희. 너희들이 오전에 내 동생에게 한 사과, 진심이었나?”

“그럼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정말 아가씨를 어여삐 여겼습니다! 제 딸 또래의 아가씨가 열심히 사는 모습에 남몰래 눈물로 지새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까드득.

가증스럽다.

시선을 오민희에게 옮기니 제 아비에게 질세라 입을 털기 시작한다.

“흑흑, 회장님 제가 나쁜 년이에요 제가··· 아가씨가 오해하신 거에요··· 정말이에요···”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아니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을 얘기하기 어려웠는지 ‘오해’라는 말을 하며 눈물로 동정을 호소할 뿐, 오 부장만큼 가증스럽진 않았다.

그렇다 한들, 내 뜻엔 변함이 없다.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내 의중을 눈치챈 호석이 각종 연장이 놓인 테이블에서 군용대검 두 개를 가져온다. 이제 눈으로만 지시해도 척하면 척이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챙그랑.

바닥에 구르는 대검 두 자루를 묘하게 바라보는 부녀.

“자결한다면 믿어주지.”

두 부녀가 날 빤히 올려다보며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는다.

“예?”

“네?”

“어렵나?”

““······””

그들을 마주 똑바로 보니 내 눈에서 물러섬이 없음을 느꼈을까?

“그, 그래도 그것은···”

“사, 살려주세요 회장님.”

“분명 네 년놈들은 내 동생 앞에서,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 년놈의 진심을 내가 알 수 있게 자결해. 그렇다면 믿어주지, 그 잘난 대양실업도 살려주고.”

““······””

“어려운가 봐? 좋아, 그럼 더 쉬운 방법을 주지.”

침을 꼴깍 삼키며 내게 집중하는 둘.

“오 부장 당신은 감히 내 여동생을 더듬던 그 더러운 손을 잘라, 오민희 네년은 내 여동생을 할퀴고 후벼파던 그 간사한 혓바닥을 잘라, 그렇다면 네 년놈들의 진심을 믿어주지.”

이번에도 둘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사과에 진심이 없었다는 것은 예 진작에 알고 있었다. 직관적으로 년놈의 몸뚱이에서 붉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니까.

“죽고 싶은가 보지?”

내 말에 막 손을 뻗으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하는 두 부녀. 그러나 직원들이 빠르게 달려들어 그들의 턱주가리를 걷어찬다.

“다시 한번, 회장님께 손을 뻗으면 잘린다.”

서슬 퍼런 정글도를 들고 경고하는 직원의 모습에 ‘억’하고 아프다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다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는 둘.

“마지막 기회를 주지.”

잔뜩 기대어린 눈.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는 눈.

“오 부장, 자식새끼가 고통받는 모습을 본다면, 넌 고통스럽겠지?”

힐끗 오민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고통을 네 놈이 받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네 진심을 증명할 수 있다면, 네 놈의 그 더러운 손 대신, 딸내미의 귀한 손을 잘라. 그럼 너희 부녀를 살려주지.”

오 부장이 짧은 고민을 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결심한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대검을 줍는다.

“아, 아빠 설마···”

잽싸게 팔을 뻗어 제 딸의 왼팔을 꼭 부여잡은 오부장.

“미, 미안하다 민희야··· 살아야지! 살아야 다음이 있지!”

“아빠 제정신이야? 나 아빠 딸이라고!”

“그래! 넌 내 딸이야! 내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그러니까 너도 양심이 있으면 이 애비 목숨 한 번 살려주라!”

“지랄하지마! 이거 놔! 놓으라고!”

팔을 뿌리치려는 자와 자르려는 자의 대립.

“회장님! 제가, 제가 아빠, 아니 이새끼 혀를 자를게요! 네? 네! 이 새끼 좀 말려주세요!”

이제야 둘은 가식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성을 드러낸다. 우희 앞에서 놈들을 처리할까, 오전에 이성의 끈이 끊겼던 그때, 수십 번 생각했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련하고 멍청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겐 그 모습이 더없이 순수하고 중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가능한 한 오래, 영원토록 지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더라도 행복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우희의 곁에 달라붙는 이런 날파리들은 확실하게 치워주어야겠다. 혹여나, 행여나 일말의 트라우마도 남지 않도록, 아예 트라우마 자체를 떠올릴 일 없도록 세상에서 지울 테다.

아우성치는 둘에게 시선을 떼고는 말했다.

“치워요.”

< 제 13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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