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화. >
샌드백 위로 이건의 얼굴과 이재현의 얼굴이 교차로 떠올랐다.
퍽, 퍽, 퍽.
마음이 복잡했다. 머리가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그 놈들의 갈아마시고 싶었다.
철렁, 철렁.
내 손과 발 때문에 샌드백은 쉴 새 없이 출렁거렸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이르다는 말이 있다는데, 나는 군자의 깜냥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쿵.
샌드백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던 천장의 연결고리가 뚝 하니 떨어지며 샌드백이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따끔한 통증이 양 주먹에서 느껴졌다.
호석이 다가와 서둘러 붕대를 풀고는 소독약을 발라준다.
“도련님, 아직 손이 여물지 않았습니다. 샌드백을 너무 오래 치시면 손 상합니다.”
“다치면서 크는거죠.”
호석이 피식 웃으면서 정성스럽게 손을 치료해주었다. 짧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고마움을 표하고는 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호석이 건네는 이온음료를 마시고 화를 삭이려 했지만 역시, 기분이 좋지 않다.
“사우나나 갈까요?”
“그러시죠.”
사우나와 냉탕을 오가길 수차례,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태국이 외환위기를 맞기까지 8개월.
시드머니 준비는 순조롭다.
군자는 아니지만 내 복수는 차근차근 현재진행형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조급함은 실수를 낳고, 그 실수는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뱀 같은 이건은 내 실수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테다. 어떻게든 물어 뜯고, 배가 터지도록 집어삼킬테니까.
짝, 짝.
양 손으로 강하게 내 볼을 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물로 땀을 씻어내고 옷을 입었다. 옆에서 옷을 입던 호석이 전화를 받았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날 바라보는 호석.
“할아버지에요?”
“예, 크게 할 일 없으시면 들어오시랍니다.”
“가죠.”
***
신문을 읽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고 날 바라본다.
“그래, 엄한 샌드백에 분풀이를 했다고?”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할 일이 없느냐?”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펑펑 놀면, 게을러지는 법이다. 뭐든 습관이 되는 법이지.”
“그렇죠.”
“일이나 하나 하겠느냐?”
“일이요?”
흥미가 동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서울대 입시야 자신있으니 약간의 감각만 유지해주면 될 일이다.
“그래, 일.”
“무슨 일인데요?”
할아버지의 손짓에 철웅이 서류더미를 내밀었다.
차근차근 살펴보니 사채업자들의 명단과 액수, 그리고 종적을 감춘 시점과 현재의 위치등이 나왔다.
“할아버지 아랫사람들 같네요?”
“그래, 내 돈을 삼키려던 멍청간 개구리 같은 것들이지.”
“분수에 맞지 않는 걸 가졌군요.”
“맞다. 집에서 빈둥거리느니, 가서 용돈벌이나 해 보거라.”
“용돈 벌이요?”
할아버지가 다시 신문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놈들에게 받아오는 돈은, 네 몫이다.”
“벌만 주라는 말씀이시군요.”
“알아들었으면 일 보거라.”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일은 잘 되고 계시죠?”
“오냐, 곧 언론에도 보도가 나올게다.”
슬쩍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한 달의 시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이 놈이 말 한 것을 지키라고 면박을 주는구나.”
“하하하, 그냥 며칠이나 지났나 본 겁니다.”
“일 없다.”
“예, 그럼 손자는 아르바이트 하러 가보겠습니다.”
대답없이 신문에 집중하는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방으로 올라가 ‘양복’과 시계를 착용했다.
아르바이트라지만, 전투에 전투복을 빼 놓을 수 없는 법. 문득 피식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서류를 훑어보니 약 800억이 넘어가는 돈이었다.
그 돈을 받으러 가는 일을 ‘아르바이트’라고 표현할 만큼, 나도 배포가 늘었구나 하는 생각에 나온 웃음이었다.
과거, 그러니까 전 삶에서.
삼현의 장남 이재영과 삼남 이재현의 ‘지분’싸움이 치열하던 시기, 이재현의 비자금 창고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낙 급박했기에 굳이 내게 ‘비밀’을 오픈한 이재현. 어쨌든 그 창고에서 나는 굳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평생을 아득바득 살아도 얻지 못할 액수의 큰 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골드바와 골동품도 그 수가 상당했다. 이 창고를 통째로 털려면 화물차 수 대가 동원되야 할 정도의 양이었다.
‘뭐해? 빨리 안 담고?’
이재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돈을 담기 바빴다.
한참을 돈을 담고 있는데 이재현이 말했다.
‘대한민국에 돈 맛 보고 중독 안 되는 놈이 없어, 이게 아주 마약보다 지독해, 그러니까 1억으로 안되면 10억, 10억으로 안되면 100억을 맥이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이재현은 껄렁한 자세로 5만원권 지폐에 불을 붙이고 그 불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너도 맛 좀 보던가.’
‘예?’
‘아이 시발, 뭘 되 묻고 지랄이냐 천 실장아, 대충 주머니에 돈 다발 몇개 찔러 가라고, 너도 맛을 봐야 금배지 새끼들한테 제대로 약을 맥일거 아냐.’
‘아, 예! 감사합니다.’
‘아휴, 돈은 다 좋은데 냄새가 줫같에 쯧.’
먼저 창고를 벗어나는 이재현의 뒷모습을 보고, 품에 넘칠 만큼 돈다발을 찔러넣다가 멈추었다.
그러곤 다시 품에서 돈다발을 다 꺼내 신경질적으로 내팽게쳤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돈 맛을 거부했으니까.
본능적으로 ‘돈’은 무서운 놈이란 걸 알았으니까.
돈을 지배하는 놈이 되야지, 돈에 지배당하는 놈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800억이라는, 세간의 기준에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에도 내겐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굳이 용돈이라는 핑계로 내게 일을 시키는 할아버지도 어떤 의중이 있을 테고, 손자놈이 할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 드려서는 안되는 법.
딸깍.
파텍필립 시계가 손목에 감기는 느낌이 참 좋다.
96년도의 12월은 어쩐지 조금 바쁠 것도 같다.
“가보자, 돈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은 어떤가.”
***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잘 찾는 집단이 있다.
경찰도, 검찰도 아닌 ‘사채업자’들이 그렇다.
‘떼인 돈’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일까? 그들이 사람을 찾는 방법은 상상을 초월하도록 디테일하고 세세하며 상식을 벗어난 방법들이 많았다.
물론 그 방법들의 디테일이야 내가 알게 아니고, 당장은 순천까지 다이렉트로 내려오느라 뻐근한 몸뚱이를 좀 풀어야겠다.
“읏짜~”
기지개를 켜니 여기저기 뚝뚝, 하고 관절의 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여기 있다고요?”
“예.”
뭔가 엄청 은밀하고, 음습한 곳에 숨어있는게 보통이 아닌가 싶은데, 이렇게 대 놓고 빌딩 안 사무실에 있다니 의아했다.
“안 숨은 건가요?”
“예, 당당하게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그를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성격도 실력도 최고였습니다.”
“특이하네··· 사채만 만지던 사람이에요?”
내 물음에 호석이 답했다.
“원래는 유명한 필로폰 공급책이었습니다.”
“원래는 유명했으면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네요?”
“예, 지금은 사채만 만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공급책이었으면 돈도 제법 만졌을 것 같은데, 굳이 할아버지를 쩐주로 뒀네요? 할아버지가 쩐주가 된 것도 신기하고, 약쟁이나 도박좋아하는 놈들을 싫어하실텐데?”
“하하하, 맞습니다. 회장님은 확실히 그런 종자들과 상종을 안 하십니다. 듣기로는 그 공급망을 누구한테 양보했다고 들었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돈이 나오는 유통망을 양보했다?”
“예, 김 사장이 ‘의리’와 ‘신의’로 유명했고, 회장님도 그걸 아시고 쩐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의리? 신의? 그거 맞아요?”
귀를 의심했다.
이 바닥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기지 않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미친놈들이 많은 세상이니, 특이한 사람 한 둘쯤이야 있을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나도 충분히 특이 할테니까.
“하하, 신의는 꼭 지키던 놈이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이번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셨고요··· 아마 그래서 도련님을 내려보내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문득, 할아버지가 굳이 내게 이 일을 시키신 이유중 하나를 깨달았다.
지하에 잠시 숨어 있으라는 얘기였다.
자신이 양지로 올라서면 사채시장은 한 동안 무주공산이 될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굳이 가를 필요는 없으니 내가 장악하라는 이유가 안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신의 대부라. 이름 참.”
대부업체와 신의가 어울릴리가 없다.
그런데도 버젓이 저런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니 아이러니다.
거의 다 부서진 문을 여니, 초췌한 몰골로 잠을 자고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김장원.”
나지막한 내 부름에 부스스 자리에 일어나더니 바닥을 쳐다보고 말했다.
“느덜도 돈 받으러 왔냐잉? 먹고 뒈질라고 해도 없으니께, 갈길 가니라잉.”
살기를 포기한 눈깔이다.
“김사장, 나 정호석이오.”
호석의 말에 고개를 들더니 우리를 자세히 쳐다본다.
“아··· 정실장님, 회장님껜 죄송하다고 전해주쇼, 나가 낯짝이 암만 두꺼워도 차마, 직접 말씀드리진 못하겄소.”
적대의 붉은빛도, 경계의 노란빛도 아닌, 선의의 초록빛 연기를 피워올리는 김장원.
“캐릭터 참, 독특하네.”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공허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김장원.
“누구십니까?”
“천혁수 회장님이 내 조부 되시오.”
“아아··· 소문은 들었습니다. 이거, 죄송하게 되았습니다.”
혀를 차고는 말했다.
“쯧, 돈은 어떻게 갚을 생각입니까?”
“··· 은혜를 원수로 갚아 면목없지만, 가진게 부랄 두쪽이라 나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뒤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칼.”
보지 못했지만, 호석이 놀라는 느낌이었다.
“도련님···”
“칼.”
다시 한 번 명령하자, 내 손위에 공손히 단검을 올려 놓는다.
저벅저벅 걸어 김장원의 앞에 섰다.
쾅!
나무로 된 테이블 위에 단검을 꽂았다.
“사지 중, 어디를 자를래?”
두려움에 떨지도, 반항도 없었다.
오른손잡이인 듯, 오른손으로 단검을 뽑고는 김장원이 말했다.
“오른손잽이라, 나머지 세 개를 내어드리먼 되겄습니까?”
대답 없이 가만히 있자, 왼손을 테이블위에 올리더니 단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내려친다.
턱.
그리고 그 오른손을 내가 잡았다.
“됐습니다. 마음은 확인한 것 같고.”
“휴우.”
뒤에서 안도의 한 숨이 흘러나온다.
아마도 정호석은 김장원이 죽는게 싫은가보다.
칼을 빼앗아 테이블위에 대충 올려 놓고, 테이블을 넘어 김장원 앞에 눈을 마주보고 앉았다.
“유명한 마약 유통책이셨다고?”
“다, 옛 일이지라.”
“어쩌다 이 모양이 됐습니까?”
김장원이 나를 비롯한 정호석과 뒤에 서 있는 우리직원들을 쭉 훑어보고는 말했다.
“우덜같은 인생이 뭐 별것 있겄습니까? 감고, 감기고 그라는 것이죠잉.”
“감겼다?”
“부랄친구였습니다··· 우리 아부지 보내드릴때 같이 장지까지 관매고 가던 부랄친구.”
“쯧.”
대충 알아 들었다.
믿었던 놈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얘기다.
하여간 가장 믿고 싶은게 인간이라는 족속인데, 가장 믿어서는 안될 족속이 인간인게 아이러니다.
“배신 한 번에 살기를 포기 하겠다?”
“나가 가진 것이 뭐가 있겄습니까? 돈? 돈 많으면 뭐덥니까? 같이 쓸 사람이 없는디.”
“가족도 없습니까?”
“아부지 돌아가시고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어떤 정신나간 여인네가 마약팔다 사채업 하는 놈한테 시집을 오겄습니까?”
“그래 죽겠다?”
“아따··· 뒈지먼 좋은디, 나가 차마 아부지한티 미안혀서 자살은 못하겄습디다.”
정말 독특한 사람인데,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만의 어떤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가진게 부랄 두쪽이라고요?”
“예, 거짓부렁 없습니다.”
“그럼 그거 나한테 주시죠? 돈 대신 그거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스윽 손을 뻗어 칼을 집는다.
탁.
그 손을 잡고 내가 말했다.
“그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이러실까?”
“나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서 솔차니 지쳤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천혁수 회장님께 입은 은혜는 갚고 가야죠?”
“······”
“일 하나 같이 합시다.”
무슨 일이냐는 듯 날 바라보는 김장원.
“별거 아닙니다. 이제 대학교 들어가는 놈이 하나 있는데, 그 놈만 좀 감아봅시다.”
“핏덩이를 나가 감아부라고요? 아따 그것은 아닌디요.”
“그냥 핏덩이는 아니고, 재벌 3세.”
“잉··· 모가지를 걸어라 이 말씀이시네요?”
“알아 들으신 것 같네요? 자신 없어요?”
“뒈져라 하면 뭐라도 되겄죠?”
“좋네, 그럼 일 한번 해봅시다.”
그가 공허하던 눈에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을 하고는 물었다.
“어떻게 감아불까요?”
“주특기 있잖아요?”
“뽕?”
“여자에 환장 한 놈이거든요?”
“아따 어린 놈이··· 금수저는 다르네요잉.”
알아 들은 것 같으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제 형들과 다르게 망나니 삼남 이재현은 한번 물어 뜯은 약점을 놓지를 않았고, 장점이 많은 인간들을 활용하는 감각이 날카로운 편이었다.
삼현의 이건은 특히 그런 이재현을 경계했다.
마지 자신이 형과 누이들을 처 내고 갈라진 삼현을 다시 최고로 올려놓은 것 처럼, 이재현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건이 경계하는 것은 정확히, 자신의 ‘삼현’이 몇 갈래로 갈라지는 일. 자신과 성품은 꼭 닮은 삼남이지만, 유흥을 좋아하고, 돈을 펑펑 뿌려대는 이재현이 불안 한 것이다.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는데, 그가 말했다.
“그거 한 번이면, 끝입니까?”
피식 웃으며 뒤돌아 말했다.
“봐서.”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따, 막 심장이 벌렁벌렁 하네요잉.”
“재미 좋으면 계속 따라다니시던가?”
“봐서요.”
“좋네.”
고개를 돌려 호석에게 말했다.
“깔끔한 모습으로 데려오세요.”
호석이 웃으며 ‘예!’하고 대답했다.
신의 대부를 나와 계단을 내려가며 이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삼현의 개망나니 이재현, 뽕에 취하다.
기사 타이틀로도 좋아보이고.
“재밌네.”
< 제 2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