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0화. >
매일 같이 할아버지와 함께 하던 운동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분노를 이런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온 몸으로 ‘불쾌’를 표현하는 이건의 손을 놔 주었다.
언짢은 모양인데 굳이 표현을 하지 않고, 제 곁에 서 있는 인물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는 내 아들일세.”
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삼현의 ‘삼남’ 이재현을.
“처음뵙습니다. 이재현입니다.”
이재현의 인사에 나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네, 처음뵙습니다. 천우진입니다.”
이건이 뱀 같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 또래인 것 같으니 사이좋게 지내 보시게, 혹시 아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마주 웃어줄 뿐, 차마 입에서 ‘예’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 없으니까.
“네, 아버지.”
이재현이 날 보며 히죽 웃는다.
저 웃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비열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아직 새끼 뱀은 감정 컨트롤이 어색하다. 사이좋게 지내란 말에 왜 대답이 없었냐 하는 추궁을 포함하고 있다.
“저는 19살입니다. 올해 수능을 봤죠.”
“아, 나도 수능봤는데.”
“어? 그럼 동갑이야?”
대뜸 반말이다.
“아니, 내가 한 살 어려. 난 18살.”
내 반말에 녀석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할아버지가 재미있다는 듯, 이재현에게 말했다.
“수능을 봤다고?”
“예.”
“오오, 몇점이나 맞았더냐?”
폐부를 찔린것 처럼, 이재현이 흠칫 놀라며 이건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분명 이재현에게는 ‘학벌 컴플렉스’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걸 모를텐데도,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아직은 별게 없는 놈이니까, 약점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하는 꼴을 보니 수능 성적으로 집에서도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게 아직 성적표가 나오지 않아서···”
놈의 구차한 변명에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이건을 쳐다보았다.
“하하, 자식놈이 ‘경영수업’에만 몰두하다 보니, 학생의 본분을 다 하지 못해 어디 내세울 점수는 아닙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기업’일이라는게 하나부터 열까지 ‘최고경영자’의 손이 닿아야 하는 일이다보니··· 뭐 어디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쉽겠습니까?”
이건 답게 사특한 혓바닥을 놀려 가벼운 카운터를 날린다. 콤플렉스를 묘하게 건드려보지만 여유롭게 대처하는 할아버지.
“그렇지, 자네 아들도 생각있으면 내 밑으로 보내, 내가 ‘돈’에 관해서 제대로 알려줄테니.”
이건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며 물었다.
“회장님 손자는 어떻습니까?”
“우리 손자놈은 ‘경영수업’을 받으면서도 수능시험은 쉽다고 ‘만점’을 받아오던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할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에이, 할아버지 처음 도입되는 시험이기도 했고,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 만점 받기는 어려운거에요, 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의 힘이죠, 태생이 다르다고 해야되나? 아차! 여기 이 형 무안하겠다. 그만 자랑하세요~”
“그렇지, 평범한 것들은 하기 어려운 일이지.”
“꼭 그렇진 않고요, 평범해도 노력만 하면 가능하죠? 근데 노력도 재능이라 뭐··· 그런거죠.”
“그렇구나.”
볼살을 꿈틀 거리며 가까스로 화를 참는 이재현.
이건이 ‘하하’하고 웃으면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요즘 바쁘시다고요?”
“돈 벌려면 발바닥에 땀이 나야지.”
“하하하, 정정하십니다.”
“오래 살아야지, 꼭 죽는 걸 보고 싶은 놈이 있어서.”
이건이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핥고는 말했다.
“어쩐지 저 들으라고 하시는 말 같습니다?”
할아버지 특유의 그 강렬한 눈으로 이건을 빤히 쳐다보고는 말했다.
“으음? 왜? 죄 지었나?”
이건이 사특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민국에 죄 없이 돈버는 사람도 있습니까?”
할아버지도, 나도, 이건도 피식 웃어버렸다.
이재현은 눈치껏 웃는다.
이건이 눈을 부라리며 이재현에게 말했다.
“네 놈이 뭘 안다고 웃어?”
명백한 분풀이였다.
“죄송합니다.”
이건이 할아버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곧 양지로 올라오신다니, 그때 또 뵙겠습니다.”
“일 없어.”
할아버지는 손을 휘젓는 것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끝까지 자신을 홀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에도 이건은 별다른 불평 없이 웃어보였지만, 나는 그의 분노가 보였다.
꿈틀거리는 볼, 번뜩이는 눈.
상대의 약점이 보이면 가차 없이 물어뜯어 삼켜버릴, 그런 얼굴이었다.
이재현이 돌아서기 전,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우리 2, 3세들끼리 모임이 있거든? 관심 있으면 연락해.”
19살의 나이에 명함이라, 이재현 이 놈은 이 시기에도 이러고 다녔구나 싶었다.
명함을 내미는 이재현의 저 눈.
저 눈빛은 망가뜨리고 싶은 장난감을 발견했을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수십년을 놈의 밑에 있었더니 별게 다 익숙하다.
2, 3세들의 모임.
뻔한 그 장소에 내가 갈 일은 없지 싶은데, 저 눈깔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한 번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건이 멀어지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떻더냐?”
“용이 되고 싶은 이무기죠.”
“옳게 보았구나.”
“용이 될 순 없을겁니다.”
할아버지가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째서?”
“제가 있으니까요.”
“네가?”
“예, 하늘아래 두마리 용은 좀 그렇잖아요?”
할아버지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오냐, 과연 잠룡답게 품에 담은 분노를 잘 조절하였다. 혈기를 주체 못하고 패악질을 부릴놈이 아니란건 알았지만, 의연한 대처를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할아버지.”
말하라는 듯 빤히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고개를 돌려 이건의 뒷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복수는 말이죠, 김치 같은 겁니다.”
“김치 같다라···”
“오래, 제대로 묵힐수록 맛이 기가막히는 법이죠.”
할아버지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위스키를 비우고는 고개를 돌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묵은지가 맛있지··· 이왕이면 끓여먹고 싶구나, 얼큰하게.”
“예, 돼지 목살, 앞다리살할 거 없이, 한마리 통째로 넣고 푸욱 끓여 제대로 된 김치찌개로 올리겠습니다.”
“오냐~ 기대하마.”
***
삼현의 총수, 이건의 저택.
우당탕.
“이 모자란 놈이! 무슨 얘기인 줄 알고 웃어!”
이건 회장의 호통에 셋째 아들 이재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부, 분위기를 맞추려고.”
“머리가 멍청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이재현은 분한 듯 손을 떨었다.
“분해? 자존심이 상해? 이 애비 말에 화가나!”
“······”
반항하듯, 대답없는 이재현의 태도에 더욱 화가 난 이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골프채 하나를 꺼내왔다.
“네 놈한테 붙여준 선생이 몇이냐? 네 놈 공부에 들인 돈이 얼마야? 그런데 고작 290점? 삼시세끼 고기 반찬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계집질까지 하고 다녔으면서 290점?”
이재현은 뿌드득 이를 갈며 대답하지 않았다.
“엎드려!”
이건의 명령에 바닥에 엎드린 사람은 이재현이 아니었다.
“박중구.”
“예! 회장님.”
“너 뭐하는 놈이야?”
“죄송합니다!”
정자세로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는 그의 몸을 골프채로 가볍게 툭툭 찌르며 말을 잇는 이건.
“너 연봉이 얼마야.”
“구천만원입니다.”
“그걸로 만족했어? 그거면 충분했어? 욕심이 없어서 일 처리를 이딴식으로 하는거야?”
“아닙니다!”
“그럼 설명 해 봐, 네 놈이 조사하고, 네 놈이 데려온 선생들한테 배운 내 자식새끼가 왜 290점을 맞았는지.”
“······”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는 박중구의 엉덩이에, 이건이 들고 있던 골프채를 휘둘렀다.
퍽, 퍽, 퍽.
“끄읍.”
가까스로 신음을 참는 그에게 이건이 말했다.
“내 자식새끼가 멍청하고 노력하지 않아서 그딴 점수를 맞았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면, 3비서실장 그 자리 내놓아야 할 거야.”
“아닙니다!”
퍽, 퍽, 퍽.
“끄으윽.”
“그럼 말해 봐, 왜 290점 맞았어?”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네 놈이 부족해서 그런거야.”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 일은 어떻게 해야겠어?”
“······”
“아무래도 네 놈한테 그 자리가 과분했던 모양이야.”
퍽, 퍽, 퍽, 퍽.
어찌나 전심을 다해 휘둘렀는지 골프채의 샤프트가 크게 휘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비명을 삼킨 박중구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직 290점이 아닙니다!”
이건의 입꼬리가 스륵 올라간다.
“아직 290점이 아니다?”
“예!”
골프채를 휘두르며 가빠진 숨을 고르며 다시 소파에 앉은 이건.
박중구가 설명을 잇는다.
“처음 도입된 시험답게 허점이 많습니다. 전산 오류나 채점의 오류가 있었던 겁니다!”
“이제야 그 자리에 어울리는 말을 하네.”
“죄송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그래, 필요한 총알은 재무팀에 결제 받아.”
“예!”
“만점은 힘들겠지?”
피가 줄줄 흐르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고민하는 박중구. 이건이 쯧쯧 하고 혀를차며 말했다.
“됐어, 서울대나 보네.”
“서, 서울대···”
“왜, 자신 없어?”
“아닙니다! 도련님 같은 인재는 당연히 서울대에 가셔야합니다.”
“좋아, 기대하지.”
“예!”
“일봐.”
“예!”
박중구가 나가고 이건이 이재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이 휘두르는 폭력을 바로 옆에서 봤지만, 이재현의 눈에 ‘반항’기는 빠질 기미가 없었다.
“아들.”
“네.”
“유산을 한 푼이라도 받고 싶으면 잘해.”
이재현이 덜덜 떨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이건이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고, 이재현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건 회장이 머무는 본관에서 나와 카트를 타고 자신의 거처인 별채에 들어서자, 일을 하고 있던 가사도우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재현이 가사도우미 한명을 지목하고는 말했다.
“너 따라와.”
“예?”
탁탁탁.
이재현이 돌연 달리기 시작했다.
몇 미터 앞에 있던 반문한 가사도우미를 향해 붕 몸을 띄우더니 그대로 밀어찼다.
2단 옆차기.
“으윽.”
명치 언저리를 제대로 맞은 가사도우미가 뒤로 쭈욱 밀려나며 대리석 벽에 등과 머리를 부딪히며 신음을 흘렸다.
“천한 하녀년이 어디서 반문이야? 너도 날 무시하는거냐? 그런거야? 바깥에서 무시당한 바가지 안에서도 무시한다 뭐 그런거냐? 응?”
가사도우미가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재현의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일어나.”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가사도우미.
이재현이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틀어쥐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주인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거야 알아들어?”
“네, 네··· 죄, 죄송합니다.”
이상하게 빛나는 이재현의 눈빛에 그녀가 두려움에 떨었다. 이재현이 씨익 웃더니 혀를 쭉 내밀어 그녀의 목 언저리부터, 입술을 지나 왼쪽 이마까지 쭈욱 핥았다.
“반반하게 생겨······”
쫄쫄쫄.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누런 액체가 흘러나와 이재현의 발을 적셨다.
막 웃음을 짓던 이재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고.
“사, 살려주십시오, 도, 도련님.”
“시발년이 오줌을싸? 내 몸에? 맞네 개 같은 년아 나 무시한 거.”
이재현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살려, 사, 살려.”
“뒤져! 뒤져!”
가사도우미를 구타하는 이재현의 눈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가냘픈 애원의 너머 자신을 비웃는 천우진을 향해 있었다.
“돈 놀이나 하는 천한 핏줄 주제에, 누가 누굴 무시해? 시발놈이! 뒤져! 이 개새끼!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 뱉으며 피칠갑을 한 가사도우미를 내려다본다.
“아이 시발 그러니까 이게 뭐에요? 예? 개새끼면 개 답게,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면 되지 왜 주인 말을 안 들어서 이러냐고요, 예?”
숨을 고르며 재킷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는 100만원짜리 수표 수십장을 꺼냈다.
“아.”
이재현의 명령에 피칠갑을 한 여자가 힘겹게 입을 벌렸다.
“물어.”
여자가 수표를 입으로 물었다.
“그래, 좋잖아? 말 잘듣네 착하다. 말을 잘 들으면 이렇게 떡고물이 떨어져요 알겠어요?”
“으예.”
“하, 그나저나 그 새끼를 어떻게 발라야 되나··· 천우진 그 개새끼를.”
< 제 2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