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27화 (327/334)

EP.328 이부 십육장 - 결자해지 (1)

* * *

위광천은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광활한 벌판, 그곳을 메우는 것은 온통 전투의 흔적, 몸은 부상에 천근만근 무거우며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졌군.”

발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광천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곳을 바라봤다.

그곳에 천마 이선이 있었다.

죽기 직전 반로환동을 마친 이선이 아닌, 위광천이 처음 신교에 발을 들이던 날의 이선이.

이곳은 그런 환영이었다.

가장 깊은 절망을 마주하여 그것을 이겨낸 이에게만 다음을 허락하는 환영.

목리원과 단지선이, 교에 침입한 수많은 맹의 무인이 그랬듯 위광천도 똑같이 환영에 빠졌던 것이다.

의도한 일이었다.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벽을 넘어서고 싶었으니까.

“역시, 내 가장 높은 벽은 이 시절의 교주셨습니다.”

위광천은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거칠게 닦아냈다.

이선은 그런 위광천을 보며 말했다.

“영문을 모를 말이군. 하나, 훌륭했다.”

위광천은 그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리고 다섯 걸음 물러서 구배지례를 시작했다.

예를 끝내는 순간,

쩌저적!

공간에 균열이 일었다.

위광천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무덤덤한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언젠가 온전히 당신을 넘겠습니다. 아직, 화장하여 뿌려진 때의 당신을 넘지는 못했으니.”

끝끝내 숨이 다하는 순간마저도 무릎 꿇지 않던 거인, 땅에 몸을 뉘는 일조차 수치스럽게 여겨 육신을 불태워 날린 투사.

위광천은 아직 스스로가 그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았다.

이선은 천천히 숨을 거뒀다.

위광천은 깨져나간 환영 너머 현실로 돌아왔다.

육신은 부상을 잊고 온전하게 회복했다.

마기는 웅혼한 울림을 품으며 주인을 만난 맹수처럼 그르렁대고 있었고, 의식의 밑준비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

위광천은 앉은 자리에서 등 뒤를 바라봤다.

태사의가 있었다.

언제나 이선이 앉아있던, 그리하여 천마의 상징이 된 자리.

스스로는 아직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판단에 위광천은 그곳을 깔고 앉지 못했다.

하나 그 일도 곧 끝이었다.

‘이것으로 완성된다.’

한 번의 생사결.

승자는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목숨마저 잃을 것이다.

달리 말해, 승리한다면 위광천은 저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자박―

발소리가 울렸다.

자박― 자박―

침묵에 휩싸인 천마전을 일깨우는 발소리였다.

부드럽고 규칙적이었으며 또한 묵직한 소리.

더해 걸음걸음마다 파문처럼 퍼져나와 피부 위로 닿는 내력은 웅혼함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위광천은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엔 검신이 새까만 검을 꼬나쥔 채로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목리원이 있었다.

*

평생을 중원에서 살아 백도 무림인으로 성장해온 목리원은 마교의 풍경을 볼 일이 없었다.

사실상 이번이 첫 마교의 방문, 이곳의 문화, 복식, 건축 양식이 중원과 다름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무렴, 어찌 만 리도 넘게 떨어져 있는 무한과 이곳의 문화가 같겠는가.

하나, 그런 목리원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질적인 것이 천마전에 있었다.

“그 벽이오? 환각을 일으킨게.”

천마전 태사의 너머에는 웬 건축물 크기만한 거대한 판이 걸려 있었다.

정팔각형에 위로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진 수많은 글귀, 그리고 피로 새긴듯한 문양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다른 어떤 구조물과도 다른 양식, 분위기, 결정적으로 느껴지는 께름칙함.

지금 이 현상을 만든 것이 바로 저 판일 터였다.

목리원은 위광천을 노려봤다.

그는 목리원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단정한 모습이었다.

봉두난발이던 머리는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흑색의 곤룡포는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다만 달라지지 않은 점은 포악함을 품은 근육과 어딘가 흉포하게 일렁이는 눈빛.

그가 입술을 뗐다.

“이 자리 하나만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지. 마음에 들었나?”

“그다지.”

“네놈도 바라지 않았나. 나와의 생사결을.”

위광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인들은 진다. 피할 수 없는 전력 차가 있으니 불변할 명제다. 그렇다면 이 천마전엔 온갖 잡것들이 발을 들여 어지러움을 일게 했겠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자격 있는 도전자 외에, 이 성전에 도달할 수 있는 외인은 없어야만 하니까.”

그는 벽에 걸린 판을 바라봤다.

“자격의 증명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깨부수고 내 앞에 나타날 놈만이 천마전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예상대로 네놈이다. 결국 내 앞에 서는 것은.”

“칭찬으로 들어야 하오?”

“그래, 능히 그리해도 좋다.”

위광천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 목리원을 향했다.

너무나도 차분했다.

“질긴 악연이다. 네놈과는.”

목소리 또한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하늘의 뜻이 있기에 이런 인과가 완성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네놈과는 온갖 연유로 이어져 있었지.”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곤룡포가 흘러내렸다.

마기로 점철된 몸이 드러났다.

“언제나 생각했다. 고작 하늘의 뜻 따위에 휘둘려 이 자리에 선 나를 천마라 일컬을 수 있는가. 파천을 손에 쥘 재능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가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펴진 손은 이윽고,

“그르다.”

꽉 쥐어졌다.

쿠구구궁!

목리원의 숨이 멎었다.

이 순간 공간이 단절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기에.

위광천은 말했다.

“스스로 힘으로 손에 쥐어야만 힘이다.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 올라야만 진정 승천이다. 그러니 기대지 않겠다.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겠다. 온전한 내 의지만이 이곳에 있을 터다.”

변해가는 공기 속에서 목리원은 컥! 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마치 평생 몸에 들러붙어 있는 독소가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별이…!’

몸에서 벗어나고 있다.

정확히는 별과의 연결이 스러지고 있었다.

목리원은 아연한 기색으로 위광천을 올려다봤다.

그의 목적은 이윽고 밝혀졌다.

“승부다 목리원. 이곳에선 어떤 변명도 없다. 별의 우열과 외부의 세력 차도 없으며 또한 상호간의 전력 또한 능히 발휘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니 이곳에서 이긴 자가 진정 승자다.”

화아아악!

광포한 마기가 공간을 휩쓸었다.

위광천의 머리끝이 쭈뼛 섰다.

“강호 무림이라 하던가. 그래, 간악하고 병신같은 것들이지만 오로지 하나가 옳다.”

그의 흰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강자존, 승자독식. 오로지 승자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음이다.”

목리원은 긴장을 더했다.

하며 비아냥대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글쎄, 암만 나를 이겨봐야 이미 마교는 몰락한 것 아니오?”

그에 위광천이 답하길,

“틀렸다. 목리원.”

“…?”

“마인은 패해도 천마는 패하지 않는다. 또한, 천마가 패하지 않는다면 신교는 패한 것이 아니다.”

그가 태사의에서부터 걸어 내려왔다.

“천마가 곧 신교이기 때문이다.”

소용돌이치듯 솟아오르는 마기를 두르며 위광천이 기수식을 취했다.

목리원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실되었으며, 그는 이 한순간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음을.

필사의 의지.

무인으로서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리해서도 안 된다.

하나 더 이르러 그의 말이 옳다.

강호를 이르는 법칙은 강자존이며 승자독식이다.

기나긴 악연의 매듭을 짓기에 이곳은 썩 좋은 자리였다.

목리원 또한 물러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툭!

흑야를 땅에 내려두었다.

목리원이 뽑아 드는 것은 성운이었다.

기수식을 취했다.

그는 그리하며 말했다.

“성련문주, 묵룡(墨龍) 목리원이오.”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남는 이가 그 이름을 기억하리라.

위광천은 나지막이 답했다.

“…위광천.”

그의 근육이 부풀었다.

“광마(狂魔) 위광천이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있어선 안 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꽈아아아앙!

유폐된 공간이 일순 어그러졌다.

*

쿠구구궁!

천마신교 전체를 울리는 진동이었다.

단지선은 천마전을 바라봤다.

‘…시작되었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목리원이 저곳으로 향한 직후 천마전 주변으로 알 수 없는 벽이 생겨났다.

실제로 진동이 울려오는 지금까지 겉으로 보이는 천마전은 그대로인 것을 생각하면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작게 걱정이 차올랐다.

단지선은 어찌 저것을 파훼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 순간이었다.

“음?”

남궁진천이 나타났다.

단지선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치?”

“비실이군. 깨어 있었나.”

그는 무던하게 말하곤 한마디를 더했다.

“끝을 볼 때인 듯하다. 진동에서 충돌이 느껴진다.”

어찌 그런 것을 아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침 그가 나타났으니 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눠야한다는 생각에.

“마침 잘 되었습니다. 검치 대협, 저 장벽을 부술 방법을….”

“하지마라.”

“…예?”

“팔뚝 굵기만큼이나 남성성도 모자란 놈이군. 하지 말라고 했다.”

대뜸 시비를 거는 것에 단지선이 표정을 찌푸렸으나, 남궁진천은 고요한 얼굴로 천마전을 바라봤다.

“싸워야만 할 때가 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연이 있다.”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놈은 안 진다. 묵룡을 잡을 건 이 남궁진천이니까.”

조금의 의심도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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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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