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09화 (309/334)

EP.310 이부 십삼장 - 십만대산, 척후 (1)

* * *

깨달음이란 것은 대부분 거창한 진리의 깨우침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인지의 변화, 그로부터 뻗어 나와 사고관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상, 지식의 변화를 일컬어 깨달음이라 칭하는 것이다.

남들이야 어찌 생각할지 모를 일이지만 목리원에겐 그랬다.

또한 곽칠과의 대화는 그런 깨달음의 선상에서 목리원의 사고관에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의로워라.’

이미 아는 명제일진대 그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고민하여 스스로의 변화를 반추하게 된다.

쌓아 올린 힘만큼 차올랐던 오만을 덜어내고,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며 알게 된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고찰에 힘쓴다.

그런 어느 순간에서야 조금이나마 알게 되니.

‘아직 멀었구나.’

너무 오만했다.

아직 깨달음과 무의 끝을 이르기엔 너무 낮은 곳에 있었다.

목리원은 그제야 명상을 끝내고 눈을 떴다.

딱히 기도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검술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자신이 이른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길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연무장을 나섰다.

때는 한 해가 기울어 잠드는 겨울.

전쟁이 시작되면 이 냉기가 피의 열기를 조금은 식혀줄까.

스산한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

신강행은 빠르게 진행됐다.

일견 조급하다 할 수 있는 판단이겠으나, 이미 전쟁을 선포한 시점에서 시일을 더 늘려봐야 적측에 말미를 주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선두는 무림맹.

구파일방과 세가가 날개를 펼쳐 중원의 주요 전력이 모두 신강으로 향했다.

본적이 감숙과 청해 쪽인 문파들은 그곳에서 합류해 대열의 크기를 키웠다.

결국 넘어서는 경계는 청해다.

7년 전 전쟁의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맹이 펼치는 진은 7년 전의 그것과 같았고, 그리하면서도 전략적인 주요점을 달리하여 실수를 보완했다.

그렇게 신강의 경계.

백도 무림 측의 막사가 지어졌다.

척후는 이미 움직여 십만대산 주변을 정찰하기 시작했고 본대는 한참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 한가운데였다.

“묵룡 대협.”

내각의 인물이 목리원을 찾아왔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음?”

“맹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목리원은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맹주의 막사를 찾았다.

그곳은 전열의 중앙이었다.

주변부터 삼엄했다.

맹의 주전력인 내각이 사방을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고, 견궐의 기는 그 한가운데 총 지휘부 막사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목리원이 근처로 다가가자 내각의 무인이 천막을 열었다.

안쪽엔 각 대문파의 장로들과 견궐이 있었다.

“왔는가.”

“예,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시선이 쏟아지는 와중 목리원은 물었다.

견궐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도 한 곳을 가리켰다.

“자네가 척후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네.”

“척후라면….”

“먼저 출발했던 정찰대와의 연통이 끊겼네.”

“…!”

목리원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그의 말이 뜻하는 바는 꽤나 명확했으므로.

“…당했단 말입니까?”

“그리 추정 중이네. 희망을 갖고 싶지만… 썩 그리하기 좋은 상황은 아니네.”

하기야 그렇겠지.

맹에서 이번 전쟁을 대비해온 세월이 7년이다.

거기에 척후는 본격적으로 전운이 감돌기 전, 지난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피와 살을 깎는 맹훈련을 해온 부대다.

그들의 연락망에 첫날부터 구멍이 났다.

가장 그럴싸한 추론은 역시 척후가 당했다는 쪽이다.

목리원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전쟁의 첫 피해자.

문득 차오르려는 동정을 꾹 눌러야만 했다.

그들은 그런 값싼 동정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니.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십만대산의 초입, 그곳의 경계를 파악해주게. 혹 주요 전력이나 함정이 배치되어 있다면 암살해주면 고맙겠네.”

상대가 어찌 나올지 모르는 만큼, 잠입할 병력으로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 자신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목리원이 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알게….”

“그리고 함께 갈 인원이 세 명 더 있네.”

“…예?”

“나오시게.”

말하자 남궁진천과 제갈산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남궁형? 제갈형도…?”

“자네들은 백도 무림의 미래네. 조금이라도 생존 가능성을 올리기 위해선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되었네. 잘 부탁하네 목아우.”

“발목이나 잡지 마라.”

든든하면서도 걱정이 차오른다.

와중 목리원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셋이라 하지 않았소?”

“셋 맞네.”

견궐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제야 보인 사람이 있었다.

“살성님!”

“흘흘, 오랜만이구나.”

살성 염소소가 견궐의 뒤에 숨어있었다.

견궐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아마 염소소가 자신을 놀래켜주기 위해 이런 장난을 꾸민 것일 터.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에 목리원의 속에 긴장이 조금 가셨다.

“살성님이 저희를 이끄시는 겁니까?”

“이끈다고 할 것까지 무에 있느냐. 이제 너희들이 나보다 무력이 낮지도 않을진대.”

사실이었다.

이제 목리원은 염소소와 비무를 한다면 열 번중 일곱 번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정도로 성장했고, 그는 남궁진천도 마찬가지였다.

“발목이나 잡지 마라. 늙은이.”

“저놈은 주둥이를 분질러버려야 할 텐데.”

…자신감이 과한 듯하다.

대문파의 주인들도 난색을 표하며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이 와중에도 뻔뻔한 낯짝을 하고 있는 남궁진천의 담은 칭찬해야 하는 걸까.

“경거망동하지 말라.”

그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 검왕 남궁혁이 말했다.

“사실을 말하는 일에도 고민이 필요한 순간은 있다.”

…물론 그도 남궁진천이 염소소를 이긴다는 전제로 말하고 있었다.

염소소가 뒷골이 확 당긴다는 듯 멍한 얼굴로 남궁혁을 노려봤다.

“저 미친 노망난 늙은이가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하는구나.”

“자신 있으면 비무해봐라. 내 손자랑.”

“…사설은 후에 하시오.”

견궐의 일축에 그제야 분위기가 진정됐다.

그는 그 순간 10년은 늙은 얼굴이 되었다.

“그만 해산하시오.”

자리는 그렇게 파해졌다.

*

만 단위의 병력이 기거하는 막사는 그 크기도 엄청나다.

당연 소속과 소속 간 막사의 거리도 예사 범위를 넘어있었고, 그런 만큼 목리원이 당화서와 당문의 막사로 가는 길도 꽤 멀었다.

와중 느낀 사실은 이 와중에도 머쓱함은 있다는 것이다.

죄다 무림인, 즉 자신과 당화서의 관계를 아는 이들이 이리도 많은 와중 그녀와 함께 당문의 막사로 가니 시선이 따라붙는 게 아닌가.

괜한 부끄러움이 차올라 정면만 걷길 한참.

그런 것들을 견디며 도착한 목리원은 당화서와 회의의 내용을 복기했다.

주로 그녀의 조언이었다.

“살성님이 계시니 큰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특히 검치놈. 그놈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장난스러운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라 우습고 슬펐다.

당화서는 용봉단의 단장이던 시절을 회고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 인간은 전쟁의 흐름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 앞에 적이 있으면 싸워야 하고, 숨을 바에 정면에서 적을 유인한다는 발상을 하지요.”

“…나도 익히 알고 있소.”

“아니, 목 소협은 모릅니다. 다루는 입장에서 그가 얼마나 까다로울지는 다뤄본 사람만 압니다.”

진절머리를 치는데 하나하나가 뼈에 새겨지는 조언이었다.

당화서의 조언은 이어졌다.

“그나마 제갈놈이 있는 건 다행이군요. 다른 건 몰라도 작전에서만큼은 확실히 제 몫 이상을 하니.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혹여 판단에 의문이 든다면 꼭 제갈놈에게 물어야 합니다. 머리가 비상한 놈이니 절대 놀게 두어선 안 될 터입니다. 또….”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조언의 끝은 그랬다.

당화서는 결국 한숨을 쉬며 목리원의 손을 꼭 붙잡았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적은 마교입니다. 목 소협의 무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적들 또한 그만큼 강함을 언제나 속에….”

“소저.”

목리원은 당화서의 말을 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게 웃으며 말하니.

“걱정일랑 마시오. 약속했잖소? 모든 일이 끝나면 함께 서역에 가보기로.”

당화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곤 목리원을 끌어안았다.

“잘 다녀오십시오. 저는 이곳에서 저 나름의 싸움을 할테니.”

“그리하리다.”

온기를 나눌 순간은 길지 않았다.

출발은 당장 오늘 해가 저물어 고요해지는 한밤중.

지금은 아주 짧은 휴식이었다.

*

그렇게 해질 무렵.

“왔느냐.”

염소소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제갈산은 이미 도착해있었고, 남궁진천은 아직이었다.

염소소의 심기가 꽤 불편해보였다.

하기야 낮의 회의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일까.

목리원은 노파심에 말했다.

“그, 살성님. 남궁형은….”

“되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도발에 넘어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은….

“늦었군. 미안하다.”

문득 남궁진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아이고 세상에.

목리원은 이마를 짚었다.

“남궁형, 꼴이 그게 뭐요?”

“무슨 일이지?”

남궁진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옷이 새파랬다.

잠행을 가는 사람 복장이, 아아주 새파랬다.

다음화 보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