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08화 (308/334)

EP.309 이부 십이장 - 인연, 깨달음 (2)

* * *

도착한 곳은 목리원이 잘 가지 않았던 방향의 객잔이었다.

그곳은 허름했고, 그럼에도 날 것의 활기가 있어 들뜨는 기분이 이는 객잔이었다.

“어서오십… 으헉?”

점소이가 접객을 하려던 중 목리원의 얼굴을 보곤 헛숨을 삼켰다.

그뿐만 아니었다.

객잔에서 술을 홀짝이던 몇몇 이들이 목리원을 알아보곤 쩌적 굳었다.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다는 점이 이리 불편할 때가 있었다.

“조용히 마시다 갈 생각이니 구석 자리로 안내해 주겠나?”

“예, 옙…!”

다행히 놀란 반응 이상의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곽칠을 비롯한 세 사람은 이 일련의 상황에 묘한 으쓱거림을 보였다.

그것이 참으로 유쾌하고도 머쓱해 목리원은 화제를 돌렸다.

“자, 그래서 이야기나 해봅시다. 곽 대협은 언제부터 무한에 계셨소? 있으셨으면 연락이라도 하시지.”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흘린 말이었다.

아무렴, 어린 시절 그리도 좋아했던 책의 저자이자 개인적 친분도 있는 사람일진대 연락 한 통 없는 것이 섭섭하지 않나.

곽칠은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답했다.

“사실 쓰고 있는 책이 있었소. 그걸 완성하면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재회할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일이 이리 되어버리지 않았소. 전쟁이 터졌지.”

“아….”

“미처 완성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만 하구려.”

7년 새 꽤 늙어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로 곽칠이 웃었다.

목리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무인으로 치면 경지를 이루고 세상을 나가고픈 마음이 아니겠소? 내 7년의 폐관도 그런 맥락이었소. 대협의 마음은 이해하오.”

“대협이라니… 말을 낮춰주시오.”

“하하, 그럴 순 없지. 가슴에 큰 협의를 품었다면 그 모든 이들이 대협인 것 아니겠소?”

곽칠의 얼굴 위로 감동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대화에서 소외된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조, 좋은 말씀이십니다!”

“역시 묵룡 대협은 달라도 다르시오!”

이 사람들이 오늘 왜 이리 기분을 띄워주려 할까.

손사래를 치니 마침 술과 음식이 나왔다.

목리원은 화제를 돌렸다.

“그간 살아온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그리고 이분도 소개 좀 받고. 아참, 세 사람이 만난 이야기도 꽤 궁금하구려. 내 이런 조합은 참 의외였던 터라.”

“그, 그것이 말입니다!”

물꼬를 튼 것은 견동이었다.

목리원은 싸구려 술을 안주 삼아 그들이 만난 이야기, 그리고 곽칠의 이야기나 왕삼의 이야기도 들으며 꽤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용봉단의 회식 자리도 즐겁지만… 가끔은 이런 순간이 각별할 때가 있었다.

이야기는 견동과 왕삼이 술에 절어 이성을 잃어갈 즘에야 끝났다.

“어휴, 이 못난 인간들.”

“아우들한테 너무한 것 아니오?”

“너무하기는, 대협도 참 사람이 좋구려.”

쯧쯧 혀를 차고 있지만 글쎄, 곽칠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언젠가 주변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았던 그를 생각해보면 보기 좋은 변화였다.

“남은 잔은 저희끼리 나누도록 할까요.”

곽칠이 목리원의 잔을 채웠다.

목리원은 가만 그것을 받아들었고, 그렇게 술 한잔을 넘긴 참이다.

“한데 대협.”

“으음?”

“고민이라도 있으시오?”

덜컥, 목리원의 손끝이 떨렸다.

가만 곽칠을 바라보니 그는 사뭇 연륜이 묻어나는 지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넘겨짚었다면 미안하오. 하지만, 이 곽칠이 글쟁이가 아니오. 사람 관찰에는 도가 텄지. 더군다나 대협의 소식은 항상 이 견동이 놈에게 들었던 터라 오늘의 잔잔한 기색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었소. 뭔가 들은 것과는 다른 듯하여.”

목리원은 쓰게 웃었다.

하나, 다만 씁쓸함에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속 어딘가에 있는 것은 작은 기꺼움이었다.

꼭 토로하고 싶은 고민, 하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리원은 잔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말이오. 내 곽 대협께는 여쭐 수 있을 듯하오.”

“무엇을 말입니까?”

“협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협을 일러주었던, 꿈을 심어주었던 글의 저자에게.

어쩌면 이전에도 했을지 모르는 질문을.

“나는 말이오. 더 많은 이를 구하기 위해 휘두르는 검이 협이라 생각하오. 그런 이유로 앞으로 나아갔고, 이 자리까지 왔소.”

살아온 이야기를 구태여 다 할 필요는 없으리라.

“한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려. 이 검을 휘둘러 행사한 폭력이 진정 협의가 되려면 그로서 지켜지는 것이 있어야 하오. 집단과 집단도 마찬가지. 정마대전이 일어날 것이오. 우리는 신강으로 갈 것이고.”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여 목리원은 덧붙였다.

“피할 수 없는 전쟁, 그리고 평화를 위한 전쟁이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죽겠지.”

돌고 돌아 핵심을 말하니.

“누군가의 시체 위에 쌓아 올린 평화를 협의라 할 수 있겠소?”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목리원은 그 확신이 필요했다.

이미 몇 번이고 되새겨, 확신으로 나아가려던 길에 다시 한번 의심을 두른다.

그것이 진중함임을 알기에.

곽칠은 눈을 끔뻑였다.

목리원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였나?”

뒤늦게 머쓱해져 말을 삼켰으나, 곽칠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이야기지. 폭력과 정의가 어찌 같은 길을 갈 수 있는지. 그것이야말로 협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아니겠소.”

오늘 내도록 어딘가 허술한 모습을 보였던 곽칠이 지금만큼은 진중했다.

“내가 온전히 협을 규정할 수는 없소.”

“역시 그런….”

“하지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있소.”

“…음?”

곽칠이 껄껄 웃었다.

“나보다는 대협이 더욱 확실한 답을 알고 계시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 이전부터 말이오.”

목리원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곽칠이 느릿하게 말했다.

“협이란 그것을 품고 휘둘러 타인을 구하는 모든 행위를 이르는 말이오. 검에 국한해선 안 되는 것이지. 7년 전 대협은 내게 말했소. 당신의 붓이 날 구했다고. 그리고 나는 그 말에 구원받아 다시 글을 쓰게 되었소.”

곽칠이 목리원의 잔을 채웠다.

“나는 그날 되새겼소. 내가 이 글로서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싸구려 술의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마비될 듯 강렬함에도, 목리원은 그것에 취하지 못했다.

곽칠의 언어는 그만한 힘을 담고 있었다.

“전하고자 했소. 마음이 널리 퍼지길 바랐소. 간절한 바람이었소. 나의 글을 읽고 정의롭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누군가가 멍청하다 말하는 협의를 꿈이 아닌 현실로 이루고자 하기를. 그런 열망이 나의 붓을 움직이게 했소.”

곽칠이 잔을 들었다.

그의 눈빛은 문득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싫어했던, 이제야 사랑할 수 있게 된 마협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소. 협의를 품고자 한다면 모두가 의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

대협께서 알려주지 않았소?

곽칠은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목리원은 잠시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곤 자신의 언어로, 그의 뜻을 치환했다.

그 순간 목리원은 가슴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의로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곧 협의가 될 것이다.”

“그렇소.”

“그렇다면 전쟁에서 쓰러지는 이들은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전하는 것이겠지. 어떤 역경 속에서도 다만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대협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것이 정답이오.”

“그들을 동정하는 것은 오만이겠구려.”

“약자의 협의라 하여 뜻이 휘청거리진 않을 것이오.”

“뒤돌아 보는 것은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것이겠지.”

“스스로 협의를 이룰 수 없기에, 바람을 담아 같은 길을 가는 이의 등을 밀어주는 이들도 있을 것이오. 나의 붓이 그랬듯이.”

“그렇다면 나는 정말 헛된 고민을 하고 있었군.”

하하, 목리원이 웃었다.

점점 그 웃음소리가 커졌다.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느 순간 눈을 가렸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취해있었구나.’

강자존의 강호에 취해있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이상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품으려 했던 것은 힘이 아니었을진대, 힘조차 수단에 불과했을진대.

“기연이오.”

목리원은 잔을 비웠다.

크으! 만개한 미소로 일어나 곽칠에게 포권을 취했다.

“내 오늘 기연을 만났소.”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말하자, 곽칠도 잔을 비우곤 껄껄 웃으며 일어났다.

그가 포권을 취했다.

“영광으로 알겠소.”

목리원은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스쳐 지나가는 깨달음을 잡아채기 위한 명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또 만나지. 내 다시 돌아오는 그날.”

“그렇다면 대협, 돌아온 날 내게 대협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소?”

“음?”

곽칠은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강렬한 열망을 담아 말했다.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소. 그에 대협의 일생을 담고 싶소. 나는 나의 마지막 글로써 나를 구원해준 협의를 말하고 싶소.”

잔잔하게, 멋쩍고 낯부끄러운 말을 내뱉은 곽칠은 끝끝내 답을 기다렸다.

목리원은 문득 설렘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책의 첫 독자는 내게 되어야겠구려.”

꿈이었던 협객들의 열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니 그보다 영광된 것이 있겠는가.

“꼭 돌아와 전하겠소.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길었던 마교와의 악연이 끝맺는 순간의 이야기를.”

그렇게 목리원은 돌아섰다.

그의 눈동자에 정광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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