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87화 (287/334)

EP.288 이부 팔장 - 감숙, 해후 (6)

* * *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분위기가 침잠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고, 그것보다 목리원에겐 많은 심적 동질감을 주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목선오가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죄송한 스승을 두었다는 점에서 목리원은 백경오에게 더욱 진한 친밀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정자의 침묵을 깨기 위해 우선자가 입을 열었다.

화제의 전환이었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군요. 그럼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 그래야지. 알겠소.”

“마교의 침입 경로를 파악하는 일 탓에 오신 게지요?”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빠르게 추스른 채였다.

감상적인 것은 백경오를 만나서 해도 될 일이기에.

“맹에서는 지난 천하상단의 일례를 들어 마교가 중원에 이미 뿌리를 내린 다른 집단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소. 혹 근 7년 사이에 빠르게 세를 불린 집단이 없소? 상단이나 문파, 혹은 장원 따위도 포함이오.”

“7년 사이라….”

우선자가 턱을 쓸었다.

그 끝에 하는 일은 고개를 휘휘 젓는 것이었다.

“딱히 짚이는 것은 없군요. 감숙 땅이 중원의 다른 지방에 비해 워낙 정적인 곳이라 큰 변화가 잘 일지 않습니다. 세가 커다란 집단은 몇 십년 째 그대로지요.”

“흐음, 그렇소?”

그렇다면 대관절 패웅추는 어찌 그 마인들을 이끌고 하남까지 몰래 들어왔단 말인가.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순간이었다.

“단주님!!!”

저 멀리서 헐레벌떡 남궁소아가 뛰어왔다.

그 뒤로 언혁과 강서휘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 되어있었다.

“무슨 일이냐?”

“큰 일 났어요! 백경오 그놈이 사라졌다고요!”

벌떡!

목리원과 우선자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더 자세히 말해 주시오!”

우선자의 말이었다.

목소리가 사뭇 다급했다.

남궁소아는 후욱 숨을 내뱉어 정리하곤 한껏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게, 그놈이 잠시 주변 좀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곤 사라졌거든요. 어느 방향으로 간지는 알고 있어서 나중에 뒤따라갔죠. 그런데….”

차마 남궁소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뒤이어 설명을 이은 것은 강서휘였다.

“웬 암자에 자기 칼까지 버려둔 채로 사라졌어요. 단원들끼리 나눠서 찾아봤는데 보이지도 않고.”

“그 암자가 어디에 있던 것이오?”

“저기 골짜기요.”

“아….”

우선자의 표정이 흐려졌다.

목리원도 대충 그 암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우존자께서 생전 지내셨던 암자요?”

“예, 그렇습니다.”

그저 실종이라기엔 검을 버려두고 갔다는 것이 꽤 의미심장하다.

그 정도로 급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게 맞겠지.

“다들 진정하거라. 경오가 그리 쉽게 당할 아이더냐.”

말하며 목리원은 기파를 넓게 펼쳤다.

“혹시 모르니 나는 경오를 찾으러 가마. 장문인, 공동의 경비를 강화해주시오. 너희들은 경오가 돌아올 걸 대비해서 이곳에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퉁! 답도 듣지 않고 목리원은 경공을 발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성련이 울었다.

*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놈이다.

아무렴 금선우라는 이름 석 자, 그놈의 기질, 행동, 끝에서 맺은 파멸을 생각해보면 백경오의 인생에서 우존자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상대가 바로 그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후회한 일이 있었다.

그때 끝까지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우존자에게 사실을 말하고 미리 도움을 청했으면 어땠을까, 그도 아니라면 우존자 대신 자신의 단전을 폐했다면 어땠을까.

의미 없는 가정.

그것이 곧 후회의 본질이었다.

그렇기에 백경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답이 나오지 않은 가정을 끊임없이 이어간 삶인 만큼, 어쩌면 이제는 그 답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열망마저 그의 속에 자리해 있던 것이다.

금선우가 지정한 자리는 공동산에서 조금 떨어진 산지의 한 모옥이었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백경오는 눈을 좁히며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 사람 하나가 겨우 생활할 만한 작은 모옥.

모옥에 생활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 기척은 느껴진다.

“왔네? 진짜로.”

그르륵, 가래가 끓는 목소리였다.

모옥의 문이 열리며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금선우.”

“백경오. 반푼이 떨거지 백경오. 진짜 왔어.”

그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정갈하게 정리해 틀어 올린 채였고 허리춤엔 검을 매달고 있었다.

자라며 이목구비의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멀끔한 행색은 그 시절을 문득 떠오르게 한다.

“잘 살아있었군.”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되었을 줄로 알았건만 멀쩡한 꼴이다.

하물며 검까지 차고 있는 것을 보니 무공을 아예 놓지도 않은 듯했다.

외공을 연마한 걸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몸이 썩 단단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얼까.

사실, 불온한 추측에 가까운 답이 이미 백경오의 속에 있었다.

“너였구나. 연락책.”

기분 나쁜 끈적함이 피부 위로 닿는다.

마기였다.

“뭐 어쩌라고.”

스릉―

금선우가 검을 뽑아들었다.

“너 때문이잖아. 이 새끼야. 네가 내 단전을 망가뜨려서 내가 이렇게 된 거잖아.”

히죽 그가 웃음을 짓자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검붉은 기운이 그의 몸 위로 샘솟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하다.’

마공으로 부서진 단전을 봉합한 것일 터.

금선우의 기세는 적어도 절정 이상은 확실히 넘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생각했지.”

금선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왜 너 같은 새끼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어야 해? 부모도 없는 고아 새끼, 운 좋아 우존자의 눈에 든 병신 새끼, 초식도 못 쓰는 반푼이 새끼. 그런 새끼 때문에 내 인생이 왜 망가져야 하냐고.”

“….”

“고민했지. 그리고 감내하려고도 해봤어. 그래, 뭐가 됐든 내 잘못이 아주 없진 않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게 잘 안 되더라.”

금선우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광룡 백경오. 이번 기수의 최강. 투천성을 타고난 기재. 그 따위 평가가 내 귀에 계속 꽂혀. 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병신이 된 사람이 몇인데 너만 잘 사는 게 아니꼬워 미쳐버릴 것 같다고!”

쿵!

금선우의 기세가 크게 흔들렸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그를 감싼 기파 또한 이질적인 포악함을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 끝내려고. 마침 마교가 거래를 제안해왔거든. 이 무공, 그리고 지위, 또… 아무튼 좀 많았지. 하여튼 좋아. 이거라면 너 하나정도는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눈빛이 번들거린다.

이성적이진 않았다. 짐승의 포악함은 달리 말해 치기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경오는 탄식했다.

“할 말은 그게 끝이냐?”

어쩌면, 그 지난 세월의 답을 이놈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슨 답을 원한 것인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속의 답답함을 풀고 싶다는 생각만을 떠올렸다.

하지만 역시 목적지가 없는 여정의 끝은 표류일 뿐이었다.

그에게선 무엇도 얻을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원망과 증오를 쏟아내는 상대를 보는 중에도 감정은 철저히 무심함만을 띄워 내고 있었다.

그에게 어떤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하나 꼽으라면 추악하게 영락한 과거의 악몽이 한심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란 거겠지.”

우존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또 다른 죄인이다.

그래 놓고, 그런 거목의 목줄을 뒤틀어놓고도 이리 형편없는 모습이란 것에 실망감이 치솟는다.

함께 차오르는 것은 죄책감이었다.

‘이딴 놈한테….’

우존자가 죽게 만들었다.

그 사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감정의 범람과 동시에 기파가 백경오의 몸을 거칠게 휘감았다.

“빨리 끝내자.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백경오가 차갑게 말했다.

금선우가 끅끅 웃었다.

“그래, 끝내보자고.”

직후였다.

콰아아아앙!!!

어느새 코앞에 나타난 금선우가 백경오에게 검을 휘둘렀다.

백경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묵직함, 그리고 날카로움, 그것을 담은 형상은.

“익숙하지 않나?”

“…복마검법?”

공동의 절기인 복마검법이다.

그걸, 마인이 되어 쓰고 있었다.

툭, 금선우가 검을 놓았다.

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초식이지만 백경오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 초식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칠상권! 맞아보니까 어떠냐!”

“너…!”

“그 잘난 우존자한테 배운 거야. 안 까먹고 있었거든.”

금선우의 주먹이 백경오의 배에 닿았다.

투확!

내장이 진탕 당했다.

금선우가 마기에 취해 말했다.

“병신, 넌 이렇게 것도 못 쓰면서 왜 그 밑에 빌붙어 있었어?”

끅끅 가쁜 숨을 흘리면서도 백경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눈빛에 맺히기 시작하는 것은 분노였다.

-칠상권은 악독한 이들을 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권이다! 그러니 경오야! 그 마음만 기억해라! 초식은 어설퍼도 된다! 아니! 몰라도 된다! 그저 악인 앞에서 당당하게 주먹을 내지른다면 그것이 바로 칠상권이다!

기억 속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순간.

“너, 그게 뭔 줄은 알고 쓰는 거냐.”

투천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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