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7 칠장 - 절연, 인연 (4)
* * *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이 각자의 색채와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던가.
옳은 말이다. 시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냄새, 청각, 맛 따위도 누군가는 그것을 색채로 표현하는 걸 보면 그 비유에 이견은 없으리라.
조금 더 개념을 확장해보면 그러했다.
이따금씩 그것의 빛깔이 너무나도 은밀하여 구분할 수 없는 색채를 가진 것도 있었다.
목리원만이 볼 수 있는 별의 색채 또한 그랬다.
검푸른 고독의 색.
그가 보기에 지금 제갈산의 몸을 휘감은 채 그의 몸 위에 붙은 부적을 갉아먹는 것은 그런 색이었다.
목리원은 무심코 물었다.
“언제부터요?”
“음?”
“언제부터 그런 것이오? 그 별이 언제부터 제갈 형을 그리 좀먹었느냔 말이오.”
되새기는 것은 지난 청룡비무회다.
그때까지 제갈산의 별은 저리 깊게 그를 잠식하고 있지 않았다.
완벽한 평형이라 말할 수는 없었으나 또한 어느 정도의 균형은 맞추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어찌 한눈에 보일 정도로 지독하게 날뛰고 있느냔 말이다.
묻는 말에 제갈산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바로 알아봐주는구만.”
“묻잖소. 언제부터였소?”
“얼마 안 됐네. 슬슬 버티기 힘들어진 것은 한 일주일 정도.”
그 말은 전조는 훨씬 전부터 있었다는 말이 된다.
목리원은 문득 울컥 속에서 분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말하지 않았소. 청룡 비무회 때도 느끼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네.”
“정말 그런 이유가 맞소?”
“그럼 달리 이유가 뭐 있겠나.”
제갈산이 싱긋 미소 지었다.
“목 아우, 그리 타박하지 마시게. 나도 힘들어.”
이 순간까지도 이리 장난스러우려고만 하는 건가.
속이 다 상하는 기분에 노려보자 제갈산이 이어 말했다.
“부탁이 있네. 나를 이 상태로 세가 밖에 보내주게. 가문이 알아선 안 돼. 그들은 내가 아직 이곳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거든.”
“왜 그래야 하오.”
“별이 그것을 원하니까.”
“…!”
“그놈은 내가 외롭길 바라거든.”
껄껄 웃음 짓고 있으나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미소는 참으로 텅 비어 있었다.
목리원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제갈산은 말했다.
“날 찾으려고 하는 이가 있어선 안 되네. 나는 이곳 가주전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어야만 해.”
“내가 거절한다면?”
“누군가 죽겠군. 그게 나는 아닐 걸세. 어쩌면 저 밖에서 떨고 있는 제갈 가의 무인들일수도 있겠고, 아버지일 수도 있겠고 숙부일 수도 있겠어.”
“제갈 형!”
“그게 아니라면 우리 목아우…는 너무 강하니 누님일 수도 있겠네.”
목리원은 흠칫 몸을 떨었다.
겁먹은 것이 아니다.
본디 참 눈치가 좋은 제갈산일진대 그가 저리 실례되는 말을 하는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리해야 할 정도로 몰려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부탁하네.”
“….”
다시금 그의 모습을 살핀다.
어디서 구한 부적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저것이 별의 기운을 틀어막아주고 있긴 했다.
하나 그것이 유익한 방향은 아니었다.
마치 물이 가득 들어찬 독에 새로운 물을 들이붓는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저것도 한계에 봉착하는 때가 분명히 올 테고, 그때의 반동은 제갈산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되돌아올 터였다.
‘성련은….’
아직 길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까.
애초에 신공으로 별을 가르는 일에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몇 존재했다.
그 별의 진의를 마주하는 것, 별이 무너뜨린 주인의 생을 돌아보는 것, 또는 그것에 저항하는 주인의 의지를 마주하는 것.
제갈산은 셋 중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당장 목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었다.
“…생각해둔 곳은 있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마련해둔 비처가 있긴 하네.”
“일단 그리로 가지.”
목리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두고 볼 수 없으니 뭐라도 돕긴 해야겠지.
제갈산의 몸을 의자에 묶어둔 밧줄만 풀고 점혈을 찍어 그의 움직임을 봉했다.
입만 겨우 벙긋할 수 있게된 제갈산은 안도의 숨을 흘리며 말했다.
“고맙네.”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겠소.”
목리원은 제갈산의 말을 그리 일축하고 가주전 창문을 뛰어넘었다.
*
제갈산이 일러준 장소는 호북에서 북으로 더 이동하면 있는 하남 어딘가 산골의 작은 모옥이었다.
이동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떠나오기 전 이미 목리원이 따로 제갈가에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의사를 전해둔 터라 추격자도 달리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 모옥에 제갈산을 눕힌 시점이었다.
“한데 그 부적은 언제까지 붙이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아, 이거 말인가? 사실 이제는 떼어도 되지 않나 싶네.”
제갈산이 불편하다는 듯 후후 숨을 불어 이마에 붙인 부적을 날렸다.
툭 부적 하나가 떨어지자 별의 발악이 조금 더 심해졌다가, 이내 차츰 가라앉았다.
대체 저게 무슨 꼴인지.
그리고 정말 제갈가를 떠나왔다고 곧장 괜찮아지는 건 뭔지.
별이라는 족속은 하여튼 그 옹졸함이 이리 지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와중이었다.
“아휴, 이놈의 부적 때문에 씻지도 못해 죽는 줄 알았네. 이제 좀 살겠어.”
제갈산이 킥킥대며 남은 부적을 다 떼어냈다.
목리원은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부적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한데 특이하구려. 별을 억제하는 부적이라니. 이런 건 어디서 구하셨소?”
“음? 아, 이 얘기를 안 했군. 요새 백련교가 극성이지 않나? 그놈들이 호북에도 있었네. 대체 뭐하는 놈들인가 싶어 찾아갔더니 웬걸, 이 부적을 건네주길래 받아왔지.”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는 이름이 나온 것도 나온 것임에, 그들이 제갈산에게 부적을 쥐여준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움이 떠오른 것이다.
혹시 단지선일까.
목리원은 궁금증이 도져 물었다.
“부적을 건네준 이의 인상착의를 아시오?”
“빼빼말라 곧 죽을 것 같은 사내였네. 음, 잠시만.”
제갈산의 눈을 좁히며 목리원을 훑었다.
“…목아우랑 조금 닮은 것 같기도?”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닌가? 흠, 잘 모르겠네. 그 인간이 워낙에 시체 같은 꼴이어서.”
여하튼 단지선을 만난 건 확실한 듯하다.
목리원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헤어지고 어딜 갔나 했더니 곧장 제갈산을 찾아간 듯했다.
하기야 백련교가 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니 크게 놀랄 것은 또 아니었다.
목리원은 생각을 털어냈다.
이 일이야 언젠가 단지선을 다시 만나 물으면 될 것이었으니.
“목아우도 그 인간을 아나?”
“알긴 하오. 사천에서 만났거든. 아니, 그보다 제갈형 얘기나 좀 합시다.”
목리원이 자리에 정좌하고 앉아 제갈산을 노려봤다.
안 씻었다는 말이 정말인지 꼬질꼬질한 행색. 그리고 생글생글 웃는 낯.
“이제부터 어찌할 것이오. 그놈의 별을 핑계로 평생 숨어다닐 수는 없는 법 아니오.”
“음, 어찌한다라….”
제갈산은 턱을 쓸었다.
그러다 덜컥 웃으며 말했다.
“어쩌겠나. 일단은 돌아다녀 봐야지.”
“…응?”
“그래서 말인데 목아우.”
제갈산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왜인지 불안해지는 와중.
“우리 오랜만에 옛 추억이나 되새길 겸 유랑을 나가보지 않겠나?”
목리원은 허탈함을 느꼈다.
“…제갈형, 지금 심각한 상황인 건 아시오?”
“뭐 어떤가. 잠시 외유나 하자는 건데.”
“나는 맹 소속이오.”
“휴가라 하지 않았나?”
“곧 끝나오.”
“며칠 더 늦는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것이네. 아니, 애초에 자네가 초월의 무인인데 뭐가 걱정인가?”
“그렇지만….”
“에잇!”
찰싹!
제갈산이 목리원의 등을 때렸다.
“나와보시게! 이 근처부터 돌아다녀볼 생각이니.”
뭐라고 해야 할까.
“…제갈 형, 일이 많이 힘들었소?”
외유를 말하는 제갈산의 태도가 너무 신나 보였다.
*
한번 결심을 내린 제갈산은 좀처럼 막을 수 없는 막무가내의 기질이 있었다.
목리원도 그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정도였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히야! 역시 하남 땅이 정취가 있단 말이지!”
목리원은 제갈산에게 이끌려 털래털래 인근 마을까지 내려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제갈산이 걱정되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으나, 그는 그저 웃는 얼굴로 목리원을 마을의 객잔으로 이끌었다.
“이보시오. 점소이! 여기 화주 두 병만 주시오. 안줏거리는 숙수가 제일 잘하는 걸로 아무거나!”
“제, 제갈형….”
“낮술만큼 낭만 있는 게 또 어딨나.”
여전히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제갈산은 목리원의 걱정을 일축시켰다.
“일단 마시고 생각하세나.”
라고 말한 직후 얼마지나지 않아 화주 두 병과 주전부리가 식탁 위로 놓였다.
목리원은 한숨을 내쉬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게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왜 그러시오?”
제갈산의 시선이 창밖을 향해 있었다.
목리원은 의아함이 차올라 그곳을 바라봤다.
그 순간이었다.
“앗!”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객잔 맞은편의 포목점.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참으로 낯익었으므로.
‘저 사람은….’
7년 전, 안휘의 용봉지회 향할 적 제갈산을 처음 본 날 그와 함께 구출했던 어떤 장원의 미망인이었다.
그녀의 곁엔 막 대여섯살은 되어 보이는 여아가 꺄르륵 웃고 있었다.
목리원의 시선이 다시금 제갈산을 향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떤가. 잘 지내고 있어서 참 다행이지 않나?”
제갈산의 미소가 사뭇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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