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6 이부 육장 - 별과 뱀 (8)
* * *
교는 30년을 염과 함께 지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이 영산(靈山)이라 불리는 곳임을 알았고, 이곳이 수많은 영물이 한데 어우러져 영기를 나누는 공간임을 알았다.
염은 그 영물들의 우두머리였다.
우두머리라 해서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영물들 사이에 영역다툼을 중재하거나, 그들이 새로운 영물로서 새로운 단계를 나아갈 때 그 보조를 해주는 역할이 끝이다.
가장 최근에 염이 한 일은 20년 전 태양화리가 알을 낳는 일을 도운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염은 교에게 말했다.
“내가 승천하면 네가 이어서 이곳을 지켜줘.”
“그리하지.”
교는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는 법을 깨닫고 그녀와 같이 손과 발이 달린 인형을 취하고 있었다.
영물들의 우두머리 역할이야 크게 어려울 것이 없고 수행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있어야 함은 매한가지인 까닭이었다.
다만 답하면서 별개의 의문이 있던지라 교는 염에게 물었다.
“한데 왜 하필 인간의 형상이더냐.”
염은 50년간 단 한 번도 본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순백색 여인의 형상을 했고, 그것은 수행에 빠져있는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염은 답했다.
“가능성 때문이야. 아니? 인간은 참으로 비루하지만 개중엔 신선의 자격을 얻는 별종들이 한 번씩 튀어나온단다. 가장 최근에 신선이 된 이가 누구였더라… 음,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도인이었는데 말이야.”
인간은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그들에게도 배울 것이 있노라고.
그러니 섣불리 그들을 재단하여서는 안 된다고.
선계에 이르는 수행 속에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이무기였으니 그들을 삶 또한 능히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
교로서는 그다지 공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따금 영산 근처를 지나가는 인간은 너무 하잘 것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날이었다.
염이 잔망스럽게 웃으며 ‘검술’을 가르쳐준 날이.
“수행의 일환이야. 한 번 배워보자.”
수행이란 말에 교는 군말없이 따랐다.
그녀는 비늘 몇 개를 뽑아 검으로 다듬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을 날카롭게 벼려 절삭력을 높이는 법을 가르쳤고, 영기를 이용해 검과 교감하는 법을 가르쳤다.
“대련이야.”
라고 말한 염은 그날 개를 두들겨 패듯 교를 두들겼다.
“큭…!”
“꺄하하!”
첫 패배였다. 아니, 일방적 폭력에 가까웠을지도 몰랐다.
교는 고통을 배웠다.
황망함이라는 감정을 배웠고, 짜증과 분노를 배웠다.
대련이랍시고 폭행을 일삼는 그녀가 영 보기에 고깝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승부욕이란 것이 생겼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참선하여 수행해야 하는 입장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도 염이 일부러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니 자연히 눈길은 사나워졌고, 그녀는 그런 교에게 말했다.
“무엇도 느껴보지 못하는 게 수행이 아니야. 많은 것을 느끼고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이지.”
어련하시겠나.
교는 그날로 검술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를 이기기 위함이었다.
염은 부추기듯 교를 가르쳤다.
참선의 와중 얻은 깨달음을 검술에 접목하여 전수했고, 그 토납법과 명상법, 검술과 의를 하나하나 풀어 설명했다.
교는 좋은 학생이었다.
그 모든 것을 습득하여 제 것으로 만드는데 20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채앵!
교와 염의 비무는 나날이 호각지세에 가까워졌고, 그럴수록 교의 속엔 성취감과 희열이 차올랐다.
염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좋은 선생인가봐. 어쩌면 승천한 이후엔 태자의 스승이 될지도 몰라.”
“우습지도 않다. 너는 나타태자를 가르칠 그릇은 못 된다.”
“왜? 너를 이렇게 잘 가르쳤잖아.”
“내가 뛰어난 까닭이다.”
“태자가 너보다 못났다는 소리야?”
“….”
“바보.”
염은 킥킥 하고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잎사귀의 속삭임과 닮아 고요하면서 나른했고, 아련하면서도 잔망스러웠다.
그에 연유 모를 번뇌가 교의 속에 자리했다.
그는 50년 뒤, 염이 자신을 떠나 승천하는 일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속내를 말할 수는 없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번뇌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을 끝낸 이무기는 용이 되어야 한다.
교는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알겠다.”
교는 번뇌를 다스릴 방법을 강구했다.
*
그런 날이 20년간 이어졌다.
교는 50세의 이무기가 되었고, 염은 950세의 이무기가 되었다.
그녀의 영기는 이제 거의 온전한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이따금씩 염은 가만 바위 위에 좌선하여 몇 주를 움직이지 않곤 했다.
세상과 하나가 되어 삼라만상의 법도를 읽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교는 더욱 짙은 번뇌를 느꼈다.
그녀가 멀어지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아.”
염은 언제나 탄식하며 눈을 떴다.
조금 슬픈 얼굴을 만들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교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있었어?”
“못 있을 이유는 뭔가.”
“잘 못 지낸 것 같아서.”
염은 쿡쿡 웃었다.
교는 속을 들킨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염은 구태여 그런 그를 더 괴롭히거나 하진 않았다.
“가자.”
그저 그리 말했을 뿐이다.
“갈 곳이 있어.”
“어디인가.”
“따라와 볼래?”
평소보다 기운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기에, 교는 염을 따라나섰다.
도착한 곳은 영산의 입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가 발견한 것은 갓난아이였다.
“으애애앵!”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본 순간 교는 당황했다.
“어떻게?”
영산에 이런 아이가 홀로 놓여있을 수 있는 건가.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영산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기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산을 둘러싼 신령스러운 기운은 본디 인간의 인지를 묘하게 뒤틀어 길을 흐리는 면이 있었다.
이 아이를 낳은 누군가가 있다 한들, 아이를 버리기 위해 이곳에 찾아올 수는 없단 말이다.
그에 의문이 차 염을 바라보자 그녀는 말했다.
“천기(天機).”
교의 몸이 우뚝 멎었다.
염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늘이 그리 정하셨으니 따라야지.”
그녀는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아 들었다.
교는 입술만 벙긋거리다 겨우 말을 토해냈다.
“불가하다. 영산은 영물들의 것. 혹여 이 인간이….”
“그 또한 하늘의 계획이 아니겠니.”
그녀는 고요히 발걸음을 영산으로 돌렸다.
교는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나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는 것이 용의 법도이기에.
“안 올 거야?”
“가겠다.”
지금도 생각하길, 이미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해방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보채지 마라.”
그때 아이를 줍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은 모를 일이었다.
*
“교님!”
아이는 부지런히 자랐다.
인간의 아이가 이리도 빨리 자라는 것이던가.
교는 어느새 아장아장 제 발로 걷게 된 사내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 크게 신경써준 것 같진 않은데 건강 상태가 좋다.
뺨은 포동포동했으며 잘 씻은 건지 피부도 뽀송뽀송했다.
눈은 얼굴의 반절은 될 정도로 커다랗고 동그랬는데, 그것이 교로 하여금 묘한 감상을 떠오르게 했다.
“제가 오늘 다섯 살이 되었대요!”
벌써 그리된 건가.
영물의 5년은 찰나와 같았기에 교는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그랬더냐.”
“네! 오늘은 염님이 제게 무술을 가르쳐주기로 했어요!”
기대감에 찬 얼굴로 외치는 아이의 모습에 교는 인상을 찌푸렸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처음 그녀에게 무술을 배우던 때의 일이었다.
폭력과 고통으로 점칠된 기억이다.
추억이라 할 만하나, 그다지 기껍진 않았다.
“내가 가르쳐주마.”
“우웅?”
“염보다 내가 더 잘 가르친다.”
실제로 교는 자신이 있었다.
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아이를 가르치기에 염의 수업은 너무 난폭했다.
교는 염보다 이성적이었고 합리적이었으며 또한 계획적이었다.
교는 이 아이를 훨씬 안전한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럼 교님한테 배우는 거예요?!”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부담스러웠으나 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꺄르륵 웃은 아이가 이내 교에게 안겨 왔다.
교는 아이를 안아 든 채로 냇가를 향했다.
염은 그때야 만났다.
“응? 둘이서 뭐해?”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품에 먹을거리를 싸들고 있었다.
교는 괜히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이놈에게 검을 가르칠 것이다.”
“응? 내가 가르치기로 했는….”
“내가 한다.”
염이 끔뻑끔뻑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빵!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수긍했다.
“그래, 그럼 네가 해.”
교는 그녀의 그런 미소가 참 반가웠다.
근래들어 수심이 깊은 얼굴을 하는 일이 잦았던 지라 간만의 미소가 더욱 살갑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유를 따지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염님! 그건 뭐예요?!”
아이겠지.
염은 아이가 함께한 이후로 좀처럼 슬픈 표정을 짓는 일이 없어졌다.
“먹을 거지. 우리….”
염이 감자 하나를 아이의 품에 안겨주며 장난스레 말했다.
“…무백이가 먹을 감자.”
“와!”
이무백.
그리 이름 지어 준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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