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0 이십일장 - 고별,협 성련 (6) - [1부 완]
* * *
목선오를 염한 후로 일주일.
목리원은 비고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이른 새벽공기와 함께 명상을 시작한다.
간단하게 몸을 풀고 벽곡단 한 알, 이어 몸을 정갈히 하고 비고의 일지를 읽는다.
불완전한 초월을 완전하게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성련의 8성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심기체의 합일을 도모하며 경지를 넘어서야만 하는데, 본디 깨달음은 심과, 기, 그리고 체에 제각기 찾아오는 게 아닌가.
그 주기를 맞춰 초월에 이르는 것이 과제인 즉슨, 몰아치는 깨달음을 뒤로 미뤄둘 수도, 막힌 벽을 억지로 뚫을 수도 없는 현 상황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읽고 있는 것은 2대 문주인 백면수라 허양군의 일지였다.
꾹꾹 눌러쓴 필체에 그의 고뇌와 탄식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른 해결법 또한 기록되어 있었다.
『스승님처럼 초인적이지 못한 못난 제자 되어 결국 얕은 수를 썼으니, 그것이 바로 그릇을 닦는 일이었다.
한 번에 합일을 이룰 수 없어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체, 심, 기 순으로 육신을 닦고 마음을 정양한 뒤 다져진 그릇에 공력을 채웠다.
과정이 삐걱거렸으나 결과적으로 초월에 이르는 데는 성공했으니, 성련의 문주로서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라 자부함이다.』
목리원은 탄식을 흘렸다.
심기체의 합일로 고민함은 비슷했으나, 허양군이 초월에 이른 방법은 목리원이 사용하지 못하는 종류였다.
‘나는 기가 먼저 초월에 달해버렸다.’
그릇에 넘치는 공력이 이미 몸을 망가뜨리고 있으니 여유롭게 체와 심을 다듬을 수가 없다.
하여 다른 방법을 찾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역대 문주 중 기가 먼저 초월에 달한 사람은 없었다.
하나 알게 된 사실은 다름이 아니었다.
『마음을 정양하여 조급함을 쫓으니 심기체의 깨달음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리하니 후인이여, 조급해하지 말라.』
목선오는 심기체의 합일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파조사인 무검자 여성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뿌듯함, 그리고 못난 제자가 되었다는 송구함이 동시에 목리원의 마음속에 몰아쳤다.
감정에 매몰되자니 그것은 더욱 못난 일인 듯해 심신을 가라앉히길 한참.
‘곧 저녁이구나.’
목리원은 일지를 원래 자리에 돌려두고 동공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뚫린 천장으로 슬슬 별이 빛나는 게 보인다.
그 광경을 보며, 목리원은 오늘도 수확 없이 지나간 것에 옅은 안타까움을 띄워 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으음…?”
별자리의 모양새가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동공의 뚫려있는 구멍으로 들어오는 별의 위치가 꼭 어떤 형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것은….’
목리원이 아는 형상이었다.
‘…천살성.’
정확히 저런 형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심상 속에 빠져들어 성련의 별을 그려보자면 그 어딘가에 언제나 같은 형상으로 존재하던 살기 어린 별이 꼭 저런 형태였다.
직감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낸 형태가, 꼭 지금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의 형태와 같단 말이다.
쿵, 쿵.
목리원의 심장이 뛰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짙은 확신이 목리원의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성련신공은 개파조사 여성운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지어낸 신공이라 했다.
그리고 성련의 비고인 이곳에서, 뚫린 천장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별자리의 형상이 천살성의 형상이다.
목리원은 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뭔가 있다.’
목리원의 눈이 바삐 주변을 훑었다.
이 비고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묘소로 향하는 입구와 연무장으로 향하는 입구.
그리고 들어온 출입구였다.
각자 동, 남, 서 방향에 있다.
그렇다면….
‘북쪽.’
그곳은 유독 아무것도 없는 암벽이었다.
목리원은 조심스레 벽에 다가갔다.
그리고 암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으―
암벽이 흩어지며 문이 드러났다.
“…!”
목리원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고민이 있었고, 깨달음이 있었다.
‘…예비 되어 있던 것이다. 처음부터.’
언젠가, 제갈산이 흘리듯 건넨 말이 있었다.
-진법 중엔 특정한 날에만 발동되거나, 해주 되는 종류의 진법이 있다네.
-그런 신기한 진법이 있단 말이오?
-그렇네, 정확한 기전을 설명하자면 좀 많이 복잡하긴 한데, 여하튼 결론만 말해보자면 어떤 절기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한 영물의 소문이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은 대부분 영물이 있는 자리에 진법이 처져 있어, 그 진법이 해주되는 일정 시기에만 영물을 볼 수 있기에 생기는 소문이라네.
이 상황에 빗대어 보자면 그랬다.
‘대종사께서는 천살성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닐 터다.
이 비고를 만든 것도, 그리고 하필 천살성의 모양새를 아는 자만이 오늘을 의심해 진법의 비밀을 밝히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이 성련이라는 이름엔 목선오조차 모르는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들어가야 한다.’
이끌림이 있었다.
달칵, 목리원은 문을 열었다.
*
그곳은 밀실이었다.
암석을 반듯하게 깎아내린 벽, 그리고 작은 제단 위로 낡은 검 한자루와 서책이 존재하는 밀실.
단촐한 공간이었음에도 목리원은 눈을 떼지 못했다.
벽에 새겨진 별자리가, 그리도 목리원의 눈길을 사로잡은 까닭이다.
‘천살성이 있다.’
천살성 뿐만 아니다.
얼핏봐도 수십은 되어 보이는 별자리가 둥근 판 위에 따닥따닥 새겨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운명을 이르는 별자리였다.
천살(天殺)과 그 옆의 자미(紫微).
가장 높이 떠 있는 제왕(帝王)과 저 홀로 멀리 떨어진 절연(絶緣).
투천(鬪天), 파마(破魔), 궁기(窮氣) 그 외에 수많은 별이 모두 운명을 이르는 별이었다.
그것들이 어떤 절기에 나타나고 어떤 형상을 하는지, 한쪽 벽 가득 새겨져 있었다.
목리원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떠올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고이 모셔져 있는 서책을 향했다.
답이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성큼 다가가 서책을 들었다.
제목은 없었다.
다만, 그리 쓰여있었다.
‘…연자에게.’
인연이 닿은 자에게.
목리원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펼쳤다.
『이것은 성련의 진실된 뜻을 잇는 자가 언젠가는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나 여성운이 지은 일지다.』
그런 서두로 시작하는 서책이었다.
『별이 운명을 이끈다.
모든 이가 그리 말한다.
하여 거부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 사실이 심히 안타깝다.』
목리원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회고록이었다.
『자미(紫微)라 하였다.
세상이 나를 그리 말했다.
난세를 끝낼 영웅의 별, 혈겁을 끝낼 하나의 희망.
하지만 그런 말이 기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곧, 내가 끝내야 할 난세가 있음을 일컬었으니.
아니길 바랐다.
이 모든 것이 기우이길 바랐으나, 운명은 결국 나를 전장으로 이끌었다.
이 땅에 천살의 업을 진 사내가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이 이무백이었다.』
목리원의 눈이 떨렸다.
‘…천마.’
이무백은 천살성을 타고났던 3대 천마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이 대종사의 일지에서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목리원은 황급히 다음 장을 펼쳤다.
『막아야만 했다.
운명을 거부하겠다며 손 놓고 있었다간 살아있는 모든 생이 스러질 게 분명했으니.
하여 검을 쥐었고, 그를 맞닥뜨렸다.
그날 나는 이 별이 내리는 운명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깨달았다.
이리 회고하는 중에도 잊히지 않는 목소리가 있다.
죽여주시오.
이무백의 유언이었다.
그는 어떤 살겁도 원하지 않던, 다만 운명에 휘둘릴 뿐인 양민이었던 것이다.
그의 목을 베었으나 조금도 개운하지 않음에.
대관절 이 별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리도 휘두르나 싶은 번뇌에.
나는 하염없이 별자리를 바라봤고, 어느 날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저항할 수 없다면 차라리 포용하여라.
그들의 운명을 대신 짊어져 주리라.
하여 고된 운명에 슬퍼하는 이가 없길 바람이라.
그리하여 성련을 지었다.
이 잔혹하기만 한 운명을 한데 엮어 업을 대신 짊어지고자 하나의 구결을 엮었다.
이 일지는 그 구결과, 해석본이다.』
뒤이어지는 것은 어떤 심공의 짤막한 구결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주석이었다.
목리원의 오성은 그 주석이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꿰뚫어버렸다.
“아…!”
탄성이 일었다.
목선오가 이르길 하늘에 닿을 오성이라 평하던 목리원조차도 경악할 깊은 심계가 구결 속에 녹아있었다.
대체 이런 구결을 홀로 떠올리고 완성하는 일엔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일지를 끝까지 넘기자, 한 문장이 목리원에게 드리워졌다.
『연자여,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에서 허우적대는 이여.
또한 성련의 후인이여.』
그것이 이르니.
『부디 잔혹한 운명에서 그들을 건져다오.
내 못 이룬 업을 이어, 외로운 별자리들을 한데 엮어 그들을 해방해다오.』
목리원은 그제야, 성련신공의 진정한 공능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
서책이 끝났다.
낡은 검이 목리원의 시야에 가득 담겼다.
-원아, 성련은 별을 잇는 신공이란다.
목선오는 그리 말했다.
목리원은 그조차 몰랐던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낡은 검을 손에 쥐었다.
검은 너무나도 무거웠고, 시리도록 차가웠다.
여성운이 이른 대로, 그것은 꼭 별자리에 새겨진 운명의 무게와 같았다.
되새기게 되는 말이 있었다.
‘왜 저여야만 합니까.’
목리원의 생애에 한순간도 떨어져 본 일이 없는 의문이었다.
대체 무엇을 그리도 잘못하여 이리 지독한 천성을 지니고 태어났어야 하는지.
왜 하늘은 내게만 이리도 잔혹한 것인지.
암만 갈구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던 의문이었다.
하나 이제 목리원은 알았다.
아니,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목리원의 시선이 벽 한가득 새겨진 별자리를 향했다.
“…협객이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성련은 협객의 무학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감정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한다.
“그리고 협객은….”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리원의 입가에 금방이라도 스러질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제 알겠습니다.”
목리원은 검을 꼭 말아쥐고 밀실을 나왔다.
비고의 동공, 뚫린 천장 위로 살겁의 별이 목리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저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낡은 검을 들어, 그 끝으로 별을 겨냥했다.
사아아―
검붉은 기파가 목리원의 몸을 포악하게 휘감았다.
육신을 해하려 드는 것이다.
목리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성련의 진짜 구결 중 한 부분을 읊었다.
‘천지가 무심하여 인간을 다루지 않으니.’
쩌저적, 기파가 굳어지며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만 천지를 대신하기 위해 검을 들어.’
목리원이 진각을 밟자 굳어진 기파의 붉은빛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서 세우고자 하는 뜻을 일컬어 인의(人意).’
크게, 검을 휘두르자.
‘그리하여 행하는 업을 일러 협(俠).’
째애애앵―!
검붉은 기파가 산산조각나, 새로운 형상으로 가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협행(俠行)일지다.’
시리도록 아련한 묵색의 기파가 운무처럼 퍼져나가 비고를 감싸 안았다.
운무 속을 노니는 검이 밤하늘의 별빛을 반사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꼭 목리원의 속에 추억으로 남은 스승의 검무를 닮아 있었다.
목리원의 미소가 짙어졌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차오르는 충만함에 어느 순간 웃음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진정으로 시작된 검무가 연신 이어진다.
그렇게, 목리원은 7년의 세월을 베어냈다.
천살검협 1부 <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생각보다 너어어무,,, 길어졌던 천살검협의 1부가 끝났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참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네요.
대충 생각하는 2부의 분량은 200화 내외입니다.
물론 훨씬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글은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진 하늘도 모르는 거니까요!
새로운 이야기로 시작할 2부는 10일간의 휴식기를 가진 뒤, 1월 19일 목요일에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해주신 독자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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