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18화 (218/334)

EP.219 이십일장 - 고별,협 성련 (5)

* * *

목리원은 약 한 달하고 반 이상을 걷기만 했다.

마일석과는 갈림길에서 이미 헤어진 후였다.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목리원은 입을 거의 열지 않게 되었다.

스승의 관을 짊어진 채로 묵언을 이어가며 비교로 향하는 일은, 어찌 목리원에게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게 기억이 납니다.”

홀로 걷지도 못했던 먼 과거, 언제나 품에 자신을 안아주던 목선오의 온기가 기억에 남았다.

홀로 걸을 수 있게 되었음 즘은 목선오가 허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이, 산을 뛰어다닐 수 있게 될 즘엔 목선오의 손을 잡고 함께 산을 거닐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화내며.

어린 날을 지냈고 마일석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론 별별 사건 사고를 다 겪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돌이켜 보니, 제가 참 말썽꾸러기였던 것 같습니다.”

목리원은 목선오에게 말을 건넸다.

답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서도.

“닭다리가 먹고 싶어 몰래 걸왕님의 것을 훔쳐먹은 일이 있었지요. 스승님은 아셨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킥킥 웃으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말이 흩어지는 순간의 침묵이 또 가슴을 시리게 해, 목리원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나날이 매일같이 이어진 때였다.

“슬슬 도착인 듯합니다.”

목리원은 걸음을 멈췄다.

어느덧 강서성.

고향 오두막이 있는 수양현과는 일주일 정도가 떨어진 어느 첩첩산중을 코앞에 두고 목리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산의 일곱 번째 봉우리에 골짜기가 있다. 그곳을 잘 찾아보면 비고로 향하는 입구가 있단다. 후에 어찌해야 할지는 안에 들어가면 다 알 수 있을 테니 큰 걱정은 말거라.

목선오의 말을 따라오다보니 이곳이다.

틀리진 않을 터였다.

“자, 어서 가보도록 하지요.”

목리원은 관을 고쳐 매고 산을 올랐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이제 두 달.

청해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는 동안 목리원의 몸이 더욱 망가져 버린 까닭이다.

눈동자는 아직도 새빨간 채였으며, 공력을 버티지 못하는 몸은 매 순간, 매 걸음마다 목리원의 발목을 잡았다.

이따금씩 마을에 들를 때는 또 어떻던가.

사람의 살냄새에 피를 떠올리게 되고, 도축된 동물의 혈향이 곧 살의로 화하는 일도 있었다.

힘들다. 괴롭다.

무심코 투정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상대가 없었다.

‘그것도 다 끝이구나.’

제발 이곳에는 망가져 가는 몸을 고칠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정확히 일곱 봉우리를 넘은 순간이었다.

이제 새까만 밤이 된 시간, 목리원은 눈앞의 골짜기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곳이군요.”

일곱 번째 봉우리에 딱 하나밖에 없는 골짜기니 틀릴 일은 없을 터다.

“초대 문주께서는 지리에 밝으셨나 봅니다. 인적도 드문 산인데다 이리 평범한 골짜니, 굳이 들어서는 인물은 없었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참 별 것 없어보이는 주제에 들어가려면 고생만 할 것 같은 골짜기였다.

어찌 이리 절묘하게도 위치를 잡으셨을까.

목리원은 쿡쿡 웃으며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도 역시 평범한 장소.

이쯤 되면 무어라도 나오긴 해야 할 텐데, 그리 생각하며 목리원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고 나니까 보이는 게 있었다.

“…아, 진법.”

제갈산과 함께하며 진법에 관한 지식이 꽤 쌓인 목리원이다.

지금 이 공간에 인위적인 흐름이 존재함은 바로 아는 것이다.

목리원은 곧장 위화감의 중심지를 찾았다.

매끈한 암벽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곳인가 싶어서 암벽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암벽이 좌우로 벌어지며 틈새가 나타났다.

목리원의 고개가 기울었다.

틈새 너머로 보이는 게 있는 까닭이다.

‘…동굴?’

분명 동굴이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저 너머로 밝은 빛이 한가득 쏟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일까 싶어 목리원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동굴의 통로를 다 지나간 후에야, 빛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아…!”

목리원의 고개가 거대한 동공의 천장을 향했다.

아니, 뻥 뚫려있는 하늘을 향했다.

목리원의 눈빛이 떨렸다.

-원아, 저것이 북극성이다.

뻥 뚫린 천장 위로 보이는 밤하늘은, 그리고 그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은 목선오가 언젠가 하늘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일러준 별자리들이었다.

-저기 보이는 것은….

문득, 목리원은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온통 귓가를 맴도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어린 날의 추억이 현실을 비집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 저기 있구나. 저것은 우리 성련의 비고로 가면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잘 볼 수 있는 별자리란다. 이 스승님의 스승님은 말이다. 원래 이름을 두고 저 별자리를 꼭 쾌검자리라고 부르셨다. 웃기지 않느냐?

-왜 쾌검자리입니까?

-쾌검수의 손을 닮았다는 이유로 기억한단다.

-멋있습니다!

“멋있… 습니다.”

목리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울음을 참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역시 잘되지 않았다.

-너도 참 별나구나.

껄껄 웃는 목선오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순간, 목리원은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별나지 않습니다. 그저….”

-무인은 하늘을 보고도 무공에 관한 것을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놈이 말은 청산유수구나!

목리원은 입술을 앙 다물었다.

-꼭, 나중에는 꼭 함께 비고로 가보자꾸나.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너무 아릿하여, 그리했다.

*

감상이 너무 짙어지니 좀처럼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손 하나 까딱하는 일조차 너무 버겁게만 느껴져, 그날 목리원은 관 옆에 몸을 뉘인 채로 밤하늘을 보다 잠들었다.

정확히 다음날 별이 뜨는 시간까지.

그간 쉬지 않고 걸어온 나날들의 피로에 짓눌려 한 번도 깨지 않고 숙면을 취하고 만 것이다.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제야 비고의 풍경이 목리원의 눈에 새겨졌다.

벽 한쪽엔 항아리가 가득했다.

벽곡단 따위가 들어있었는데, 아마 폐관하던 선대 문주들이 쌓아놓은 듯했다.

그리고 낡은 검 몇자루, 서책 몇 권, 세월에 해진 무복 몇 벌.

그것들을 다 확인하고 나서야 목리원은 이어진 다른 통로로 화했다.

‘이곳은….’

연무장이었을까.

사방이 꽉 막힌 동공 속엔 벽에 박힌 야명주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벽을 둘러보니,

‘검흔이구나.’

역대 문주들이 새겼을 것이 분명한 검흔이 있었다.

유성칠검(流星七劒)이었다.

평생 이 검을 배워왔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바삐 움직인 목리원의 눈동자가 이윽고 한 구석에서 멈췄다.

『칠검의 수행을 완수했소.

10대 문주 목선오.』

그곳에 스승의 흔적이 있었다.

검으로 새긴 글귀라 이리 세월에도 바래지지 않은 듯했다.

목리원은 손끝으로 글귀를 쓰다듬다, 연무장을 나섰다.

그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이구나.’

거대한 석판.

그 뒤로 총 아홉 개의 봉분.

이곳이 목선오가 말한 역대 문주들의 묘소인 듯했다.

목리원은 석판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순서대로, 역대 문주의 별호와 이름이 적혀있었다.

『1대 문주 무검자 여성운

2대 문주 백면수라 허양군

3대 문주 검협 도견

·

·

·

9대 문주 호걸 우림』

호걸 우림.

저 사내가 쾌검자리라는 이름을 만든 사내였다.

목리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뒷걸음질 쳐 묘소와 거리를 벌린 후, 절했다.

“성련의 후계가 선배들을 뵙습니다.”

구배지례였다.

정성을 담아 아홉 번.

절을 끝마친 후 포권을 취하며 목리원은 말했다.

“제 스승 되시는 10대 문주, 검성 목선오 대협을 이곳에 함께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어찌 말해야 할지 참 곤란한 면이 있어, 목리원은 너털웃음을 흘려버렸다.

“아무쪼록, 스승님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그리하고서야 목선오가 자리를 뉠 곳을 파기 시작했다.

묘소는 참으로 넓어서 이미 아홉이 누워있음에도 새로 팔 수 있는 자리가 참 많았다.

그래도 스승의 옆자리가 좋지 않을까 싶어, 목리원은 그나마 가장 최근에 지어진 듯한 묘소 옆을 파기 시작했다.

도구를 쓰지는 않았다.

손으로 조금씩 흙과 돌을 파내어 반듯하게 자리를 만들고 관을 모셔와 그 속에 뉘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흙을 한 줌씩 옮겨 덮었다.

톡, 톡.

이제 정말 이 관조차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허한 기분이 차올랐으나, 그런 감정에 매몰될 수는 또 없었기에 그저 이를 앙 물었다.

“다 되었습니다.”

봉분을 완성하자 이제 10개가 된 묘가 목리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목리원은 꼼지락꼼지락 괜히 손가락을 까닥이다, 이내 허리춤에 차고 있던 흑야를 뽑아 들었다.

스릉―

날 선 소리와 함께 흑야가 어둠을 갈랐다.

그 위로 이젠 검붉어진 기파가 덧씌워졌다.

찌릿, 하고 목리원은 단전이 콕콕 찔리는 감각을 느꼈다.

‘잠시만 버텨다오.’

포악해질대로 포악해진 공력을 다독이며, 석판 위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역시 정성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사각 사각 소리가 한참이나 울렸다.

일을 다 마친 목리원은 흑야를 납검하고 목례했다.

“편히 쉬십시오. 스승님.”

말을 마친 목리원이 몸을 돌려 묘소를 떠나갔다.

그의 등 뒤로, 석판엔 정갈한 글씨로 새로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10대 문주 검성 목선오.』

목리원이 아는 가장 위대한 협객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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