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5 이십장 - 충돌, 격류 (11)
* * *
모용걸은 어릴적부터 운이 좋았다.
지금이야 권왕(拳王)이라는 분에 넘치는 별호로 불리고 있다지만, 한창 때 그를 이르는 말이 천운공자(天運公子)였다면 설명이 될 터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모든 일이 그에게 가장 이로운 형태로 끝을 맺었다.
이따금씩 도박을 한다면 그는 언제나 판을 엎는 승리자였다.
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용걸! 승!”
실력이 좋다.
무공에 대한 깊이가 있다.
물론 그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대체로 호각지세의 싸움에서 모용걸을 승리로 이끈 것은 그의 운이었다.
그렇기에 모용걸은 언제나 당당했다.
언제나 호방했으며, 도전 앞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사내였다.
무려 그가 불혹(不惑)의 나이에 다다를 때까지 말이다.
“검군! 승!”
그날 그는 운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났다.
또한 평생을 기어올라서라도 이기고 싶은 상대를 만났다.
“좋은 비무였소.”
예의상으로라도 잘생겼다 말 할 수 없는 얼굴, 그럼에도 사내다움을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웃음.
어쩌면 그 마음은 동경이었을 것이다.
“다음에도 좋은 비무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구려.”
모용걸을 초월로 이끈 뒷모습은 그러했다.
“똘추 같은 놈. 분에 넘치는 일을 하려 드는구나.”
염소소는 그런 나날 중 만난 여인이었다.
살곡의 주인 천면살수(千面殺手).
그런 이름이었고, 모용걸이 목선오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사사건건 막아오던 탓에 악연이라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녀였다.
“아서라, 네놈이 넘어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만 귀찮게 하거라. 내가 다 시끄럽다.”
아마 그녀의 속마음은 ‘귀찮게 하지 말아라’에 치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모용걸을 포함한 몇몇 이들은 알고 있었다.
천면살수가 검군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목선오는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어 평생 그 마음을 몰랐지만.
여하튼 모용걸은 그럴 때마다 말했다.
“싫소.”
기껏 목표로 한 이가 눈앞에 있거늘 어찌 지나쳐간단 말인가.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은데, 어찌 그를 외면하고 정체하란 말인가.
무인으로서도, 남자로서도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모용걸은 끊임없이 목선오에게 도전했고 그가 없을 땐 강호를 주유하며 비무행을 이었다.
운과 경험, 그리고 재능.
세 가지 요소는 모용걸을 초월로 이끌었다.
“다시 도전해도 되겠소?”
여전한 태도로 목선오에게 덤볐다.
또 패배했고, 또 도전했다.
그렇기에 혈사의 끝, 모용걸은 목선오의 선택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살귀가 될 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무명을 버린다 했소? 나는 반대요.”
물론 목선오의 고집이 꺾이는 일은 없었다.
그는 결국 강호를 떠났으며, 남은 것이라곤 목표를 잃어 공허한 마음뿐이었다.
모용걸은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비무에 더 집착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쫓기 위해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하여 자신이 있었다.
마교와의 전쟁 또한 마음속의 구멍을 메워줄 수단으로만 바라봤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오만했구나.’
모용걸은 3장로와 대치하는 염소소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혈사 때가 떠오른 까닭이다.
자신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다 위기에 처할 때면 언제나 뒤따라 와 주던 전우가 바로 검성 목선오와 살성 염소소였다.
한 사람은 이제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은 너무 늙었다.
예전처럼 위기에서 확실히 자신을 구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모용걸은 고개 숙여 몸 상태를 확인했다.
‘더 싸울 수 있겠느냐.’
늙고 노쇠한 몸은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움직이려 해봐야 금방 한계를 보인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젊을 적을 떠올리며 미친 듯이 달려들다 저 기괴한 조법에 당해 전신이 낭자해진 상태다.
모용걸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더 싸울 수 있느냐가 아니다.
언제까지 서 있을 수 있느냐다.
모용걸은 몸을 일으켰다.
적을 눈앞에 두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상황에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 것은 권왕 모용걸의 이름에 모독이 되는 행위였다.
무엇보다, 교만한 채로 죽는 것은 사절이었다.
쿠구궁―
모용걸의 몸 위로 기파가 덧씌워진다.
그 모습에 염소소와 3장로의 시선이 일순 모용걸을 향했다.
모용걸은 웃었다.
“가시게. 여긴 내게 맡기고.”
쾅!
달려 나가 3장로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다른 곳을 지원하게! 전황이 좋지 않아!”
“이 똘추 놈아!”
“잊었나!”
꽈드드득, 3장로의 손톱을 부러뜨려버리겠다는 듯 모용걸의 주먹위로 성난 강기가 더해졌다.
“이 모용걸만큼 중원에서 행운이 따르는 사내가 있던가!”
3장로의 눈이 희번뜩해졌다.
“말은 잘하는구나.”
퍽!
3장로가 모용걸의 무릎을 즈려밟았다.
중심이 흐트러진다. 하나 꺾여선 안 된다.
권사에게 중심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미련한 놈.”
염소소가 사라졌다.
그녀도 알고 모용걸도 알고 3장로도 알았다.
이 전쟁의 핵심은 하나라도 많은 초월의 무인이 전장을 헤집는 일이란 것을.
그렇기에 무림맹은 1대1 대치 구도로 마교의 초월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중원의 초월은 내각주까지 총 일곱, 원명과 제갈벽을 제외하니 그만큼이 남아 있었다.
‘저쪽의 소교주, 그리고 교주까지 하면 마교도 일곱이다.’
하나 그 둘은 아직까지 나서지 않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전황을 뒤집을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말이다.
“질긴 놈이구나.”
3장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은 말에 모용걸은 웃었다.
그녀도 마음이 급해졌음이 금방 드러났기 때문이다.
“끝까지 서 있으면 이기는 건 날세.”
“오만이구나.”
“아니.”
모용걸이 핑글 돌아 3장로의 복부에 발을 꽂아넣었다.
“큭!”
가까스로 막아낸 3장로가 멀어짐에, 모용걸은 말했다.
“확신이라네. 나는 운이 좋거든.”
그것은 모용걸이라는 사내의 삶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천운이 따라 천운 공자, 천운이 따라 장수, 천운이 따라 초월.
그러니 모용걸은 바란다.
‘한 번만 더 버텨다오.’
완벽한 승리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전쟁이니 참혹하고, 전쟁이니 끔찍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한 번만.
적어도 이 마귀를 무릎 꿇릴 정도의 힘은 쏟아내고 싶다.
‘적어도 팔 한짝은!’
가져가마.
모용걸이 팔을 뻗었다.
*
이미 진장이 된 자리 한가운데, 3장로 악려후는 뜯겨나간 왼쪽 어깨를 눌러 지혈하며 모용걸을 내려다봤다.
“헉, 허억…!”
이미 죽어있다.
팔을 뜯겼으나 승리다.
하나, 그 정도로 기뻐할 수는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란 말이냐.’
최후의 순간 선천진기라도 다 토해낸 것인지 모용걸의 난폭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죽어 나자빠진 이 순간까지 뜯어낸 자신의 팔을 놓지 않고 있다면 말은 다 한 것이리라.
“이래서 중원 것들은.”
악려후는 쯧 혀를 차곤 점혈로 지혈을 끝냈다.
그 순간이었다.
오싹―!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강한 살기가 쏘아졌다.
분명 먼 거리였다.
하나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살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도다.
‘무림맹주라고 했던가.’
창성(槍星) 사백운.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어찌 모용걸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느껴진 살기에 절로 긴장이 떠오른다.
물론, 도주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맹주라면 거물이겠구나.’
그것 하나를 잡아내면 전장의 분위기가 굳어질 터다.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악려후의 신형이 흐려지며 사백운을 향했다.
*
사백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신도 가셨소.’
기어이 권왕의 기가 스러졌다.
앞선 원명 때와 같았다.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던 존재감이 스러지는 감각은 장난으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종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왕, 힘겨워 보이시는구려.’
초월의 마인과 대치 중인 도왕 진건의 기세가 빠르게 깎여 나가고 있었다.
이곳에 없는 제갈벽이 차라리 목숨이라도 보전하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전황은….’
불리하다.
스스로의 생명까지 갉아먹으며 달려드는 마인들에 점차 피해를 입는 무인들이 늘어난다.
게다가 저쪽은 아직 교주와 소교주도 나서지 않은 상태다.
“뒤집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원이 살아남는다.
“지켜야 한다.”
맹주는 중원 무림의 아버지가 아니더냐.
백운아, 네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전장에 선 사백운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이것은 혈사가 있던 때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의 버릇이었다.
겁쟁이 사백운.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알기에, 그리 해야만 했다.
“무림맹주, 그쪽이 맞나?”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다가와 묻는다.
어디가서 덩치로 져본 일이 없는 사백운은 자신과 비슷한 덩치의 노인을 한참이나 뜯어봤다.
“저놈이 확실하다.”
한쪽 팔이 뜯겨나간 노파가 그의 옆으로 서며 말했다.
그리고, 삐쩍 마른 노인이 다가왔다.
“무림맹주 창성 사백운, 그런 이름이었소.”
그들 모두가 초월에 달한 무인이었다.
협공해오려는 것이다.
저들의 판단이 합리적임은 사백운으로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림맹주라 함은 하나의 초월이 아닌, 이 전장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의 이름이었으니.
하나, 그것에 두려움을 품기엔 속이 이미 진창이다.
“잘도.”
사백운의 몸에서 기파가 새어 나왔다.
“아주 잘도, 이리 해주었구나.”
사백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불거진 눈에 맺힌 것은 분노였다.
무엇을 향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저 뜨겁기만 한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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