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0 십구장 - 청해, 부자 (10)
* * *
제갈산은 곧장 제갈벽이 있던 자리로 달려 나갔고, 텅 빈 자리를 볼 수 있었다.
자리가 빈 이유야 곧장 알 수 있었다.
‘혼자 들어갔다.’
제갈벽이 홀로 심부의 진으로 들어간 것일 테다.
홱 돌아간 제갈산의 고개가 울타리를 향했다.
저 속에서 홀로 초월의 마인을 상대하고 있을 제갈벽이 눈에 선했다.
왜 자신을 두고 간 것인가.
생각할수록 떠오르는 것은 이곳에 온 이후 제갈벽이 보였던 모습들이다.
‘나를….’
지키려는 것인가.
그런 추측을 떠올린 순간, 제갈산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분노와 불안감을 느꼈다.
머릿속에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상념이 있다.
이제와서, 이런 순간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렇게 홀로 위험에 빠져드는 것이 진정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게 끝까지 사람은 모르며 죽을 생각인가.
감정이 들끓는다.
그런 와중에도 발걸음은 부지런히 움직여 울타리 안을 향했다.
그리 도착하여 제갈산은 볼 수 있었다.
“내공을 지웠군. 나와 네놈의 단전을 이었구나. 네놈의 마기가 비어있으니 나 또한 공력을 잃게 된 게야.”
“확인받고 싶어 묻는 겐가? 그렇다면 답해주겠네. 옳다네. 자네는 참으로 옳은 답을 골랐네.”
위기에 처한 제갈벽을 말이다.
그는 공력을 잃어 그저 상처 입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약 일백에 달하는 병력이 제갈벽을 향해 살기를 드러낸다.
제갈벽이 곧 죽을지도 모르는 형국.
제갈산은 그걸 확인한 순간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나섰다.
“거 나는 신경도 안 쓰이시나보구려들.”
짓씹듯 말이 나와버린다.
말을 내뱉자 공간의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일제히 시선이 쏟아지는 것에 제갈산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들 보시오?”
시선 중에서도 가장 제갈산의 눈에 깊숙이 박히는 것은 제갈벽의 시선이었다.
황망함 따위를 떠올리고 있는데, 그 표정이 제갈벽답지 않아 제갈산은 분위기에 맞지 않는 헛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왜…!”
흘리듯 내뱉는 탄식의 말에 제갈산은 답했다.
“왜 못 올 자리에 온 것처럼 말하십니까?”
그러자 초월의 마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말했다.
“그래, 못 올 자리는 아니지.”
끌끌 웃는 노인이 제갈벽을 위기에 빠트렸다.
제갈산의 두뇌는 이 짧은 순간에도 그 정도의 인과를 엮을 정도는 되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거 다시 소개해야 하나? 나는 신교의 6 장로인 천기려라네. 자네는….”
“거 늙은이가 말이 많구료. 꼴을 보아하니 적어도 환갑은 되어 보이시는데 그만 뒷방에 가서 몸이라도 뉘고 있는 게 어떻겠소?”
말이 삐딱하게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갈산은 그만큼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주, 당신도 그만 빌빌대십시오. 고작 이런 꼴이나 보여주려고 날 세가에 불렀습니까?”
“고얀 놈이구나.”
이번 역시 노인, 6장로 천기려가 말했다.
그의 얼굴 위론 옅은 짜증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래, 괴룡이라 하던가. 네놈 이야기는 꽤 들었다. 아비를 닮아 약식 진법이라는 것을 능숙히 사용한다던데….”
제갈산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옥돌을 튕겼다.
투두둑, 사방으로 돌이 퍼지며 진동한다.
그에 따라 흘러나오는 공력이 진법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 말이오?”
라고 제갈산은 여유롭게 말하며 진각을 밟았다.
스르륵―
신기루처럼 흩어진 제갈산이 제갈벽의 코앞에 나타났다.
뒤늦게 흠칫한 마인들이 보인다.
제갈산은 곧장 조갑을 두른 손으로 그들의 목덜미를 훑었다.
촤아아악―!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제갈산은 후욱, 숨을 내뱉으며 천기려에게 말했다.
“나는 안중에도 없었나 보구려. 대책조차 마련하지 않은 걸 보면 말이오.”
천기려의 멍한 얼굴이 꼴같잖다.
사실상 지금의 모든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제갈산의 눈에 그 표정이 진중했다 한들 다르게 느껴졌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놈이…!”
천기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고작 절정의 애송이 따위가, 나를 능멸하느냐?”
깔아뭉개는 어조에 제갈산은 비소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내가 절정이라고 생각하오?”
일백, 이제 구십팔명이 된 마인들이 제갈산을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살기에 등골이 저릿저릿해진다.
“산아, 지금이라도….”
“거 가주는 가만히 있어 보십시오.”
제갈산은 품속의 옥돌을 굴리며 읊조렸다.
“우리 얘기는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니.”
그 순간, 제갈벽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빛조자 투과되지 않을 정도로.
*
절정.
대외적으로 제갈산은 그런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니, 실제 경지도 절정인 것은 맞았다.
또래 중에선 최상위권이다. 하나 그보다 뛰어난 인재들은 존재했다.
천재 중의 범재라 이르는 게 맞을 것이다.
당장 목리원과 남궁진천만 봐도 그렇다. 그 외에 일운이나 혜운, 심지어 당화서를 봐도 그렇다.
다만 한 가지, 절정이라는 경지 자체를 제갈산이 의도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는 확실히 천재 중의 범재가 맞았다.
“강호에선 힘의 삼할을 숨겨라. 그런 격언이 있지 않소.”
툭, 하고 옥돌을 튕기며 제갈산은 공력을 더했다.
이제까지 그가 절정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
공력의 모자람을 극복해나가기 시작했다.
제갈산의 정신은 그 와중에도 제갈벽을 향하고 있었다.
‘당신을 원망합니다.’
고독할수록 빛나는 별이라, 원망과 증오를 곧 공력으로 치환하는 별이라.
제갈산은 감정이 들끓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을 증오합니다.’
회상하는 것이 있었다.
제갈산은 언제나, 아주 오랜 과거부터 제갈벽의 등을 바라봤다.
그 감정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 애정일 때부터, 그 애정이 미움이 되고 원망이 되어 증오로 완성되는 순간까지 제갈산이 바라본 것은 오로지 제갈벽의 등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쫓는다.
당연한 감정이다.
그렇기에 제갈산은 제갈벽을 뛰어넘기 위해 내내 고심했고, 그보다 그의 기술에 능숙해지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결과가 이것이었다.
제갈산은 진법적 이해와 무학적 깨달음이 이미 그 경지를 아득히 넘어있었다.
이르길, 공력이 경지를 뛰어넘은 남궁진천의 극점에 있는 것이 제갈산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충분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다음 경지를 뚫고 가는 일은 이 정도면 족하다.
바라는 심상을 기(氣)의 형태로 발출하는 것이 바로 초절정.
그렇다면 제갈산은 누구보다 확신 어린 목소리로 외칠 수 있었다.
‘나는 객이다.’
평생을 객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다만 발목을 옥죄는 것에 원망을 표할 것이다.
그리도 자유롭게 살아, 내려진 운명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표할 것은 자유로움이다.’
툭툭, 내내 던져진 옥돌이 점차 거대한 진으로 완성되기 시작했다.
그 배열의 오묘함을 알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오로지 한 명, 제갈벽 뿐이었다.
“이것은….”
그의 목소리를 흘려내며 제갈산은 더욱 진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순간순간 마인들의 공격이 짓쳐들어온다.
그것들을 피하고, 막고, 털어내며 제갈산은 심상을 구체화하는데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나를 나로서 바라보는 것이면 나 하나면 족하다.’
그러니 이리 이름 붙이자.
‘독오(獨娛).’
세상에 홀로 남아도 기꺼이 웃을 수 있음을 말하니, 제갈산이 스스로의 심상을 규정한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진이 완성 됐다.
*
회색 기파가 공간을 휩쓴다.
제갈산이 치밀하게 계산한 각으로부터 진법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참으로 경이롭고, 기특한 진법이었다.
‘아.’
제갈벽은 분위기에 맞지 않게도 목이 메는 기분을 느꼈다.
제갈산의 신형이 흐려지는 것이, 회색 기파가 공간 전체에 골고루 묻어 제갈산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그리하여 환영 속에서 마인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그 모든 것이 너무 기특하고 스스로가 바보같은 이유였다.
‘연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산이는 고작 이런 못난 아비의 등 뒤에 숨어 있을 정도로 약한 아이가 아니었구나.
이리 혼자서도 충분히, 충분함을 넘어 훌륭하다 말해야할 정도로 잘 큰 아들이구나.
죄스러움은 깊이를 더해간다.
제갈벽의 표정은 조금 더 흐려졌고, 그런 와중에도 제갈산은 유령처럼 움직이며 마인들을 쓰러트려갔다.
어찌 잡을 수 있겠나.
이 공간을 점하는 진 전체가 제갈산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존재함인데 초월에 이른 공력과 심력이 없다면 제갈산의 존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 터다.
한데 보라, 유일하게 제갈산을 막을 수 있는 천기려는 자신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마기를 다 지워내고만 있을 뿐이다.
천기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에 제갈벽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놈이 어찌 알았을까.’
나도 몰랐던 사실을 생판 타인인 네놈이 어찌 알았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스으으―
제갈벽은 바닥을 치던 공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충만함과 전능감이 몸을 일으켜세우는 것에 기뻐하는 것은 찰나.
이윽고 제갈벽은 이 현상이 뜻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산아!”
제갈산이 천기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것에 천기려가 곧장 진법과 주술을 풀어버렸다.
천기려만큼은 제갈산이 모습을 숨기는 정도로 이겨낼 수 없는 상대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제갈벽은 몸을 움직였다.
다행인 일이 있었다.
푸욱―
제갈벽은 제갈산을 살렸다.
그리고,
“…빗나갔구나.”
불행히도 뻗어 나온 천기려의 팔이 제갈벽의 단전을 관통당해 버렸다.
다음화 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