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9 십구장 - 청해, 부자 (9)
* * *
목리원은 지난 당문의 금지에서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환각을 경험했다.
당연 그때보단 내성이 생겼고, 또한 저항할 힘이 생겼기에 진법을 견디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여 다른 이들을 돕고자 목리원은 한참이나 진법 속을 헤맸고, 그러던 중 진법이 스러졌다.
‘해주 되었구나!’
안개가 걷힌다.
자리해 있던 날 선 말을 하는 주변인들이 모두 스러졌다.
그리고 그 자리, 목리원의 눈에 보인 것이 있었다.
“거, 걸왕님!”
무릎 꿇고 있는 마일석이었다.
거친 호흡이나 뺨을 타고 흐르는 땀으로 보아하니 꽤 지독한 환각에 걸렸던 듯하다.
목리원은 곧장 마일석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아, 원이냐.”
마일석은 가쁜 숨을 내쉬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래, 진법은 잘 풀렸나 보구나.”
“걸왕님,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대체….”
“신경 쓸 것 없다. 이런 류의 기억을 헤집는 진법은 나이가 들수록 더 버티기 힘들어지는 법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덮어두고 싶은 기억이 늘기 때문이지.”
마일석은 그리 말하고 목리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음 진으로 들어가자꾸나. 환각진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든 몰려드는 적들을 잡아보마. 보조를 부탁한다. 할 수 있겠지?”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류의 진법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감각을 속인다 한들 천살성이 이르는 길을 따라 적을 베는 게 가능했다.
마일석이 흡족하게 웃었다.
“좋다. 가자꾸나.”
그렇게 마일석과 내달렸다.
“또 보는군.”
진법이 스러진 자리를 지나치자마자 나타나는 이가 있었다.
안면 위로 흉측한 상처가 가득 나 있는 사나운 기도의 마인.
천마신교의 4장로, 혈마전에서 만난 적이었다.
“처맞고 와선 여기서 틈을 보고 있었구나.”
마일석이 씨익 웃으며 봉을 고쳐 쥐었다.
4장로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볼까.”
“아느냐? 사나운 개새끼들일수록 몽둥이가 약이다. 네놈은 버르장머리가 덜 든 것 같으니 내가 다시 한번 손봐주마.”
4장로의 눈 위로 핏발이 섰다.
으득 물린 입술이 그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깊은 분노다.
4장로가 마일석을 향해 쏘아졌다.
“원아!”
합공이라도 하려는지 자리해 있던 다른 마인들이 한번에 쏟아진다.
초절정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정예병력이라 할 만하다.
목리원은 곧장 검을 뽑아 들고 마일석의 진로를 방해하는 마인들을 우선적으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뒤는 맡기십시오!”
그 순간, 목리원은 머리가 ‘지잉―!’ 울리는 기분을 느꼈다.
흘긋 마일석을 보니 그도 마찬가지였다.
‘진법!’
두 번째 진법.
그것은 기를 발출할수록 두통을 일게 하는 형태의 진법이었다.
*
“기의 발출을 억제하는 진법이다. 해주법은 알고 있겠지.”
제갈벽이 말했다.
그의 호흡이 끊기고 있었다.
응급처치를 마치긴 했지만 허리가 꿰뚫린 상처가 괜찮을리 없다.
제갈산의 입은 꾹 다물리고 있었다.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중요 지점은 두 개다. 두 개의 생문을 쫓아 동시에 끊어내야 한다. 내가 가까운 쪽을 맡지.”
제갈벽은 답도 듣지 않고 떠나갔다.
제갈산은 곧장 떠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감정이 요동친다.
하나 전처럼 타오르는 원한만으로 요동치는 감정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증오를 희석시킨다.
제갈벽이 없는 말을 지어내는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기에, 그것이 진심임을 알기에 주먹이 꽉 쥐어지고 만다.
-가주는 그저 서툰 분이시란다.
모친의 말이 떠오른다.
아마 그것이 족쇄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껏 제갈벽을 그리도 미워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했던 건 그 말 탓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머니….’
참 당신께서 이르신 대로 너무 서툰 분이십니다.
하여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길게 숨이 빠져나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제갈산은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산아.’
지금은 임무 중이다.
이런 감정적인 이유로 망설임을 품었다간 함께 고생하고 있는 무인들, 그리고 마일석과 목리원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가자.’
제갈산은 몸 위로 기를 둘렀다.
한껏 부푼 기가 눈가로 모여 안력을 돋운다.
그제야 제갈산의 눈에도 진법의 생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갈산은 이를 악물고 걸어 나갔다.
*
생문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진법에 관한 제갈산의 지식은 이미 제갈벽의 뒤를 바짝 쫓을 정도인 까닭이다.
무력의 일천함을 보완하기 위해 더욱 매달린 진법, 그렇기에 실수는 없었다.
파스스―
진법이 스러졌다.
지워낼 순간은 제갈벽쪽에서 일러줬기에 둘 사이에 오차가 나는 일도 없었다.
공력을 돋울수록 강해지던 두통이 스러진다.
제갈산은 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마지막 심부의 진법이다.
어떤 형태의 진법이 나올지 모르는 만큼 일단은 제갈벽과 합류해야 할 터다.
아직 감정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한다니 괜한 떨떠름함이 속에 떠오른다.
‘…나중에.’
조금만 나중에 생각하자.
제갈벽의 말도, 그에 건넬 답도, 그와의 관계도.
지금 당장은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
제갈벽은 두 번째 진법이 지워지자 속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겨냥한 진법이었다.’
공력이 강할수록 더욱 이지를 흐리는 형태의 진법은 분명 사고 능력과 전투력이 비례하는 자신을 겨냥한 진법이었다.
제갈벽은 고개를 들어 튼튼하게 지어진 심부의 울타리를 바라봤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이 진법을 만든 이가 있을 터.
마일석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불가능했다.
‘역시 장로가 둘인가.’
마일석의 기운과 초월에 달한 마기가 충돌하고 있다.
그 기운이 예까지 저릿함을 떠오르게 할 정도이니 그에게 더 여유는 없을 터였다.
또한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엄연한 초월에 달한 마기.
그것은 분명 제갈벽을 유인하려는 듯 노골적으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허리의 부상이 뼈아프나 어쩔 수 없다.
하나 다행인 점이라면 상대도 진법과 주술을 이용하는 적이라는 것 정도. 육체의 모자람은 이해의 뛰어남으로 메꾸면 될 터다.
제갈벽은 걸음을 옮겼다.
‘산이는 안 된다.’
초월의 마인이다.
머리를 쓰는 놈이다.
인간적인 약점이 있다면 집요하게 그 부분을 파고들 것이다.
20세의 나이에 절정에 올라 있는 것은 참으로 대견하나 그래봐야 절정이다.
분명 함께 들어 갔다간 제갈산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목숨은….’
잃어야만 하는 목숨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제갈벽은 그리 생각했다.
끼이익―
제갈벽이 다가가자 울타리가 열렸다.
그 속에는 오십에 달하는 마인과 학자를 연상케 하는 마른 노인이 있었다.
“자네가 진왕인가. 그래, 진법에 그리 해박하다지.”
노인이 씨익 웃었다.
제갈벽은 태도를 뽑아 들었다.
“장로인가.”
“그렇다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교의 6장로 천기려라 허이.”
“반갑게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군.”
“딱딱하게 굴지 마시게. 예까지 내 진을 뚫고 온 것이 자네가 아닌가. 이 정도 이야기는 나누고 싶다네. 또한 찬사를 보내 마땅하다 보네.”
노인, 6장로 천기려의 눈이 좁아졌다.
“제아무리 자네라 해도 상처 하나 없이 오기는 힘들었던 것 같지만 말일세.”
껄껄 웃는 태도에선 숨길 수 없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제갈벽은 눈을 좁히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머리를 굴렸다.
‘시간을 끈다?’
그런 경우라면 진법에 모종의 수를 더해놨다고 판단하는 게 맞을 터다.
진법 중엔 대상이 진법에 들어오고난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겨우 발동하는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데굴데굴 굴러간 제갈벽의 눈이 확인하는 것은 일백의 마인들이었다.
과연 어떤 수일까, 뭐가 됐든 상대의 의도대로 시간을 줘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제갈벽의 속에 차올랐다.
“잡담은 필요없다 말했네.”
투둑, 제갈벽이 바닥에 옥돌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흐려졌다.
끝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옥돌 모두가 진을 이루는 축이 되어 촘촘하고 유동적인 형태의 진법을 완성한다.
약식진법이 지향하는 극점.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수십 수백의 인력을 동원하는 진법을 흉내내는 데 있었다.
그림자처럼 움직인 제갈벽이 어느새 천기려의 코앞까지 닿았다.
제갈벽이 소태도를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눈치는 참 빠르군. 한데 마음이 너무 조급한 듯허이. 부상이 문젠가? 아니면 다른 것?”
천기려가 흐흐 낮게 웃으며 말했다.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직후였다.
쩌엉―!
초절정의 마인 둘이 제갈벽을 막아섰다.
다르게 말하면, 고작 초절정 둘에 초월인 제갈벽이 막혔다.
제갈벽은 헛숨을 삼켰다.
이윽고 깨달았다.
‘산공?’
공력을 흩는 진법?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이들 마인들도 똑같이 진에 당해야지.
천기려가 쓴 것은 다른 형태의 진법이었다.
“내공을 지웠군. 나와 네놈의 단전을 이었구나. 네놈의 마기가 비어있으니 나 또한 공력을 잃게 된 게야.”
“확인받고 싶어 묻는 겐가? 그렇다면 답해주겠네. 옳다네. 자네는 참으로 옳은 답을 골랐네.”
천기려가 마기를 전부 흩뿌려댄 것은 도발 외에도 한가지 의미가 더 있었다.
바로 속에 품고 있던 공력을 전부 털어내는 것.
제갈벽은 낭패 어린 심정을 띄워 올렸다.
천기려는 말했다.
“물론 늦은 답이라네.”
천기려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인들이 제갈벽에게 달려들었다.
위기였다.
“거 나는 신경도 안 쓰이시나보구려들.”
제갈산이 없었다면, 위기였을 것이다.
다음화 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