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4 십칠장 - 임무, 잠행 (5)
* * *
련의 무인들이 시시각각 몰려드는 상황이다.
목리원과 남궁진천은 초절정의 무인 다섯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
남은 네 명의 단원들은 적어도 두 사람에게 무인들이 닿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빨리고 있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네 사람의 무공 궁합을 들 수가 있었다.
제갈산의 약식진법과 당화서의 독은 꽤 좋은 합을 이룬다.
제갈산이 진법으로 주변을 흐리면 당화서가 독을 뿌려 이들을 해하는 것이다.
일운과 혜운 또한 마찬가지.
그래도 같은 불가 계통의 무공이라는 것인지, 두 사람의 무공의 서로를 보완하는데 꽤 특출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화서는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다.
‘한계다.’
자신들은 초월의 무인이 아니었다. 이들을 일격에 도륙 낼 공력도, 그들의 눈을 속일 현란함도 몇 날 밤을 멈추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체력도 없단 말이다.
결국 변수를 주지 못한다면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게 될 터다.
‘어떻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굳은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떡대가 벌어진 초절정의 무인, 련주전의 문 앞에서 나온 이였다.
“정지!”
그의 목소리에 모든 무인이 동작을 멈췄다.
당화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중 등장한 무인이 입을 열었다.
그것에 당화서는 뒤늦게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을 안으로 들인다.”
‘성공했구나!’
아무래도 서예가 안쪽에서 다른 수를 쓴 듯하다.
단원들의 시선이 당화서를 향했다.
당화서는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입합니다.’
눈짓으로 그런 뜻을 전했다.
“처음부터 이럴 것을.”
겉으로는 여전히 하오문의 무인을 흉내 내는 상황.
당화서는 기운을 갈무리하고 단원들 앞에 섰다.
그리고 무인에게 말했다.
“안내하라.”
무인은 무심한 얼굴로 당화서를 한차례 훑어본 후, 등을 돌려 련주전 안으로 향했다.
*
련주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천장이 아주 높고 길이가 긴 복도였다.
전체적으로 흑색의 목재를 이용해 지어져 있었고, 사방이 트여 있어 마땅히 숨을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일부러 천장이나 벽 같은 것을 뜯어낸 흔적이 얼핏 보이는 것에 당화서는 공간의 목적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암중 호위를 포기하고 살수의 침입을 더욱 경계했다.’
즉, 본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으니 살수에 의한 사고를 막겠다는 의지일 터다.
신중하고 결벽적이다.
당화서는 이 공간과 서예에게 들은 말을 통해 련주의 성정을 더욱 확고히 파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저 문 너머가 바로 련주실일 터.’
문은 사람 하나가 버티고 서면 될 정도로 좁다.
직전 난리통에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은 사내, 련주의 명이 있자 그제야 련주전을 빠져나온 눈앞의 초절정의 무인이 바로 문지기일 터였다.
“안으로 들라.”
무인이 문 옆에 서서 말했다.
당화서는 긴장을 삼킨 채, 가장 앞서서 련주실 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단주!”
방안, 서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도한 낯을 만들었다.
그 뒤로 반투명한 천막에 비치는 인영이 있었다.
그가 바로 흑사련주, 만악 도은강일 터다.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서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당화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쉰 서예가 이어 남궁진천을 노려봤다.
남궁진천은 그답지 않게 반가운 낯을 하다, 그대로 깨갱해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이었다.
“…들지.”
억양에 고저가 존재하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쿵, 문지기가 문을 닫았다.
당화서는 짧게 숨을 내쉬며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취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백도 무림맹 산하 용봉단주 당화서요.”
굽히고 들어가진 않겠다는 의사였다.
잘 전해졌는지, 그도 아니면 얼굴이나 보자는 심산인지 련주가 촤르륵 천막을 걷어냈다.
드디어 얼굴을 본 련주는 꽤 젊었다.
나이가 사십 언저리에 있을 것 같은 외형에 깔끔하게 길러 뒤를 묶어둔 머리, 왜인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일자 눈과 부드럽게 닫힌 입매가 특징적이다.
“흑사련주 도은강.”
그리 스스로를 소개한 도은강이 이어 말을 내뱉었다.
“바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당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목리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오가는 대화를 들었다.
대화 양상은 꽤 단순한 편이다.
당화서가 무언가를 제안하고 도은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협의 사항을 쭉 읊는 게 끝.
직전까지 흑사련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은강은 꽤 순순히 당화서의 제안에 응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신경 쓰이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목리원은 물끄럼 도은강을 바라봤다.
‘저 사내가 흑사련주.’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일까, 흑사련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중년의 사내는 분명 초월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싸운다면 당연 필패일 것이다. 초월은 이전까지의 경지와 궤를 달리하는 진정한 신인들의 영역이니 그것과 맞부딪칠 재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목리원은 자신이 저 사내의 경지가 같다고 하더라도 그와의 비무는 쉽지 않으리라 장담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도.’
살기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선 어떤 감정이나 공격성의 편린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에게 내재 되어 있어야 할 공격성이 있다. 아주 친한 관계에서도 무심코 흘러나오는 공격성 말이다.
아무렴, 자신과 당화서 사이에도 대화에서도 은연 중 떠오르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존재하는데 적진에 있는 이가 어찌 저렇게 무기질적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천살성을 이고 세상을 둘러본 목리원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흑사련주 만악 도은강.
그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오로지 실리와 이성만을 통해 움직이는 사내였다.
무인으로서는 재능이다.
세상 모든 무인들이 바라는 부동심의 극의에 그가 존재할 터이니 재능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협객으로서는 최악이다.
목리원은 도은강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와중 협의가 끄트머리에 달하고 있었다.
“…해서, 요구사항은 여기까지요.”
“잘 들었다.”
도은강은 무심하게 말했다.
“수용하지. 단,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 함은….”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다 갈 생각이었나? 흑사련은 무림맹의 산하에 있는 집단이 아니다.”
“우리가 당신들 몫까지 마교와 싸워주고 있소. 그것으론 모자란 것이오?”
“대신 싸운다는 말은 틀렸다. 우리가 어떻게 나오던 중원무림은 마교와 싸워야 할 테니, 네놈들은 네놈들의 생존을 위해 흑사련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당화서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졌다.
목리원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조건을 말하지.”
도은강이 입을 열었다.
“향후 30년 간의 불가침 조약. 또한 중원의 흑도를 탄압하는 행위를 자제해줬으면 좋겠군.”
“그쪽에서 죄를 지어온다면….”
“그땐 알아서 하라. 패배자들의 뒤까지 닦아줄 생각은 없으니.”
당화서는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는데, 목리원이 보기엔 수용할 만한 조건이라는 판단을 한 듯했다.
“…보고를 올리겠소.”
“그리고 하나 더.”
“…?”
도은강이 잠시 말을 멈췄다.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 직후 도은강이 내뱉은 말에 그 정적이 산산이 깨져버렸다.
“묵룡, 네놈만 남고 나가라. 볼 일은 네놈에게 있으니.”
남궁진천이 칼을 뽑으려 했다.
“듣자듣자 하니….”
“괜찮소.”
목리원이 남궁진천을 막아섰다. 남궁진천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어 바라본 다른 단원들도 마찬가지.
하나 같이 걱정이 서려 있거나 분노한 얼굴이다.
이리 마음 써 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하지만 목리원은 정말 괜찮았다.
“금방 따라 나가겠소.”
“목 소….”
“그 어떤 위해도 없을 것이오.”
라고 말한 목리원은 도은강을 바라봤다.
여전히 살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정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내라면 이것조차 확신은 아니리라. 목리원이 지금 안전을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날 죽일 이유가 련주에게 없소.”
도은강은 눈썹을 들썩이다, 이내 긍정했다.
“옳다.”
짤막한 답이었다.
*
단원들이 모두 나간 련주실.
목리원은 바닥에 정좌한 채로 도은강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 남긴 이유가 뭐요?”
사실, 목리원으로서도 이것은 의아한 상황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다는 말인즉, 그와 어떤 은원관계도 존재하지 않다는 말인 까닭이다.
생면부지의 사내, 게다가 감정이나 욕망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한 사내가 왜 자신을 이 자리에 남겼을까.
이유를 갈구하는 말에 도은강이 답했다.
“왜 백도에 있나.”
“음?”
“왜 중원 무림에 있냐는 말이다.”
도은강은 바른 자세로 앉아 그리 물었다.
목리원의 눈이 좁아졌다.
“왜냐니….”
“네놈은 백도와 어울리지 않는다.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목리원의 속에 절로 긴장이 떠올랐다.
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인가.
그는 어째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몸이 자연히 경계태세를 취한다.
목리원의 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는 자리에서 멈췄다.
“아는가.”
그 순간 도은강은 말했다.
“제아무리 무인이라 한들 상대와 조우하며 가장 먼저 급소부터 살피며 살로를 찾는 이는 없다. 내가 아는 한, 스스로를 백도 무림인이라 칭하는 이들 중에서는.”
흠칫, 목리원의 몸이 떨렸다.
“당연하다. 살인은 위험부담이 크고 그들이 바라는 명예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챘던 것인가.
목리원은 이를 악 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천살성을 잘 통제해왔다 자부해도, 목리원이 천살성에 의해 자리 잡은 무의식적인 습관까지 지울 정도로 부동심이 짙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부동심과 별개로 그런 습관은 별을 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신을 경계한 것뿐이오. 실례가 되었다면 사죄하지.”
“글쎄.”
도은강은 여전한 무표정이었다.
그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눈을 감으며 음미하다, 이내 한마디를 더했다.
“사과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한다.”
“다른 것?”
도은강이 찻잔을 내려뒀다.
목리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놈.”
목리원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흑도로 전향할 생각이 없나. 조건은 좋게 쳐주지.”
그렇게 정적이 떠오른다.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목리원은 그 순간 직전까지 떠올리던 긴장감이 모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은 밝혀진 그의 성정이다.
도은강은 합리와 이성을 중시한다. 또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니 드러난 행동과 인과를 통해서만 사람을 판단한다.
‘아.’
그러니 도은강은 무의식적으로 살의를 뿜는 자신을 보며, 회유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
목리원은 곧장 답했다.
“싫소.”
도은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상 외의 상황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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