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2 십육장 - 집결, 회의 (4)
* * *
진왕 제갈벽.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약식 진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제까지 중원에 존재하는 진법이란 게 그랬다.
고정된 자리에 정해진 순서대로 기물을 배치해 한정된 형태로만 사용이 가능한 수법.
그렇기에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는 전장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수법.
그 관념을 깬 것이 바로 제갈벽인 것이다.
그는 최소한의 기물에 내공을 실어 어느 상황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전투용 진법을 개발했다.
당연 마일석 또한 혈사의 시대에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런 만큼 제갈벽의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갈벽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느냐?
마일석은 바로 고개를 저을 수가 있었다.
“여전히 심심한 놈이구나.”
마일석은 코웃음을 쳤다.
제갈벽이 고개를 숙였다.
“세가의 가주로서 지켜야 할 품위가 있는 줄로 아는지라.”
“검치 놈 욕이라도 하는 게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권왕 놈도 그 말을 들으면 참 좋아하겠구나.”
“호방한 분이시지요.”
제갈벽은 무표정했다.
다만 무표정한 것 정도가 아니었다.
대체 사람인지 석상인지 모를 정도로 감정선이 얇아 말을 나눠도 좀처럼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에 따른 불편함이 있었다.
‘아들놈과는 영 딴판이구만.’
마일석은 용봉단의 전각에서 본 제갈산을 떠올렸다.
족제비 같은 인상에 풍부한 표정.
암만봐도 저 굳은 얼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닮은 점이라면 눈썹 모양 정도일까.
생각을 떠올리자 마일석은 의아함이 차올라 물었다.
“한데 바로 창성 놈을 만나러 가는 게냐?”
“그렇습니다. 맹에 왔으니 인사를 드려야지요.”
“네 아들놈은?”
제갈벽이 멈칫했다.
그것은 마일석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옅은 반응이긴 하나, 그를 몇십 년 간 알고 지낸 중 그가 이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
“응? 저기 용봉단 전각에 있더구나. 먼저 다녀와라. 그놈한텐 내가 말해둘 테니.”
“어찌 그러겠습니까. 손으로 왔다면 가장 먼저 주인을 뵈어야 하는 게 도리일진대.”
“딱딱한 놈.”
마일석이 쯧쯧 혀를 찼으나 제갈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와중 사이에 껴 눈치를 보던 진건이 말했다.
“자, 자자, 왜 그리 험악하게들 구시오. 그래, 제갈이 이른 대로 우리 다 같이 백운이 놈 먼저 보고 오십시다. 응?”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게 성격에 안 맞는 짓을 하려니 좀이 쑤시는 듯했다.
마일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꾸나.”
마일석은 맹주전을 향해 걸어갔다.
*
맹주전의 전경은 고아했다.
곳곳에 핀 꽃이나 높게 솟은 대나무 같은 것들이 청량함을 일게 한다.
꽤 신경 쓴 티가 나는 부분은 역시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자연지기.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공력의 상승을 꾀할 수 있으리란 생각까지 드는 지경이었다.
“좋은 데 지내는구먼.”
진건이 말했다.
마일석 또한 공감했다.
“출세했네.”
창성 사백운.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전 사백운은 한미한 무관 출신의 낭인이었다.
금전과 관련된 일에는 영 서툴러 언제나 밥을 굶기 일쑤인 사내였고, 그런 주제에 모은 돈은 길가의 거지들에게 밥을 사주는 데 썼으니, 당시 그를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그리 말했다.
사백운은 평생 가난하게 살 인간이라고.
“역시 세상 일은 모르는 거구만!”
진건의 말대로였다.
세상 그 누가 알았을까.
그 후줄근하던 창지기가 무림맹주 자리에까지 오를 줄.
묘한 감상을 느끼며 세 사람이 맹주전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다들 오셨구려.”
중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방향을 바라보니 암자에 앉아 싱긋 웃고 있는 사백운이 있었다.
깔끔한 남색의 비단옷과 정갈하게 정리한 머리칼이 인상적이다.
“고놈 참 잘 지내는구나.”
마일석이 반가운 기분에 피식 웃었다.
사백운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먼 길은 무슨, 동냥이나 하면서 오니 금방이더구나.”
“여전하시구려. 다른 두 분은 오는데 힘든 일이 없으셨소?”
“나는 뭐, 여기 제갈 따라 편히 왔수다!”
진건이 환히 웃자 제갈벽이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네도 크게 변한 게 없군. 오랜만이네.”
그리 말한 사백운이 세 사람을 자리로 이끌었다.
“내 좋은 술을 준비했소. 와서 한 잔 드시오.”
진건이 가장 신나 쫄래쫄래 암자에 올라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술잔부터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마일석이 표정을 찌푸렸고 사백운이 껄껄 웃었다.
“술 맛 좋구먼! 어이, 백운이! 여기 혹 기녀는….”
“야 이놈의 시끼야!”
“장난이오. 장난!”
마일석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따라 올라왔다.
그러자 제갈벽도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일단 한잔 하고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암자에 둘러앉은 네 사람이 술잔을 기울였다.
나누는 이야기라 해도 별것 없었다.
본격적인 회의에 관한 내용은 모든 참가자가 다 모이면 회의실에서나 할 것이었으니, 오가는 대화라 해봐야 그간의 근황 보고가 끝인 것이다.
“거 백운이 자네는 참 잘 컸어! 밥 한 끼만 사달라고 부탁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벌써 이십 년도 지난 얘기를 하시는구려.”
“늙어서 그래! 늙어서!”
“늙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필히 그리 말해야 할 터다.
마일석은 가만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형님도 있으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리 타지로 나오니 더욱 안타깝다.
이런 자리가 있다면 목선오가 언제나 함께 앉아 누군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혹 무공에 관한 의견이 나뉠 때는 즐거이 논검을 나눴다.
사실, 남궁혁이 있을 때면 더욱 그랬다.
-협의지. 검을 휘두르는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협의요.
-힘없는 협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나. 검군, 협의는 경지를 쌓은 후에야 고민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검룡께선 평생 협의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시겠구려. 나를 넘을 일이 없으실 테니.
-나와라 검군, 비무다.
남궁혁이 좀 놀리는 맛이 있는 사내던가.
목선오는 때때로 남궁혁을 골려주겠다고 그를 도발했고, 그럴 때면 잔뜩 화난 남궁혁을 진건과 사백운이 달랬다.
염소소는 껄껄 웃다 내기판을 벌이기 일수였다.
‘참….’
그런 순간이 있었을진대 어찌 이리 되었을까.
마일석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떠올랐다.
“…걸왕님.”
사백운이 말했다.
마일석이 고개를 들자 무언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한 사백운이 보였다.
마일석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쉬이 알 수 있었다.
하여 답했다.
“모른다. 형님이 어디 계신지는.”
그 말에 다른 두 사람의 입도 다물렸다.
“혈사 이후 종적을 감추셨어. 나 또한 형님을 찾아다녔으나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행인 일이 있었다.
목선오의 부재에 관한 아쉬움이 표정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줬다는 사실이 그랬다.
이런 얼굴이라면 이들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판단은 옳았다.
“…그렇소.”
사백운의 얼굴에도 씁쓸함이 감돌았다.
진건은 말을 멈추곤 술잔을 기울였다.
제갈벽은 여전한 무표정이다.
“살아는 있으시겠지. 형님이 어디 보통 대단한 무인이시더냐. 하지만 아마 오지 않으실 게다. 형님께선 약속을 금과옥조로 여기시는 분이니.”
사백운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잔을 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후회되는 일이 있소.”
“형님과 관련된 일이더냐?”
“그날 내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떠나가질 않소.”
“이제와 그런 이야기를 해서 뭣 하겠느냐.”
“그냥 그렇다는 얘기요.”
사백운이 피식 웃었다.
“세월이 나를 이리 만들었나 보오. 나이가 드니 후회만 느는 것이 아니겠소.”
마일석은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목선오가 강호에서 쫓겨난 것은 비단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백운의 선택은 분명 합리적이었으며, 또한 상식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었다.
“되었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 하자꾸나.”
마일석은 화제를 끊어버렸다.
아직 이들이 목선오를 추억하고 있다.
마일석은 그 사실이면 족했다.
그렇게 다시금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음, 다른 분들도 오셨구려.”
사백운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 자리는 무림맹의 입구가 있는 곳이었다.
마일석 또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검치놈, 그리고….”
불성 원명.
동쪽에서 오는 이들이 동행해 온 듯하다.
*
남궁혁은 팔짱을 낀 채로 무림맹 앞에 섰다.
그의 앞에는 남궁세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남궁혁의 자랑과도 같은 손주가 서 있었다.
“조부님을 뵙습니다.”
“경지가 올랐군.”
“머물러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여 올랐습니다.”
“훌륭하다.”
남궁혁은 흡족한 얼굴을 만들었다.
과연 남궁세가의 혈육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궁혁은 마냥 칭찬으로 말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초절정이 되었으니 적어도 서른에는 초월에 닿아야 할 터다.
아무렴, 목선오의 제자가 성장하는 속도가 좀 빠르던가.
경쟁심 앞에서는 소년이 되어버리는 남궁혁은 자식 경쟁에서만큼은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정진하라.”
“예.”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었다.
바로 옆에선 권룡 일운이 불성 원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길에 우연히 만나 함께 오게된 터라,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방장님! 오시는 길은….”
“아주 편했다. 검왕께서 도와주신 덕에.”
일운의 고개가 남궁혁을 향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용봉지회 이후 처음이지요! 소림의 제자 일운이 검왕님을 뵙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선하다.
하지만 남궁혁은 그에게서 꽤 그럴싸한 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보다 투기가 강해졌다.’
불가의 제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성질.
하지만 남궁혁은 이런 인종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네놈 또한 정진하라.”
“깊이 새기겠습니다!”
“자, 이리 서 있기도 뭣하니 안으로 안내해주겠느냐?”
원명의 말에 일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네 사람은 맹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하게 꽂히는 시선들이 있다.
선망의 시선.
전대 강호의 절대자라는 이름은 절대 가벼운 법이 없기에, 맹의 무인들이 쏘아내는 시선은 그리도 따가운 지경이었다.
남궁혁은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분이 검왕…!”
“천하제일검!”
“에이, 천하제일검은 검서….”
홱! 남궁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자위에 핏발이 서 있었다.
“흐익!”
말을 나누던 무인 둘이 깜짝 놀라 도망쳤다.
“검왕.”
원명이 말했다.
“그리 아이들을 겁박하는 것은 좋지 못하오.”
“겁박한 일 없다. 그저 바라봤을 뿐.”
“시선 또한 누군가에겐 겁박이 될 수 있소. 부디 자비를 품어주시오.”
“부처의 말씀인가?”
“세상 사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오.”
원명이 껄껄 웃었다.
그 곁에선 일운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원명의 말을 새겨듣고 있었다.
남궁혁은 생각했다.
‘불성, 역시 별나다.’
굳이 저런 투기 넘치는 놈을 주워서 불자로 키우는 이유가 뭔가 싶다.
하지만 거기까지.
남궁혁은 굳이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생각이 있겠지.’
남궁혁의 관심은 오로지 목선오와 목리원 뿐이었다.
“아참, 운아.”
와중 원명이 일운을 불렀다.
“예!”
“고기 냄새가 너무 나더구나. 옷은 갈아입고 오지 그랬느냐.”
일운이 바짝 굳었다.
식은땀을 질질 흘렸다.
원명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불자란 육식에 취미를 들여선 안 되는 법이란다.”
“그으….”
남궁혁은 그 촌극에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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