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 십육장 - 집결, 회의 (1)
* * *
청해에서의 일이 마무리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무림맹주의 대회의 소집.
알음알음 알 만한 사람만 알았던 중원 강호의 집결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혼란이 일고만 것이다.
누군가는 환호했다.
20여년 전 혈사 이후 다시 하나로 뭉친 강호의 모습에 혈기를 띠며 말하는 바가 있었다.
“중원 강호의 힘을 보여줘야 할 때요!”
누군가는 불안감을 삼켰다.
먼 과거, 혈사를 직접 겪었던 이들이 대부분 그랬다.
“또 피가 흐르겠구려.”
그 외에도 수많은 반응이 있었다.
기대감, 두려움, 슬픔, 분노.
온갖 감정이 중원 무림 전체를 집어삼켰으며, 그 끝이 향하는 자리는 모두 하나였다.
천마신교(天魔神敎).
어쩌면 혈천교보다 더욱 두려울 세외 마귀들의 땅.
강호는 마귀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제까지와 다른 거친 흐름을 띠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번잡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말해 무어 하겠는가, 용봉단이었다.
“검룡! 수련은 그만하고 나오십시오! 대체 준비는 언제 할 생각이십니까!”
당화서의 호통이 연무장에 울린다.
남궁진천이 깨갱하며 검을 거둔 채 물러났으나 그녀의 호통은 그칠 줄 몰랐다.
“일운 스님! 보고는 대체 언제 들어옵니까! 소림의 일정 정도는 미리 받아놨어야지요!”
일운이 쪼그라들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백봉!!! 이 년은 또 어딜 간 게야아아악!!!”
당화서의 호통이 용봉단의 전각을 넘어 무림맹 전체에 울릴 정도가 됐다.
이리 당화서가 열을 내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용봉단이라는 단의 특수성 탓이었다.
구파일방과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모인 단.
그것은 본래는 성립할 수 없는 전제를 마교의 침입이란 명목으로 억지로 성립시킨 단이었다.
그런 만큼 구파일방과 세가가 모두 모이는 이 상황에서 그들은 맹의 업무가 아닌 각자의 본래 소속으로 돌아가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이 빌어 처먹을 인간들이 도통 말을 들어 먹을 생각을 않는다.
당화서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지난 일을 되새겼다.
먼저 남궁진천.
남궁세가의 가주와 태상가주인 검왕을 맞이해야 할 인간이 제 수련에 푹 빠져 일을 할 생각을 않는다.
그리고 일운.
소림 또한 불성(佛星) 원명이 오는 상황인 만큼, 그에 걸맞는 준비를 미리 해두어야 하건만 일운은 도통 일머리가 없는지 버벅대기만 할 뿐이다.
불성 원명은 다만 사성육왕에 오른 무인이란 것 외에도 소림의 방장, 그리고 전대 무림맹주라는 직위까지 있는 터라 모심에 각별한 준비가 필요한 사람임에도 말이다.
그래, 그 정도면 낫다.
일단 시키면 하긴 하지 않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목 소협!”
“옙…!”
“가서 제갈 놈이랑 백봉! 둘 다 잡아 오십시오!!!”
“아, 알겠소!”
이런 순간이면 그 누구보다 사고뭉치가 되는 ‘놈’과 ‘년’이 문제였다.
혜운은 아미파가 온다는 말에 벌써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제갈산은 제집 사람들이 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내 잠적 중이다.
당화서는 진이 쭉 빠져 집무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여하튼 도움 되는 인간이 없구나.”
그나마 목리원의 소속이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는 정도인 게 다행이다.
검성 목선오가 이 자리에 오는 것이었다면 저 일머리없는 목리원의 일도 모두 당화서의 것이 됐을 것 아닌가.
한숨이 푹푹 삐져나온다.
당화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자 당화서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소집령]
그런 글귀가 적힌 서신이었다.
당화서의 표정이 흐려졌다.
이 소집령은 당화서에게 사천당문의 주인으로서 대 회의에 참석할 것을 명하는 소집령이었다.
당화서는 속이 아려왔다.
‘가주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미 사천당문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아직 당화서에게 당문의 주인이란 자리는 너무 께름칙하고 먼 개념이었다.
과연 자신이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몫을 다 할 수 있을까.
당화서는 단원들의 일에 골머리를 싸매는 중에도 그런 걱정이 시시각각 차올라 한숨이 늘어가는 와중이었다.
“…참 버겁구나.”
결국 홀로 푸념할 뿐이었다.
*
맹에서도 가장 외진 골목.
근처에 똥간이 몰려 있어 누구도 찾지 않는 골목 앞.
그곳에서 제갈무연은 제갈산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 왔수?”
제갈산이 귀를 후비적대며 바지춤을 여몄다.
제갈무연은 코를 막으며 말했다.
“네가 심란하면 똥간부터 찾는 걸 가문의 누가 모르더냐. 넌 나이를 그리 먹고도 그것 하나를 조절 못하는 게냐?”
“숙부가 용봉단에 있어 보시오. 글쎄 누님이 틈만 나면 내 배에 설사독을 박아대는데 덕분에 똥구멍이 다 헐렁해진 기분이오. 내 탓이 아니란 말이오.”
제갈산이 껄껄 웃었다.
제갈무연은 미간을 좁혔다.
“…가주님이 오신다.”
“그래서?”
“맞을 준비를 하거라. 소가주답게.”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러시오.”
“가주님께선 언제나 너를 신경 쓰셨다.”
“그래서 그랬었소?”
제갈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언제나 칠칠맞게 웃어 족제비 같던 얼굴이 지금만큼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그 잘난 가주님은 그리도 날 신경 쓰셔서 내버려 둔 게요?”
“…그것이 최선이었다.”
“숙부께서 아는 최선과 내가 아는 최선은 참 다른 듯하오.”
“아직도….”
“예이예이, 아직도 내가 그러오. 소인배에 구질구질하기까지 해서 가주를 보기가 싫소. 그러니 알아서들 하라고 하시오. 왜, 나 말고도 소가주 할 사람은 많지 않소? 에잉, 가보겠소. 여기 똥간이 시원찮아서 똥도 안 나오네.”
제갈산이 휘적휘적 손을 휘저으며 돌아섰다.
제갈무연은 입을 다문 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직도.’
조금도, 제갈산의 속에선 지난 일이 잊히지 않은 듯했다.
떠오르는 것은 삐죽 솟은 눈꼬리가 참으로 무서웠던 형수의 얼굴이다.
-무연아, 우리 산이 좀 잘 부탁하마. 너만큼은 산이 편 좀 들어다오. 응?
‘누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병력의 운용, 정보의 규합, 그리고 전략과 진법.
그 모든 것은 조금만 노력해도 금방 답이 보이는 문제이건만, 이런 사람 문제 만큼은 제갈무연도 도통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감정이란 놈만큼은 ‘이것이 옳다’라는 명확함이 없어 곤란하기만 하단 말이다.
‘얄궂기도 하시지.’
왜 이런 걸 부탁하셔선.
제갈 무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서 버렸다.
*
목리원은 겨우 백봉 혜운을 찾아냈다.
무림맹 입구, 언젠가 제갈산과 혜운이 협력해 가정을 파탄내려 했던 포목의점 맞은편 객잔이었다.
“스, 스님….”
“으잉? 목 시주님이네.”
목리원은 땀을 삐질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낮부터 술을….’
그것도 스님이, 만취해서 즐기고 있었다.
“이리와요.”
혜운이 붉어진 얼굴로 껄껄 웃으며 손짓했다.
목리원은 우물쭈물 그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당화서의 명이 그녀를 데려가는 것인 만큼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끄으… 취한다.”
목리원이 자리에 앉자 혜운이 트름했다.
그러다 목리원에게 말했다.
“단주님이 오래요?”
“그, 그렇소….”
“그냥 내버려두면 참 좋을 텐데….”
혜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리원은 참 많은 말을 참아야 했다.
‘…이번 대 대제자이니 참가하는 게 맞는 것 같소.’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할 말이 목구멍에 맴돈다.
그런 목리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운은 푸념을 시작했다.
“이봐요. 목 시주님.”
“마, 말하시오.”
“스승님이 올 거예요. 그럼 분명 내가 하고 다닌 일도 알아차리시겠죠?”
“그거야….”
“큰일이란 말이야. 남자 좀 만나보려고 나왔더니 머리가 빡빡 밀려서 끌려가게 생겼다 이 말이에요. 응? 저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조금도 불쌍하지 않소.’
“에휴, 여자가 남자 만나는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그럴까.”
‘스님으로선 잘못이 맞소.’
“그렇잖아요? 음양의 조화. 이거 중요한 거잖아. 스님으로서 본분을 보여야 하는 거잖아.”
목리원은 끝까지 말을 참았다.
이후로도 혜운의 푸념은 한참이나 이어졌는데, 그 끝에서 나오는 결론은 그랬다.
“아, 끌려갈 땐 가더라도 포목점은….”
라고 말하는 혜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목점을 바라봤다.
그곳엔 부부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비단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목리원은 그들이 너무 불쌍하게만 보였다.
‘어찌 선남선녀로 태어나셔서….’
포목점 부부는 맹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선남선녀에 사이가 돈독한 부부였다.
또한 용봉단과도 인연이 깊은 구석이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용봉단의 창단식에서 입었던 백의가 저 포목점에서 만든 것이었다.
“딱 한 입만 하면 되는데….”
혜운이 입맛을 다셨다.
목리원은 생각했다.
혜운은 역시 백봉이 아니라 색봉이 어울린다고.
“아, 스읍….”
혜운이 침을 삼켰다.
목리원은 포목점주의 정절에 심대한 위기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내, 내가 큰 힘은 못 되겠지만!’
부부의 행복은 지켜주는 게 옳다.
목리원이 판단하기로, 그곳에 ‘협(俠)’이 있었다.
“스, 스님! 이제 슬슬 가야 하오!”
“잠시만요. 저기 점주님 아내 분 안으로 들어가잖아. 지금….”
목리원은 눈을 질끈 감고 점혈했다.
툭툭툭, 혈을 짚자 혜운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크!”
목리원은 쓰러지는 혜운을 붙잡아 그대로 둘러멨다.
“묵룡 대협.”
객잔주가 다가왔다.
목리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닷 냥이오. 백봉이 마신 술.”
목리원은 울상을 지으며 대신 값을 치렀다.
*
그렇게 전각으로 돌아왔다.
목리원은 진이 다 빠진 채로 당화서에게 혜운을 넘기고 전각 복도를 걸었다.
터덜터덜 걷는 움직임엔 닷냥에 대한 안타까움과 혜운의 진상짓에 의한 피로가 묻어 있었다.
‘여하튼 참 별난 분이시지.’
나쁜 사람은 아닌… 아니, 나쁜가?
목리원은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특이한 분으로 하자!”
그래, 그게 맞겠다.
목리원이 환하게 웃는 순간이었다.
“뭐가 특이하다는 게냐?”
멈칫, 목리원의 발걸음이 멎었다.
이곳에선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울려왔던 까닭이다.
설마 환청을 듣는 건가.
근래의 사건들에 정신적으로 몰려 있기라도 했던 걸까.
목리원은 한껏 놀라 굳어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노인에 눈을 큼지막하게 만들었다.
남루한 복장, 이젠 새하얗게 새버린 머리와 때가 잔뜩 묻은 얼굴.
너무나도 그리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걸왕님.”
“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구나.”
걸왕 마일석,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요 고얀 놈아.”
목리원은 바로 내달리며 양팔을 벌렸다.
“걸왕님!!!”
그리고.
“징그럽다 요놈아!”
빠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딱밤을 맞았다.
목리원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럼에도 목리원은 웃었다.
“여전히 손이 매우십니다!”
“당연하지, 내가 아직 네가 비벼도 될 군상은 아니다.”
무려 두 계절만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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