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십사장 - 청룡비무회 (18)
* * *
본선 32강, 그것이 시작되는 닷새 뒤가 결행일이다.
현공은 그 나날 간 소교주의 광증에 일이 틀어질 경우를 내내 대비했고, 정확히 본선을 하루 앞둔 날 전령을 맞이했다.
그리고 크게 웃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막혔던 길이 뚫렸다.
*
같은 시각, 당화서는 집무실에 앉아 한참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제껏 밝혀진 여러 정황과 군사 제갈무연이 알아낸 천하상단에 관한 사실들.
그 모든 것이 목리원의 다음 상대인 일권 강오설을 마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을 깨달은 당화서는 당장 비무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불발됐다.
-모든 증거가 정황상 증거입니다. 물증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함부로 그를 몰아갈 수 없습니다.
군사 제갈무연의 말이었다.
무어라 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당화서도 알았다.
다만 목리원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정황 증거를 들이밀며 강오설을 잡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렇지 않나, 혹여 그가 마인이 아닐 경우엔 그 경솔함이 어딘가 숨어있을 마인들에게 이쪽의 정보력을 드러내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겠나.
당화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 소협이 천살성인 것을 말할 수도 없고….’
천살성과 극마지체.
목리원을 이루는 그 요소들은 마인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그의 이지를 흐리는 경향이 있었다.
당화서조차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고, 당화서가 이번 비무를 불발시키려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지만 도통 방법이 없으니 답답함만 더 치밀고 있었다.
그런 중이었다.
“계시나요?”
하오문주 서예가 집무실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요즘 들어 꽤 자주, 무슨 이유인지 용봉단의 전각을 찾는 일이 많아진 사람인데, 그녀가 전해주는 정보의 질이 꽤 좋은 터라 당화서는 서예의 출입을 굳이 막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러 온 걸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당화서가 서예를 반겼다.
“아, 오셨습니까.”
“네, 지나가다 들렀네요.”
“다른 용건은….”
“오늘은 정보 없어요. 그렇게 받아 가셨으면 슬슬 정보료라도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화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서예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다 냉큼 집무실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냥 내일이 묵룡의 비무잖아요. 그래서 단주님은 어쩌고 계시려나 싶어서 온 거예요.”
“…목 소협의 비무인데 왜 저를 찾아옵니까?”
“응? 단주님 묵룡 좋아하잖아요. 좋아하는 사람 비무에 얼마나 신경쓰시나 싶어서.”
콰당탕!
당화서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는데, 서예는 그 반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있었다.
“알 사람은 다 아는 걸 가지고 새삼 놀라시네.”
“…또 누가 압니까?”
“중원 사람들 모두요.”
라고 서예가 장난스레 말하자, 당화서는 순간 ‘중원을 멸망시켜야 하나’라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어 떠오르는 생각은 그리도 티 나게 행동했나 하는 것.
당화서는 지난 스스로의 모습을 반추했다.
그리고서야 인정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제갈산 같아졌을까.
문득 했던 일을 되돌아보니 추해도 이렇게 추할 수가 없었다.
수치심과 자괴감이 엄습했다.
그것에 당화서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서예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해요? 누구 좋아하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한창때잖아요?”
“…이 얘긴 그만하도록 하지요.”
“좀 더 하고 싶은데요? 반응 보니까 궁금해지는 게 있거든요. 단주님, 혹시 막 사내가 되는 남자애들처럼 묵룡으로 엄한 생각이나 하면서 자는 거 아니죠?”
당화서의 눈자위에 핏발이 섰다.
서예가 ‘오’하고 놀랐다.
“세상에나.”
“…안 합니다.”
당화서가 이를 짓씹으며 말했다.
서예는 입을 가리며 놀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요. 그럴 수 있죠. 전 이해해요.”
“내가 잊은 게 있군. 암만 도움을 줬다 한들 당신도 흑도라는 것을.”
치이익―
당화서의 손에서 독기가 흘러나와 집무실 책상을 녹이기 시작했다.
서예는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가며 말했다.
“음, 저는 응원할게요. 아참, 그리고 조언하면 그냥 상상으로만 엄한 짓 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러내야 상대가 아는 법이에요. 아시죠?”
“내 알아 하겠소.”
“그렇다고 하시면 이만.”
쿵, 하고 서예가 집무실 문을 닫고 도망쳤다.
당화서는 그 뒤로도 꽤 오랜 시간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
비무날이 밝았다.
32강의 첫 경기인 만큼 역시 비무장과 그 주변은 온통 북새통을 이뤘고 그런 까닭으로 단원들은 비무장까지 향하는 길에도 적지 않은 심력을 써야 했다.
“묵룡 대협! 여기 좀 봐주시오!”
“묵룡 대협! 나는 강서의….”
“에잇! 비키시게! 나는 섬서의….”
와중에 그놈의 혼담을 추진해보고자 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으나, 다행히 그 목소리는 다른 소란들에 묻혔다.
그렇게 도착한 비무장 대기실.
“어휴, 비무회보다 오늘 길이 더 힘들구먼.”
제갈산이 이마를 슥 닦으며 말했다.
남궁진천은 몰린 인파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다.
“고작 그런 것에 무너지는 걸 무인이라 할 수 있나? 부끄러운 줄 알아라.”
“남궁형을 볼 때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은 왜 없는 것인지 이유를 알게 되오.”
남궁진천이 눈을 부릅떴고 오늘은 서예가 말렸다.
“뭘 잘했다고 눈을 부릅떠요? 남 무시하는 말투 좀 고쳐봐요.”
딱, 하고 까치발을 들고 남궁진천의 이마를 때렸는데, 당화서가 보기에 참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남궁진천이 반항을 하지 않은 것이다.
꼭 맹수 앞의 초식동물이 된 것마냥 얌전해졌다면 설명이 되겠는가.
대체 어떻게 저 남궁진천을 구워삶은 건지 의아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단주님은 또 왜요?”
서예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화서는 전날의 일이 떠올라 눈을 좁히다,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일단 저는 목 소협과 비무대 앞까지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백검대주님을 만나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아, 소저가 함께 와주시는 것이오?”
목리원이 해맑게 웃었다.
당화서는 그 모습에 순간 입꼬리가 솟으려는 것을 참곤 답했다.
“예, 겸사겸사긴 하지만 중요한 날이 아닙니까.”
“고맙소!”
“그럼 가시지요.”
“알겠소! 다들 이곳까지 와주셔서 고맙소! 응원 부탁하오!”
목리원이 단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나온 당화서는 복도를 걷던 중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말해야 하는가.’
오늘 상대가 마인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해야 할까.
혹 말해서 목리원을 더 긴장케 만드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 잠시 이어졌고 이내 당화서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말하자.’
긴장한다고 한들 목리원은 목리원이다.
상대가 마인이 아니라면 무조건 이기리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나.
상대가 마인이 맞다면 목리원의 천살성이 반응해 비무대 위에서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다.
“목 소협.”
“음? 왜 그러시오. 소저?”
목리원이 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에 당화서는 입술을 달싹여 그간 알아낸 사실을 목리원에게 말했다.
“…오늘 상대가 마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가능성의 이야기입니다. 그간 맹에서 했던 조사에 대해서는 아시지요?”
목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이 숨어들었다는 것 정도는….”
“제가 판단한 바로는 강오설이 그 마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목리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당화서는 깊게 숨을 내쉬곤 목리원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아니길 바랍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목 소협이 아주 곤란해지겠지요.”
곤란한 정도가 아니다.
분명 천살성은 이 땅에서 가장 기피당하는 별이 맞았고, 혹여 마기에 그것이 드러난다면 목리원이 이제까지 쌓은 모든 게 무너져내릴 게 뻔하다.
당화서는 목리원의 손을 꼭 잡았다.
“…조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가 검을 쥐는 손을, 그 손가락 마디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럴수록 당화서의 얼굴엔 걱정이 짙어져만 갔다.
“이제까지 그랬듯 목 소협이 알아서 잘 하실 수도 있겠지만, 큰 자리인만큼 걱정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무슨 부탁이오?”
실례가 되는 부탁.
하지만 그럼에도 당화서는 내뱉었다.
무인에게 하기엔 꽤나 무례한 말을.
“기권도 고려해 주십시오.”
목리원의 눈이 커졌다.
공간에 침묵이 일었다.
당화서는 섣불리 말을 내뱉지 못하는 목리원에게 말을 더했다.
“예, 용납할 수 없으시겠지요. 목 소협은 승부에서 물러남을 떠올리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렇기에 그저 고려만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만약, 아주 만약의 상황.
목리원이 마인에게 자극당해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보이는 걸 상상하면 속이 다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왜인지 그 순간이 오면 목리원을 잃을 것만 같아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하여 당화서는 목리원의 손을 이끌었다.
불안, 바람, 그런 종류의 감정을 안은 채 목리원의 손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
“조금, 걱정이 듭니다. 나쁜 일이 생겨 목 소협을 잃을까 하는 걱정이.”
순간 목리원의 손끝이 흠칫했다.
당화서는 차마 이런 부탁을 하고 그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괜히 부끄러워지는 마음 또한 존재함에, 당화서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목리원의 손을 놓았다.
“너무 붙잡아두었군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대로 복도의 옆 길로 빠져나갔다.
오늘 혹시 있을 사고를 대비해 백검대주와 근처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등 뒤로, 당화서는 목리원이 우뚝 멈춰있는 것을 느꼈다.
*
이후 비무대 위를 향하는 목리원은 뺨이 조금 붉었다.
직전의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까닭이다.
떠올리는 생각은, 당화서에겐 미안하게도 마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당화서가 했던 말이나 보였던 기색,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피부에 닿았던 감촉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손끝을 매만지게 되는데, 그럴수록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이 심해져 머리가 새하얘지는 지경이다.
감각을 털어내 보려고 해보지만 그럴수록 더 들러붙는다.
목리원은 그 오묘하고 뜨거운 기운에 이젠 목까지 다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어찌 이리도 속을 진탕시켜 집중을 흐리게 만드는지.
그것이 참 너무하게 느껴지다가도, 직전 당화서가 보였던 일렁이는 눈망울을 떠올리니 그 감정조차 이내 스러지고 만다.
‘정신 차리자!’
짝짝, 목리원은 제 뺨을 두드렸다.
그리곤 눈을 부릅뜨며 복도를 나왔다.
비무를 앞뒀으니 잡생각은 여기까지.
또한 방심하지 않고 절치부심해야 할 이유가 늘었으니 부동심을 유지해야 할 터다.
“양측 위치로!”
심판이 말하자 이윽고 상대가 나타났다.
일권 강오설.
분명 그런 이름을 한 상대였고, 마인으로 추정되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목리원은 멈칫했다.
‘…저자가?’
쿵, 하고 목리원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표정은 점차 굳기 시작했고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은 위기감과 기시감이었다.
봉두난발로 어질어진 장발, 흰자 위로 핏발이 가득 서 있는 성난 눈, 그리고 왜인지 느껴지는 피냄새까지.
쿵, 쿵, 심장이 더욱 거세게 박동한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속에 가만 잠들어있던 어떤 욕구가 점차 크기를 불려온다.
“일권 강오설! 묵룡 목리원!”
그리 심판이 호명했다.
강오설이라 불린 사내가 답했다.
“시작해라.”
라고 말하며 강오설이 기파를 토해내는 순간, 목리원은 이지가 조금 더 흐려지는 기분을 느꼈다.
느닷없기만 한 변화, 그것은 분명 돌연 차오른 살심(殺心)에 의한 것이었다.
단번에 목리원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인이 맞다.’
더해, 그저 그런 마인이 아닌, 어쩌면 육마보다 더한 마인이 저 사내이리라는 것을.
목리원은 재빨리 입술을 달싹여 비무를 멈추고자 했다.
하나 그것보다 심판의 말이 빨랐다.
“개(開)!”
강오설이 순식간에 목리원의 코앞까지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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