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십삼장 사천, 결 (7)
* * *
안개 너머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과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경관이라 해야 할까.
공기가 맑다.
피부 위로 닿는 습기가 촉촉하다.
물소리가 청량하다.
목리원은 고개를 들었다.
별밤 아래 냇물이 조르르 흐르는 길옆으로 엉덩이를 깔고 앉은 바위가 반들반들했다.
그 사이 새초롬 고개를 내민 들풀은 앙증맞았고, 간격을 두고 솟아 있는 나무가 우아하게 가지를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이곳이….’
당문의 금지.
영물이 살아 숨 쉬는 신비의 땅.
멍한 와중, 목리원은 뒤늦게 단원들이 떠올라 그들을 살폈다.
“아! 다들 괜찮소?!”
환각에서 빠져나온 게 직전의 일.
끔찍해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다른 단원들도 다르지 않았으리란 생각이었고, 실제로 맞았다.
단원들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당화서는 식은땀을 닦고 있었고, 남궁진천은 현실감을 되찾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이었다.
혜운과 일운은 진이 빠진 듯 늘어져 있었다.
하나, 그들보다 더욱 목리원을 걱정케 하는 게 있었다.
“…제갈형?”
제갈산의 기색이 날카로웠다.
깊게 가라앉은 눈과 저릿할 정도로 풍겨오는 살기.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것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이에게나 보일 정도의 살기였다.
당황스러웠다.
단언컨대 목리원은 제갈산의 이런 모습은 꿈에서라도 상상해본 일이 없었다.
부름을 듣지 못한 듯 제갈산이 얼굴을 쓸었다.
목리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재차 그를 불렀다.
“제갈형…?”
“…아.”
제갈산이 고개를 들었다.
치워진 손 뒤로 드러난 그의 얼굴 위론 어느새 미소가 걸려있었다.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그래도 목리원이 아는 미소였다.
의아함이 치솟는다.
‘대체 무엇을 들었기에….’
저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목리원은 물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시오….”
“이런, 내가 걱정을 끼쳤나 보군. 괜찮네. 조금 기분 나쁜 목소리를 들어서.”
“정말 괜찮은 것이오?”
“그럼, 내가 누구인가. 바로 이 강호의 진짜 대협 제갈산이 아니던가!”
제갈산이 씨익 웃으며 팔을 흔들어 보였다.
목리원은 그제야 그에 대한 걱정을 조금 덜어둘 수 있었다.
‘으음… 더 깊이 파고들어선 안 될 일이겠지.’
제갈산에게도 굳이 말하지 않은 아픈 과거쯤은 있으리라.
목리원은 구태여 제갈산을 채근하지 않았다.
“다들 무사히 빠져나온 듯하군요.”
당화서가 정신을 되찾고 말했다.
목리원은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 피로한 낯빛이었다.
“소저는 괜찮은 것이오?”
“예, 버틸만했습니다. 하지만….”
당화서의 시선이 단원들을 한차례 훑었다.
“…바로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는 듯하군요. 조금만 쉬어가지요.”
단원들은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
냇가에서 세수하며 정신을 일깨우길 잠시, 한데 둘러앉은 단원들은 진법의 악랄함에 치를 떨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주로 혜운이 말했다.
“와, 얼마나 끔찍하던지. 세상에 스승님 목소리로 제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치더라구요. 대머리가 된 저를 암자에 감금하겠다지 뭐예요? 그게 끝이면 또 몰라,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 목소리가 죄다 튀어나오는데 목소리 수십 개가 겹치니까 아주 미쳐버릴….”
그녀답지 않게 몸까지 부르르 떠는 움직임에 단원들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와중 목리원은 그녀가 거쳐 간 남자가 두 자릿수에 달한다는 것에 작은 경악을 토해냈다.
“혜운 스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운이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혜운이 물었다.
“아, 일운 스님은 무슨 말을 들었어요?”
일운이 바짝 굳었다.
눈까지 데굴데굴 굴리는 게 꽤 수상한 행색.
혜운의 눈이 좁아졌는데, 목리원이 보기에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왜, 말해봐요. 그냥 환청이잖아.”
“그, 그게….”
“저는 다 말했는데 이렇게 숨기기 있어요? 저 섭섭해져요?”
일운의 망설임이 짙어졌다.
혜운을 진정시키는 게 맞았으나, 목리원 또한 궁금하긴 마찬가지라 가만히 있었다.
당화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일운이 보내는 도움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자, 말해보라니까?”
혜운이 씨익 웃으면서 말하자, 일운은 한참이나 고민하다 눈을 질끈 감으며 작게 실토했다.
“바, 방장님께서 왜 육식을 했냐고 호통을… 아! 물론 제가 진짜 육식을 한 건 아닙니다! 화, 환각이 문제였는지 저는 그 상황에 제가 실제로 육식을 했다고 생각해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지, 진짜…!”
꽤나 애절한 목소리였다.
일운은 울상을 지으며 단원들을 둘러봤다.
“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지요! 그럼 남궁 시주님께서는….”
남궁진천의 눈이 부릅 뜨였다.
일운의 입이 꾹 다물렸다.
목리원은 킥킥 웃음을 흘렸다.
아무렴, 남궁진천이 들은 환청이 무엇인지는 이곳 모두가 알지 않겠나.
그 정도로 큰 호통이었을진대 못 들은 이가 없었을 것이다.
“…묵룡, 왜 웃나.”
남궁진천의 서슬퍼런 음성이 목리원에게 쏘아졌다.
고개를 든 목리원은 흠칫 놀랐다.
“왜, 왜 날 그렇게 보는 것이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정말 눈곱만큼도 모르겠어.”
남궁진천이 꼭 잡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부릅뜬 눈의 흰자위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는데, 그 꼴이 마인을 방불케 할 정도라면 설명이 되겠는가?
목리원은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기분에 그를 외면하고 당화서를 바라봤다.
도움의 눈길이었다.
다행히, 당화서는 쿡쿡 웃으면서도 목리원을 도와줬다.
“자, 다들 회복도 끝나신 듯하니 잡담은 이만하고 출발하지요.”
“에이, 한참 재밌어지려는데.”
혜운이 김이 샌 듯 투덜대자 당화서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러다가 영물이고 뭐고 비동에만 다녀오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건 괜찮고?”
“빨리 가죠.”
혜운이 벌떡 일어났다.
다음으로 반응한 것은 역시 남궁진천이었다.
“…길이 바쁘군.”
여전히 신경질적이었지만, 목리원에겐 그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 안심하고 따라 일어난 목리원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남궁진천이 진법 속에서 들었던 말을.
검룡 형, 참으로 허접하구려. 검룡 형은 강검 밖에 못 휘두르는 바보요. 쾌검에서 중검으로 바꿔버리면 화들짝 놀라버리는 멍청이란 말이오. 바보! 허접! 패배자!
약 올리듯 웃음기를 더했던 목소리가 얼마나 그의 화를 부추겼는지를.
*
금지는 참으로 고즈넉하고 신비로운 공간이라, 그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정취가 있었다.
별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 아래의 자연은 어찌나 위대한지.
당화서를 제외한 단원 전원은 그 풍경에 길을 걷다가도 잠깐씩 멈춰 감탄사를 토해내야 했다.
“…진짜 이쁘긴 하네요.”
혜운의 목소리에 목리원이 공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아름답소. 내 이런 곳에서 검을 수련하면 참 상쾌할 것 같소.”
손이 괜히 허리에 찬 검으로 향한다.
별밤의 수련은 목리원에겐 참으로 각별한 취미라, 마음이 계속해서 동하는 것이었다.
바쁜 일만 없었다면 이곳에서 해가 뜰 때까지 수련하고 싶건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목 소협, 그리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십시오.”
당화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목리원을 채근했다.
목리원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미안하오.”
“미안할 것까지야.”
재차 걸음을 옮긴 목리원은 남궁진천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한껏 좁힌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마 이 중에서 영물 찾기에 가장 진심인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떠오르던 중.
“…찾았다.”
남궁진천이 그리 말했다.
단원들의 고개가 홱 돌아가 그를 향했다.
“북동쪽, 멀지 않다.”
화아아악!
남궁진천이 기파를 터뜨렸다.
그리고 말도 없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 검룡 형! 잠시…!”
“…갔구만.”
제갈산이 허허 웃었다.
“누님. 따라가야 하지 않겠소?”
“가야지. 미아라도 되면 그만한 낭패가 또 있겠느냐.”
당화서가 이마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에 단원들은 웃어버렸다.
“어서 가자.”
단원들이 기파까지 풀어헤치며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궁진천은 오래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자리한 골짜기에서 남궁진천은 검을 거두고 있었다.
쿠우우웅!
거체가 쓰러지며 굉음이 일었다.
목리원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인면오공(人???)….”
거대한 지네가 그곳에 있었다.
하나 특이한 점이라면 그 지네의 얼굴이 사람의 것임을 들어아 할.
“으아… 징그러워라.”
혜운은 기겁하며 몸을 물렸고 제갈산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내밀었다.
“꽤 큰 놈이구려. 길이가 딱 봐도 25척은 되어 보이는데.”
25척. 작지 않은 수치였다.
중원의 성인 남성이 일자로 눕는다면 이십여 명은 필요할 길이였으니.
남궁진천은 후욱 숨을 내쉬며 말했다.
“독을 품고 있는 것 같기에 일수에 죽였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인면오공은 안면부터 몸 중앙까지 세로로 깔끔하게 쪼개져 있었다.
단번에 베어 넘긴 증거였다.
“독봉.”
“예?”
“내단을 회수해다오.”
남궁진천이 참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시독(??)에 감염될지도 모른다.”
당화서의 눈이 좁아졌다.
단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시독이라면 이곳에서 당화서말곤 저 시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남궁진천의 태도가 너무 무례하진 않은가 싶었다.
제삼자가 긴장되는 대치 와중, 남궁진천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독단은 가져가고.”
남궁진천이 당화서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화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준다니 고맙게 받지요.”
사건 하나가 무사히 끝났다.
*
인면오공의 내단은 목리원의 주먹만 했다.
크기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으나, 농도나 색을 보면 마냥 속에 든 게 작다고 말할 수 없는 정도.
목리원이 신기한 듯 내단을 쳐다보자, 남궁진천이 그걸 품에 넣었다.
“영물이 금방 보이는군. 몇 개는 더 찾을 수 있겠어.”
목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또한 즐거움도 느껴졌는데, 이는 목리원이 남궁진천과 면을 트며 들은 것 중 가장 신난 목소리였다.
“에이, 남궁형. 하나둘 정도는 양보해주쇼.”
제갈산이 껄껄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두 단원도 마찬가지.
영물과 내단을 직접 보니 몸이 달아오른 듯 열기를 비추기 시작했다.
“와, 당문은 여기 영물만 잡아 팔아도 사천 땅은 다 살 부자가 될 텐데.”
“그럴 이유가 없지. 애초에 여기 영물들 또한 금지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고.”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비동에 있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겠죠?”
혜운의 말에 당화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판단으로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이오.”
목리원은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흐음’ 소리를 냈다.
‘그것만 있으면 당문이 소저를 괴롭힐 일이 없어지겠구나.’
목리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영물도 영물이지만 목리원은 당화서의 자유가 좀 더 중요했다.
‘다들 영물에 정신이 팔린 듯하니 나라도 소저를 도와야겠어.’
재차 다짐을 다졌다.
순간.
스으으으
목리원의 귓가에 그런 소리가 들렸다.
목리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직전까지 향하던 비동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의아해하며 단원들을 살폈으나,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목리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만 들었다?’
이상했다.
단원들의 감각이 그리 둔한 편도 아니고, 살기 탓이라기엔 단순한 소리였다.
뭔가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 말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었다.
쿵 쿵
목리원은 크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비동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왜인지, 목리원은 그 소리에 보금자리에라도 온 것 같은 그리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