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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살검협-97화 (97/334)

〈 97화 〉 십이장 ­ 임무, 조사 (4)

* * *

당화서는 멍한 얼굴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장원의 가장 큰 방.

그 한가운데 오랏줄에 칭칭 감긴 채 떨고 있는 청초한 인상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곁에서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있는 남궁진천.

“뭡니까?”

당화서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그러자 남궁진천이 답했다.

“미행하던 것들을 역으로 추적해 잡아 왔다. 제 입으론 하오문주라고 하더군.”

하오문주.

하오문주라….

당화서는 손으로 눈 밑을 쓸다 일운을 바라봤다.

일운은 차마 당화서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목리원도 마찬가지였다.

심상치 않은 그녀의 기색에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당화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단 생각에 남궁진천에게 되물었다.

“나갔습니까?”

“그럼 이게 제 발로 장원에 기어들어 왔겠나?”

‘이게’라는 말에 서예의 어깨가 들썩였다.

겁먹은 듯 움츠러들어 있던 중에도,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샐쭉한 눈으로 남궁진천을 보기 시작했다.

당화서는 뒷골이 확 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명령불복종.

그리고 확실치도 않은 정보로 사람을 납치.

‘…아니, 확실치 않은 건 아니지.’

확실히 느껴지는 내공의 흔적.

일류 정도의 무인이다.

이제까지 귀주에서 무인을 본 일이 없던 걸 생각하면 단서를 주워온 것은 확실했다.

당화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심호흡을 이어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이 여인이 먼저 공격했습니까?”

“도와달라고 하기에 호위를 제압했다. 굳이 이것들 뜻대로 움직일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

도와달라는 말과 호위를 제압했다는 말이 왜 이어지는 것인가.

당화서는 짧게 그런 고민을 하다 서예에게 다가가 점혈을 풀었다.

“후으….”

서예는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쉬곤 주위를 살폈다.

당화서는 말했다.

“용봉단주인 당화서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정확한 인과관계의 파악이 우선이었다.

오늘 다녀온 패검방은 사람이 사라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방치된 상태였다.

그곳을 다녀오는 와중 발견한 다른 무인 또한 없었다.

그런 중 유일한 무인이 남궁진천의 앞에 나타났으니, 이들이라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알지도 몰랐다.

“말 할 수 있겠소?”

“예….”

서예는 몸을 움츠린 채 답했다.

불안감이 짙어 보이는 모양새.

원체 청초한 인상이다 보니 그에 ‘가련하다’라는 감상이 떠오른다.

“…검룡께서 이르신 대로, 저는 하오문주가 맞습니다. 이름은 서예구요.”

“그 말을 증명할 방법은?”

“제 품속에 문주의 패가 있을 거예요. 꺼내 보세요.”

당화서는 미간을 찌푸리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옷섬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그녀의 말대로 패 하나를 찾았다.

꺼낸 패는 검은색의 나무에 정갈한 글씨로 하오문주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말 문주인 건가?’

알 수 없다.

애초에 하오문주의 원래 패가 어떤 것인지 본 일 자체가 없고, 설령 문주의 패가 맞다 하더라도 그녀가 대신 문주 대신 패를 들고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일단….’

의심은 남겨두고 다음 말을 들어봐야겠지.

당화서가 턱짓했다.

그러자 서예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마인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하오문의 비처를 향한.”

“마인?”

“예.”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이오?”

“3년 전입니다.”

당화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겨우?’

맹에서 판단하기로 마인이 중원에 침입한 것은 10년도 더 전의 일.

그들이 침입한 경로를 생각해보면 귀주를 그냥 지나칠 확률은 0할에 수렴했다.

한데도 마인에게 공격받은 것이 겨우 3년 전이라니.

수상하다는 생각이 절로 치미는 것에 당화서의 기세가 날카로워지던 중, 서예가 말을 덧붙였다.

“…그전까진 마인인 줄 몰랐습니다.”

당화서의 생각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문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문주에 오른 게 언제요?”

“10여 년 전입니다.”

시기가 얼추 맞다.

당화서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들이 누구요?”

“…낭인.”

“음?”

“낭인입니다. 근처 흑도방파에 식객으로 지내며 검을 빌려주던… 그런 낭인들이었습니다.”

서예는 안색을 어둡게 만들며 말을 이었다.

“…출신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흑도란 것은 본디 출신이 분명한 자들이 더 적은 곳이고, 그들은 하오문에도 꽤나 도움이 되는 이들이었던 까닭입니다.”

“어떤 식으로?”

“그들은 얻은 돈을 죄다 유흥에 썼습니다. 그들이 계집질을 하던 기루 중 하오문 소유도 있었구요.”

“정보의 출처가 되어주었다. 그런 말이겠구려.”

서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화서는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며 이어 물었다.

“세 가지를 묻겠소. 그들이 마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인이 보이지 않는 건지. 그리고 도와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필요한 정보의 핵심을 묻는 말.

서예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답했다.

“…먼저 마인인 것을 알아챈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입니다. 그들이 하오문의 비처를 습격했습니다. 마치 하오문이 어디 있는지를 처음부터 알았던 사람처럼요.”

“흑도가 아닌 마인이라 확신한 이유는?”

“그들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던 까닭입니다. 숨은 거칠었고, 개중에 흡기공(???)을 사용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당화서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흡기공(???).

그것은 마공 중에서도 특히 위험으로 분류되는, 타인의 내공을 빨아들여 마기로 전환하는 술수였다.

‘확실히 그리 판단할 만하다.’

당화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예가 말을 이었다.

“반격할 틈도 없었습니다. 저는 쓰러지는 문인들을 뒤로한 채 도망쳐 나와야 했고, 그대로 이제까지 숨어다니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조사했습니다. 예, 두 번째 질문과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래,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오. 왜 무인이 없는 게요?”

“무인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서예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다 말을 더했다.

“…내공을 빨린 겁니다. 하여 무인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기엔 걸음걸이나 기도가 특별한 이조차 없었소.”

“있습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서예의 얼굴 위론 참담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오문의 비처에 갇혀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무인들은 모두 납치되어 그곳에 끌려갑니다.”

당화서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모든 일의 인과가 설명되는 까닭이다.

‘패검방이 비어있는 이유도.’

이곳에 무인이 없는 이유도.

그리고 굳이 남궁진천을 골목으로 유인해 접선한 이유도.

‘그렇다면….’

부탁이란 것은 아마 그들을 구해달라는 것이 아닐까.

당화서는 추측했고, 서예는 그 추측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속을 훤히 꿰고 있는 듯 생각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답을 주고 있는 것이, 서예가 범상치 않은 여인임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당화서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그녀의 말을 믿고 따를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심문’을 해볼 것인가.

잠시 이이진 고민 끝.

“…단원들과 상의해보지.”

당화서는 보류를 선택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단원들이 따라 나가려는 듯 채비했다.

남궁진천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감시하지.”

그리 말하는 얼굴 위론 어떠냐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성과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듯했다.

당화서는 멋대로 달싹여지는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떠났다.

*

“어떻습니까?”

다른 방으로 단원들을 데려온 당화서가 입을 열자 일운이 답했다.

“확실히 인과 자체는 납득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혜운이 말을 받자, 당화서가 제갈산을 향해 물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소.”

제갈산이 턱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들은 소문에 의하면 거리에서 무인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3년 전부터라더군.”

오늘 온종일 위장을 한 채 돌아다니며 얻은 정보 중 거르고 거른 것이었다.

직전 들은 서예의 말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는 만큼 제갈산도 그녀의 말이 믿을만하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당화서는 이어 목리원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무어라 말을 할 법한데,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몰하고 있었다.

“목 소협?”

당화서가 묻자 그제야 목리원이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하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무엇을 말입니까?”

“대단한 건 아니고….”

목리원이 머뭇거림을 떠올리다, 이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하오문주의 성격이 내 자문께 들은 것과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소.”

­그것이 원체 계산적이어야지. 아마 마인을 도왔다 해도 이익 때문일 것이고, 마인과 척을 졌다 해도 이익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것의 손익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이상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염소소는 분명 서예가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이라고 말했다.

한데 오늘 본 서예는 들은 것과는 다르게, 겁에 질려 있는 나약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 괴리가 마음에 걸려 내뱉은 말.

답한 것은 혜운이었다.

“으음, 상황이 저렇게 돼서 정신적으로 몰린 게 아닐까요? 있을 법하다고 보는데.”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모르겠구려.”

목리원은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여전히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

서예가 묶여있는 방.

“검룡님.”

남궁진천은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던 중, 그녀의 말에 눈을 떴다.

데구르르 구른 벽안이 서예를 향했다.

그녀는 특유의 가련한 붐위기를 뿜어내며 남궁진천에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줄을 풀어주실 수 있나요? 몸이 너무 불편해서….”

낑낑대며 움직이는 모습에 남궁진천의 시선이 꽂혔다.

일류 수준의 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육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가련한 몸.

그것에 남궁진천은 그녀가 영약으로 내공만 불린 부류의 무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싫다.”

움찔

서예의 어깨가 떨렸다.

눈은 남궁진천의 표정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저는 당신들에게 해를 입히려는 게 아닌….”

“네년을 믿을 이유가 없다.”

남궁진천은 완고했다.

서예는 그것에 입술을 짓씹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부탁드릴게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문도들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가만 묶여서 기다리려니 너무 답답해서…!”

울컥하고 어조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직후 서예는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풀어만 주신다면 뭐든 할게요. 검룡께서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그게 몸일지라도…!”

뭐든. 몸일지라도.

그 단어에 강세를 주며, 서예는 어깨에 힘을 풀었다.

자연히 그녀의 옷 섬이 흐트러지며 목덜미가 드러났다.

귓불과 목덜미, 그리고 뺨.

드러난 모든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궁진천의 시선이 그곳에 꽂혔다.

잠시 인 침묵.

그 끝에서 남궁진천은 말했다.

“싫다.”

“…예?”

“네년한테 바라는 것 따윈 없다.”

남궁진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천박한 것. 몸부터 팔 생각이나 하는구나.”

서예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확히는, 멍해졌다.

마치 남궁진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것과 같았다.

“….”

“흥.”

검룡 남궁진천.

여색에 큰 흥미가 없지만 그런 그도 결국 사내였다.

즉,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주제를 알아라.”

남궁진천은 정결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조신하고 참한 여인이 좋았다.

그가 보기에, 서예는 그렇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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