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십장 독대, 결의 (3)
* * *
부름에 얼떨결에 자리에 앉긴 했으나, 목리원의 긴장은 작지 않은 편이었다.
아무렴, 다름 아닌 무림맹주.
그것도 사성육왕 중 제 생존 여부에 반대표를 던진 인물이 아니던가.
사백운의 의도가 대의를 위한 것이라 한들, 또한 그가 선한 인물이라 한들 자연히 따라오는 긴장은 있었다.
‘…아니, 진정해야지.’
목리원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떠올리는 것은 염소소의 말이었다.
‘나 스스로를 증명하면 될 일이다. 무어 그리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이냐.’
목리원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던 중, 사백운이 말했다.
“뭐 그리 긴장하고 있는 겐가.”
“아, 아닙니다!”
목리원의 허리가 바로 섰다.
그 모습에 사백운은 껄껄 웃으며 손사래 쳤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게. 참,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젊고 싶은 것인지 젊은 친구들이 그리 깍듯이 대할 때면 괜히 섭섭해지더군. 이런 날 위해서라도 좀 더 편안히 앉아주겠나?”
“옙…!”
목리원은 아래로 어깨를 내렸다.
힘을 빡 준 채로.
사백운도 그 꼴에 더 이상의 권유는 강요라고 느낀 것인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들었다.
“먼저 술 한 잔 하겠나?”
“아, 따라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쪼르륵.
목리원이 잔에 술을 따르자 청량한 주향이 공간에 감돌았다.
목리원은 터져 나온 향에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건….”
“백주(白?)라는 것일세. 내 친분 있는 주조사가 하나 있는데, 그치가 매년 한 병씩 보내는 술이라네.”
“그, 그런 귀한 것을….”
“귀한 손님과 마시는 게 맞지 않겠나?”
사백운이 싱긋 웃었다.
그리하며 술병을 받아 목리원의 잔에 술을 채웠다.
목리원은 배운 예절대로 양손으로 술을 받았다.
“한 잔 해보시게.”
목리원은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그리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입 안에 술이 들어오는 순간의 청량함도, 그것이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흐르며 느껴지는 따스함도, 이어 숨을 내뱉자 올라오는 맑은 주향도.
“차, 참으로 훌륭한 맛입니다! 제 살아생전 이렇게 좋은 술은…!”
목리원이 환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런 귀한 술을 대접해주셔서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감사….”
“이제 긴장은 풀렸나 보구먼.”
“아.”
목리원은 눈을 크게 만들며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술 한 잔에 직전까지 있던 긴장이 꽤나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재차 고개를 들어 바라본 사백운을 바라봤다.
“무인이라면 무릇 주도에 빠져선 안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네. 적절한 취기는 이 가슴에 푸근한 열정을 심어주거든.”
기골이 장대한 노인은 그 흉악한 몸뚱어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랬다.
아버지의 미소.
그는 백도 무림의 아버지라는 세간의 평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목리원은 괜히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리하며 미소 지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인가.
짧게 스스로를 질책한다.
목리원은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이분이라면 분명 인정해주실 터다.’
아직은 출신과 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후에, 백도의 협객으로서 스스로를 당당히 증명할 수 있게 되면 꼭 정체를 밝히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그래, 맹의 생활은 어떠한가.”
“많은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자문님께!”
“내 사정이 있어 자세히는 말해줄 수 없지만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라네. 탈탈 털어먹어 보게나.”
아무렴, 그 살성이 아닌가.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기를 한 점 집어먹었다.
그러다 ‘아!’하는 소리를 내며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음? 그것은 무엇인가?”
“검룡형… 아니, 남궁 공자가 부탁한 서찰입니다! 꼭 전해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지요!”
“흐음, 그런가?”
사백운은 그리 말하며 서찰을 받아 바로 펼쳤다.
그리하고선 ‘푸흐’하고 웃었다.
“참 맹랑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꼭 검왕의 젊을 적을 보는 것 같네.”
움찔.
목리원이 떨며 사백운의 눈치를 살폈다.
서찰의 내용은 다름 아닌 영약의 수여를 부탁하는 것.
목리원으로서도 영약에 꽤나 목이 말라 있는 상태였기에 사백운이 줄 답에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백운은 빠르게 그 기색을 눈치챘다.
입가에 떠오른 것은 장난스런 미소.
“왜? 자네도 받고 싶나?”
“그으….”
목리원은 말꼬리를 늘리며 눈을 굴리다, 이내 붉어진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라고 거짓말은 못 하겠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사백운은 서찰을 품에 넣으며 이어 말했다.
“당연 영약이 수여될 걸세. 이 서찰이 없었다고 해도.”
“저, 정말입니까?!”
“그럼, 물론이지. 다름 아닌 육마 중 하나를 잡은 성과가 아닌가.”
목리원의 눈이 반짝였다.
신난 기분을 제대로 드러내 보겠다는 것인지 양 주먹은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사백운은 잠시 그런 목리원을 보다, 돌연 그런 질문을 이었다.
“한데 말일세.”
“예?”
“보고를 들었네. 돌발 행동을 했다고.”
목리원의 몸이 멈칫했다.
그 순간의 사백운은 뜻모를 미소로 목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유를 물어도 되겠나?”
들려온 말에 목리원이 떠올린 생각은 다른 게 아니었다.
올 게 왔구나.
하기사, 지난 임무는 작은 사건도 아니었고 이미 보고를 통해 상부까지 전달이 끝났을 테니 사백운이 그 과정을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목리원은 쓰게 웃었다.
하나 변명하지는 않았다.
“…양민의 위협을 두고보는 것은 협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사백운은 ‘흐음’하며 턱을 쓸었다.
“더 자세히 듣고 싶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혹여 있을 양민의 피해를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안전을 도모하겠다고 제가 그 자리에서 지원을 기다렸다면 그날 밤 양민 하나가 더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까닭입니다.”
“그렇군.”
사백운은 백주를 제 잔에 따랐다.
그리고 그 표면을 잠시 바라보며 침묵을 이어가다, 이내 말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목리원은 침묵했다.
아직 그의 말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고,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우둔한 판단이기도 해.”
사백운은 그리 말하고 잔을 기울였다.
잠시 주향을 음미하듯 입술을 우물거리고, 이내 잔을 내려놓곤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조언을 하나 해도 되겠나? 이는 무학을 익힌 선배로서의 조언이고, 맹주로서의 조언이고, 연장자로서의 조언이네.”
“…가르침을 주십시오.”
“너무 그리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지 말게나.”
사백운의 미소엔 작게 씁쓸함이 감돌아 있었다.
목리원은 입을 다문 채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백운은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말을 더하기 시작했다.
“자네와 단원들은 그 상황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바라봤네.”
“단편적이라 하심은….”
“지원 병력을 왜 본대만 떠올렸는가. 분명 그 도시에도 무림맹의 지부가 있었네. 그 무인들을 끌고 가 병력을 충원해도 됐을 일이 아닌가?”
목리원의 눈이 커졌다.
사백운은 끌끌 웃었다.
“나는 그리 생각하네. 자네들이 지부의 무인들은 믿지 못한 게 아닌가. 라고.”
“아, 아닙….”
“물론 의식적으로 무시했다는 말이 아닐세. 아암, 내 자네들을 이미 한 번 봤는데 그 정도도 모를까. 하고자 하는 말은 그저 자네들이 너무 특별하다는 것일세. 그것이 눈을 가리고 있다는 말이지.”
목리원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그도 슬슬 사백운이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만해져 있는 것입니까.”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 다르게 말하면 책임감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군.”
“책임감…?”
“내가 아니면 그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목리원은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실로 그리 생각했다.’
그 순간의 자신은 그 양민들을 구하려면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자신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반성하겠습니다.”
“자네들의 마음가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닐세. 나는 특별한 이들에겐 특별한 책임이 필요함을 믿는 까닭이지. 하지만 말일세.”
사백운이 술병을 들었다.
이번엔 목리원의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목리원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조금은 융통성을 가져보시게나.”
사백운이 지그시 웃었다.
“맹의 무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면, 그들은 꼭 무력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자네들을 도울 수 있었을 걸세. 시선을 끈다던가, 후방을 지킨다든가 하는 등의 일 말일세.”
“…그렇습니다.”
“넓게 보시게. 그리고 타인을 적과 아군, 지켜야 할 이와 도움받아야 할 이로 나누지 마시게. 흑백으로 잘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각박하고 차가워 그 속에 있다간 어느 순간 외로움을 느끼게 될 걸세.”
목리원은 가만 사백운을 바라봤다.
씁쓸함을 떠올리던 직전의 기색도, 지금 건네는 말의 진솔함도.
그저 떠올린다기엔 그 기색이 사뭇 진득했다.
하여 목리원은 흘리듯 물었다.
“경험… 입니까?”
“부정하지 않겠네. 자세히는 말해주지 못하는 걸 이해해주시게. 부끄러운 기억이거든.”
구태여 더 묻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에 목리원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사백운이 말을 마무리 했다.
“강호는 넓고 깊다 말하지.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신묘한 게 인간이라 생각하네. 하나의 요소만으로는 그 진가를 모두 알 수 없기에. 또한 평생을 변화하기에….”
흐르듯 이어지는 말이었다.
더해, 왜인지 귀가 아닌 가슴을 통해 파고드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가능성을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네.”
이는 목리원에게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능성과 변화.
그 속에서의 믿음.
초월지경의 무인이 일평생을 살아오며 깨우친 작은 진리가 목리원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
목리원의 눈빛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사백운은 잠시 눈을 크게 뜨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배움이 빠른 친구로군.”
“아, 감, 감사합…!”
목리원은 횡설수설하며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하려 자세를 잡았다.
사백운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되었네. 자리는 이만하고 끝내지. 어서 가보게. 이럴 때야 말로 명상이 필요하지 않겠나.”
“어찌 제가…!”
“선배에겐 후배와의 식사보다 후배의 깨달음이 더 기꺼운 법이지. 어서 가보래두.”
사백운은 그리 말하고 슬쩍 내기를 쏘아 목리원의 잔을 부쉈다.
“자작이 하고 싶다네.”
장난스레 내뱉는 말에 목리원의 표정이 일렁였다.
주먹은 어느 때보다 꽉 쥐어지고 있었다.
목리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하곤 힘있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그리하곤 뛰쳐나갔다.
무언가를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 들었던 여러 조언들의 조각이 저 말을 이음매로 삼아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흑과 백이 아닌 총천연색.
변화와 가능성.
그리고 믿음.
‘강호.’
강호의 색채였다.
그것은, 목리원이 이제까지 겪어온 강호의 빛깔이었다.
목리원이 한껏 미소를 지은 채 정원을 떠나가기 시작하자, 사백운은 예의 지긋한 미소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참….’
재밌는 후배라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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