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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살검협-51화 (51/334)

〈 51화 〉 육장 ­ 표행, 인연 (1)

* * *

약 사흘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다.

그간 서현에서의 모든 일을 마무리한 일행은 정든 도시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로.

목리원은 설렌 마음을 품은 채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응? 왜 그러십니까.”

“소저! 일운 스님을 깜빡했소! 무림맹에 가려면 소림에 먼저 들러야 한다고 말했지 않소!”

목리원은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인 채 호들갑을 떨었다.

그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용봉지회가 이어지던 중 들었던 내용이 있었던 까닭이다.

무림맹의 단주직을 노리려면 명사의 추천이 필요하다.

당화서 또한 그것을 고려해 무림맹에 들르기에 앞서 소림을 가겠다 이른 일이 있었다.

한데 지금 보라.

소림에 들어가려면 소림의 인물을 대동하는 것이 옳을진대, 이리 여정을 떠나오기까지 일운과는 그 어떤 상의도 없지 않았나.

지금 여정이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생겼단 말이다.

당화서는 그의 호들갑에 쿡쿡 웃었다.

제갈산 또한 마찬가지.

그는 경박하게 폭소를 터뜨리며 목리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보게 목아우.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

“으, 음? 그게 무슨 말이오?”

“최초에야 그랬겠지. 누님 홀로 무림맹에 단을 창설하러 갔다면 필시 전대 맹주인 원명 대사의 추천이 필요했을 걸세. 다시 말하지만, 홀로 갔다면 말일세.”

목리원의 얼굴 위로 의문이 짙어졌다.

제갈산은 장난스레 손을 들어 당화서와 본인, 목리원을 순차적으로 가리킨 이후 말했다.

“자, 우리 별호가 무엇이던가.”

“소저는 독봉이고… 제갈형은 괴룡이고 나는….”

목리원의 뺨이 슬쩍 붉어졌다.

왜인지 쑥스럽다는 듯 큼큼 헛기침까지 하고 나서야 그는 제 별호를 말했다.

“…무, 묵룡이오!”

목리원의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 모습에 얼굴이 붉어진 당화서가 소매로 제 입을 가렸다.

제갈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우리는 용과 봉이지. 세 사람 모두가 그런 별호를 지니고 있단 말일세. 그리고 우리는 모두 새로운 단을 창설해 그곳에 들어가길 바라고 있어. 목아우, 자네는 용이라는 별호가 가지는 의미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네.”

용과 봉의 별호는 특별하다.

그저 그 이름의 뜻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강호에서 가지는 입지가 특별했다.

“우리는 검증된 기재네. 다음 강호를 이끌 주인들이지. 설령 우리가 그리 생각하지 않더라도 강호는 그리 생각하고 있다네. 그러니 우리가 함께 무림맹을 찾아가 단을 창설하고 싶다 말하면, 그들의 입장에선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 걸세.”

당화서는 그의 말에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만한 말이었으나, 이것이 사실이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 기재들이 무림맹에 적을 둔다.

이는 정파 무림을 통제해야 할 무림맹의 입장에선 그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인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 외에도 정치적인 이유가 더 있었다.

‘다음 세대 명문의 구도를 바꿀 수 있다는 계산이 있지.’

명문은 무림맹으로서도 조심스러운 상대다.

각 문파나 가문이 가진 힘이 적지 않은 만큼, 함부로 건드려선 도리어 손해만 생긴단 말이다.

그런 만큼 그 명문의 주인들이 무림맹에 적을 두게 되면, 상대의 힘을 약화하고 저들의 힘을 강화할 최고의 상황이 생겨나는 것 아니겠나.

‘뭐, 출신이 출신인 만큼 원한다면 가문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무림맹은 이득이다.

다음 세대 명문의 주인과 호의적인 관계를 쌓게 되는 것이니.

당화서는 굳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곤 목리원에게 일렀다.

“여하튼, 제갈 놈의 말대로 이젠 더 이상 소림에 들를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는 바로 호북성의 무한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요.”

목리원은 들려온 말에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무, 무게감이 느껴지는구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 강호를 이끌 주인들이라,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협을 행한 후 멋지게 웃으며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목리원은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된 용(?)의 무게에 제 마음가짐을 달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알겠소! 내 별호에 맞는 무게감 있는 사람이 되어 보이겠소!”

묵룡 목리원.

그런 이름에 맞는 사람이 되리라!

목리원이 나름의 결연함까지 보이며 해낸 말에 당화서와 제갈산은 그저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생각했다.

‘입만 다물면 알아서 그렇게 될 거 같은데.’

산골짜기 촌놈의 표본.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

그런 성향만 들키지 않는다면, 목리원은 세상 그 누구보다 용의 칭호에 잘 어울리는 외모였다.

즉, 그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

지도상으로는 안휘성의 바로 왼쪽에 붙어있는 것이 호북성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의 거리가 가까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왜 아니겠나.

이곳은 드넓은 중원.

성 하나만 해도 말로 몇 주를 달려야 하는 땅이란 말이다.

그런 만큼 목리원과 일행들의 여정이 길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서현에서 출발한 지 2주.

목리원은 이제야 안휘의 마지막 도시에 도착하곤 기쁜 마음을 토해냈다.

“이곳만 지나면 호북성이구려!”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요. 다른 사고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당화서 또한 흡족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녀는 실로 기꺼운 마음이 가득 들어찬 상태였다.

‘오는 길에 목 소협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일이 적었다. 이게 가장 큰 이유겠지.’

하루면 갈 길도 사흘이나 걸리게 하는 그 정신 산만한 호기심이 일을 하지 않아, 이런 속도가 나온 것일 터다.

물론, 애초에 그것을 고려한 동선을 짠 것도 있었지만 그런 점을 생각해도 빠른 속도였다.

‘이대로 이주면 도착이다.’

아니, 조금 여유를 부려서 간다면 삼 주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충분히 만족스러운 속도였기에, 당화서는 이제 여유로운 마음으로 남은 여정을 이어갈 생각을 떠올렸다.

“자, 이제 가볼까요.”

“어디로 가는 것이오?”

목리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당화서는 바로 말을 토해내려다, 이내 싱긋 웃음을 흘려냈다.

이 말을 하면 목리원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가 꽤나 궁금해졌던 까닭이다.

아마도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지 않을까.

차오르는 묘한 기대감에 당화서는 미소를 진하게 만들며 입을 열었다.

“표국으로 갑니다. 저희는 표행을 호위하며 안휘를 빠져나갈 거예요.”

목리원의 몸이 우뚝 굳었다.

그러다 잘게 떨렸다.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고, 입 또한 멍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표, 표국 호위…!”

목리원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당화서가 생각한 이상의 반응이었다.

“너무 좋소­!”

목리원의 낭만에 불이 붙었다.

*

표국 호위.

이는 목리원이 그리도 신봉하는 [강호협객전]에서도 안 나오는 장이 없을 정도로 자주 다뤄지는 단골 소재였다.

강호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표국 호위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그런 중에서도 특히 그것이 많이 다뤄지는 장이 있었다.

바로 6장.

낭협(??)의 장이 그것이었다.

강호를 방랑하는 신비 고수 낭협.

정체를 숨긴 채 표국 호위 따위의 일로 시간을 허비하길 즐기며, 그런 중 만난 인연들과의 술자리를 즐기는 사내의 이야기.

주로 여행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장이라 강호협객전의 주요 독자층인 어린 아이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목리원만큼은 달랐다.

6장의 이야기 중 목리원의 마음에 불을 붙인 장면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 또한 인연이니 내 한번은 돕도록 하지.

6장의 절정이라 칭해도 될 흑사련주와 낭협의 생사결.

평생 사랑을 모르던 낭협이 표행 중 만난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강호행 중 처음으로 제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대로 소개하겠네. 나는 천곽, 칠곡문의 마지막 전승자라네

신비 고수 낭협의 정체는 바로 사라진 일인전승 문파의 마지막 전승자.

그것이 알려지는 순간 흑사련주가 주춤주춤 발걸음을 물렸다는 묘사는 목리원으로선 흥분을 참을 수 없는 묘사였다.

…그랬다.

목리원은 ‘힘을 숨긴 일인전승 문파의 전승자’라는 것에 꽂혀있었다.

왜인지 그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빨리! 빨리 표국으로 갑시다!”

철없는 목리원이 설렘을 이기지 못하고 당화서를 재촉했다.

제갈산은 낄낄 웃으며 목리원에게 힘을 보태줬다.

“자, 누님. 목아우도 이리 달아있는데 어서 가봅시다.”

당화서는 예상보다 극렬한 목리원의 반응과 제갈산의 재촉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만들었다.

뒤늦게야 ‘너무 목 소협을 쉽게 본 것인가.’하는 생각을 떠올린 당화서는 한숨을 폭 내쉬다 이내 포기한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예예, 가보도록 하지요.”

참 심심할 틈도 없게 만드는 인간들.

당화서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

운성표국은 호북성을 거점으로 삼는 근방에선 나름 이름있는 표국이었다.

주로 실어 나르는 것은 상단의 귀금속.

표행의 성공률이 9할에 달하여 언제나 일감이 많았고 그런 만큼 표행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무인도 많은 그 표국은, 오늘 생각지도 못한 손님을 맞고 있었다.

“표행에 참가하고 싶어서 찾아왔소.”

운성표국 안휘 지부의 접견실.

고아한 인상의 미녀가 지부장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독봉(??) 당화서.

이번 용봉지회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사천당문의 소가주.

그녀만으로도 지부장의 속은 벌렁거리고 있건만,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내가 있는 탓에 그는 이것이 꿈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독봉의 오른편에 서서 실실 웃고 있는 족제비같은 사내는 괴룡(??)제갈산.

그리고 왼편의 눈부신 미남은 바로….

‘무, 묵룡…!’

묵룡(??) 목리원.

지금 이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신예 중의 신예였다.

지부장은 생각했다.

이들이 왜 이런 동네 표국에 온 것인가.

아니, 동네 표국이라 할 정도로 작은 표국은 아니지만 능히 천하상단의 일도 받아낼 수 있을 이들이 이곳에 오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와중 당화서가 입을 열었다.

“마침 호북으로 가는 중인데 일정이 넉넉한 편이어서 말이오. 그냥 가기보단 소일거리라도 하며 가는 것이 좋을 듯하여 이리 와보았소.”

“그, 그렇습니까….”

중년의 지부장은 아래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애써 붙잡았다.

‘나, 나쁠 건 없긴 한데….’

이들이 표행에 함께 해준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안 그래도 근래 들려오는 소문이 그리도 흉흉했던 까닭이다.

‘…요즘 표행을 노리는 산적들이 많아졌다지.’

일주일 전부터 들려온 소문이었다.

그냥 산적이라고 하기엔 그 잔혹함이 도를 넘어서 뒤늦게 발견한 이들이 구역질을 했다던가.

지부장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들이 함께해주면 참으로 좋은 일이나, 그럼에도 역시 고려할 것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 저희는 책정된 것 이상의 보상을 약속드릴 수 없는데 괜찮으십니까? 다른 호위들과 같은 삯을 드리게 될 겁니다.”

표행은 엄연한 일이다.

이들이 용과 봉이라 한들, 그런 이유만으로 정도 이상의 보상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조건을 수락해주면 고맙지만, 보상에 불만을 토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 터.

지부장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걱정마시오. 말 그대로 소일거리인 만큼 금전에 욕심은 없으니.”

생각했던 것 중 가장 완벽한 답을 들었다.

“잘 부탁하오.”

독봉이 미소 지었다.

그 인상대로, 참으로 고아한 미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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