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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르스는 유세현을 보기 무섭게 사색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어,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아무리 유세현이라고 할지언정 전방에는 무지막지한 수의 인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병력들을 상대로 이렇게나 빨리 이곳에 당도하다니?
라부르스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유세현의 등 뒤를 훑고는 깜짝 놀라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 미친...’
유세현의 뒤로는 마치 그가 어떻게 이곳까지 이동해 온 것인지 경로를 나타내듯 수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미처 지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뚫려버려 대응을 하지 못한 것!
“으윽... 이 무슨...”
“너, 너무 강하다...”
유세현에게 당한 이들은 목숨을 잃진 않았으나 하나 같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크으으...!!”
라부르스는 공포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라곤 한탄뿐이었다.
‘젠장... 젠장할...!!’
이 무슨 최악의 불운이란 말인가.
절대 유세현을 찾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정말로 유세현을 찾아버리게... 아니 만나버리게 되다니!
‘제기랄... 이렇게 되면...’
비록 통할 확률이 거의 없더라도 0.001%의 생존을 위하여 라부르스가 선공을 취하려던 순간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라부르스. 움직이면 죽인다.”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유세현이 말했다.
라부르스는 공포심에 몸이 그대로 굳어 옴짝달싹 못했다.
라부르스의 표정을 흘끗 살핀 유세현이 계속해서 말했다.
“걱정마라. 가만히만 있는다면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
라부르스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순간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안 죽인다니?
“뭐... 뭐라고?”
“죽일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건 데오로프. 네가 지니고 있는 지휘권이다.”
라부르스를 응시하고 있던 유세현의 붉은 눈동자가 데오로프를 향해 쓱 돌아갔다.
“......”
지금껏 잠자코 유세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데오로프는 그 눈동자를 마주치기 무섭게 마음속 깊을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이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아니 그보다도...
“네놈... 지금 뭐라 지껄인 거냐. 지휘권을 갖고 싶다고?”
“그렇다. 데오로프. 너에게 서열 결투를 신청한다.”
그 말을 내뱉는 유세현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데오로프는 조소를 흘렸다.
“크크크, 뭐? 서열 결투?”
서열 결투란 마족끼리 서열을 걸고 하는 결투를 뜻한다.
지는 자는 서열을 빼앗기게 되어 상하 관계가 역전되는 것!
그리고 이것은 말 그대로 오직 마족만이 할 수 있는 결투였다.
그런데 서열 결투에 대해 어디서 알아왔는지는 몰라도 인간 주제에 이 결투를 신청하다니?
“크크크... 크하하하하! 네놈! 서열 결투가 뭔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물론이다. 데오로프.”
“하하하! 인간 주제에!”
“흠, 인간 주제에라고?”
데오로프의 조롱 섞인 말에 유세현이 그의 눈동자를 재차 뚫어져라 응시했다.
데오로프는 유세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내뱉던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유세현의 어이없는 말로 인해 잠시 잊혔었던 감정이 재차 스멀스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이란 말인가.
압박감? 아니면 긴장감?
유세현이 말했다.
“넌 내가 인간이라 생각하나? 데오로프?”
데오로프는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을 애써 부정하며 답했다.
“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네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냐! 설마 어둠의 힘을 운 좋게 지니게 됐다고 해서 스스로 마족이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여기서 널 마족으로 인정해줄 놈은 아무도 없다!”
“흐음, 그런가?”
“그, 그렇다!”
데오로프가 대답하며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유세현은 이에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직접 느끼게 해주면 되겠군.”
“뭐?”
“한번 겪어보라는 거다. 내가 인간으로 느껴지는지. 아니면...”
유세현이 데오로프를 응시하며 마치 맹세하듯 얼굴 앞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것은 마족들이 서열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특유의 자세였다.
‘...!! 무슨? 어떻게 저 자세까지 알고 있는 거지?!’
“전원! 공격해라!!”
이에 이를 알아본 데오로프는 즉각 수하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사실 유세현이 라부르스와 대화를 할 때 기습을 감행하지 않고 구태여 가만히 있었던 이유도, 유세현과 직접 대화를 나눈 이유도 수하들이 이곳에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었다.
“하아아압!”
“죽어라! 인간!”
마족들은 그야말로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유세현을 향해 몰아쳤다.
전부 자신의 특수 능력을 개방한 상태로.
하지만.
“크악!”
“커헉!”
그 매서운 칼날이 유세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채재쟁-
퓨슛!
서걱-
“무, 무슨...!”
“이, 이 힘은!”
그림자가 어둠에 형체를 잃고 가려지듯, 바람이 더 큰 바람에게 잡아먹히듯.
마족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힘의 원천을 지니고 있는 유세현을 당해낼 수 없었다.
“크아악!”
어느새 유세현의 주위로는 중상을 입은 수많은 마족들이 땅을 뒹굴고 있었다.
유세현이 데오로프를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데오로프. 지금도 내가 인간으로 보이나?”
“네, 네놈!”
저벅- 저벅-
한 걸음, 한 걸음.
둘의 간격이 서서히 좁혀져 간다.
데오로프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놈은... 인간에 불과하거늘... 그런데... 그런데...
“간다. 막아봐라.”
말과 동시에 유세현의 신형이 데오로프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쌔애액-
그리고 싸늘한 바람 소리와 함께 바로 앞에서 나타나는 유세현의 검.
“크윽! 이, 이 자식이!!”
간신히 회피한 데오로프는 이후 어떻게든 유세현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루듯.
애들 손에 놀아나는 장난감처럼.
‘크윽! 뭐냐 이건...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데오로프는 문득 자신의 오른팔이 몸에서 벗어나 허공에 떠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푸슛-
“크아아악!”
잘려나간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떨어져 나간 팔이 땅을 뒹군다.
“크으으-!”
데오로프는 고통에 오만상을 쓰면서도 다급히 팔을 줍기 위해 움직였다.
팔을 영구적으로 잃게 되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 아가레스를 통해 그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가 채 한 발을 팔을 향해 내디딜 새도 없이.
“데오로프.”
무심한 듯하면서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아...”
데오로프는 그 순간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 죽게 될 것이라는 압도적 공포감.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자는...
서서히 다가온 유세현이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내가 아직도 인간으로 보이나?”
데오로프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 *
“유세현... 네놈의 목적은 대체 뭐냐... 뭐 때문에 우리를...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는 거냐...”
데오로프가 덜덜 떨리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물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이에 쓰러져 있는 마족들을 한번 쓱 훑은 유세현이 역으로 반문했다.
“데오로프. 너는 왜 루시뷀트를 따르지?”
“뭐?”
데오로프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변했다.
이건 무슨 역질문이란 말인가.
“그, 그건...”
“루시뷀트가 너희 마족들 중에 제일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유세현이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하자, 데오로프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족은 힘의 순리를 철저히 따르는 종족이었다.
이유는 굉장히 단순하다.
약자는 강자가 자비를 베풀어야지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살려주는 대가로 충성을 바치는 것.
어지고 지혜롭고 이런 부과적인 것들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 오직 힘만이... 왕의 증표.
마족 중에서 루시뷀트보다 더 대단한 권능을 지닌 강한 자가 나타난다면... 그가 왕이 되는 것이다.
“너... 그래서 나에게 서열 결투를...”
“그렇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거다. 내가 인정을 했다고 해도... 넌 아무리 뭐라 해도 인간 출신이니까...”
“뭐,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넌 패배했으니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야 된다.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데오로프. 지금 그 말투가 자신보다 높은 서열에게 할 수 있는 말투인가?”
“...알겠...습니다.”
데오로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데오로프의 부대는 초토화 상태였다.
건재한 마족들이 아직 다수 있었지만 사기가 꺾인 그들은 유세현을 공격할 생각을 갖지 못했다.
유세현이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니 현재 데오로프는 좋으나 싫으나 유세현에게 복종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밖엔 선택지가 없었다.
추후 루시뷀트에게 어떤 처벌을 받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데오로프로서는 당장 죽는 것보단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유세현...님.”
데오로프가 질문했다.
그는 당연히 이 물음에 유세현이 마족의 본진을 향해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릴 거라 생각했다.
마왕이 갑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아내고 이를 기회라 여겨 이곳에 쳐들어온 것이 분명할 테니까.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마군을 장악한다.
그것이 바로 유세현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계략...
‘이겠지 아마도... 멍청한 놈.’
데오로프가 마음속으로 유세현을 비웃었다.
유세현이 한없이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존재일지언정 그는 아직도 진심으로 유세현에게 복종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만약 놈이 진격 명령을 내린다면, 그는 진격하는 척하다 마치 계략을 꾸며 유세현을 유인해 온 것처럼 자연스레 타 부대에 합류할 심산이었다.
[이곳에 있는 전 마족들은 들어라.]
유세현이 마침내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막 서열 결투에서 정식으로 데오로프를 이기고 지금부터 너희들의 지휘관이 됐다.]
그가 내뱉은 말은 어둠의 마력을 타고 뻗어나가 마족들의 귓가를 울렸다.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기 힘드리란 것, 알고 있다. 나의 태생은 인간이니.]
마치 마왕 루시뷀트가 말을 내뱉는 것처럼.
[그러니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유세현의 말을 들은 데오로프와 수많은 마족들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기껏 부대를 점령해놓고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겠다니?
‘저놈... 대체 무슨 생각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결정해라.]
“......”
[루시뷀트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마왕에 어울리는지 존재인지.]
말을 마친 유세현의 두 눈이 차분히 마족들을 훑었다.
꿀꺽-
마족들은 이에 목구멍 너머로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유세현은 현재 찰나의 순간일지언정 지금까지 줄곧 마족의 왕이었던 루시뷀트의 존재를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다.
“유세...”
데오로프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읊조리려던 찰나였다.
[난 루시뷀트와 다르다.]
유세현이 말했다.
[난 루시뷀트처럼 너희들을 소모품으로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내 출신이 인간일지언정 인간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생존과 승리만을 위해. 난 너희를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마력을 타고 마족들의 귀속에 또렷이 흘러들어가 박혔다.
“......”
마족들은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유세현을 응시했다.
그만큼 지금 유세현의 발언은 마족들에겐 무척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오직 홀로, 혈혈단신으로 현 마왕을 처치하여 마족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자.
지금 그들의 눈앞에 오롯이 서있는 자는 그런 자였다.
[방해만 하지 말아라. 루시뷀트와 나의 싸움을 방해하는 자에겐 지금처럼의 자비 따윈 없을 것이니. 나는 이걸 알리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온 것이다.]
유세현은 그 말을 끝으로 그 부대를 떠났다.
습격(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