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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만 돌려 정령왕을 쳐다본 이강호가 툭 말했다.
“뭔가 큰일이 발생한 모양이군. 정령왕.”
이에 정령왕은 이강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설마 태도를 바꿔 공격하려는 것인가?
[...당신...]
“그렇게 빤히 보지 마라 정령왕. 디네를 봐서라도 이 틈을 타 뭘 할 생각 같은 건 없으니.”
허나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전과 같이 툭 말을 내뱉은 이강호는 그대로 일행들을 물리며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가는 인간 진형.
[저, 정령왕님...]
중간 사이에 낀 디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이렇게 그냥 보내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정령왕님! 제발!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저들을 믿어 주시면 안...]
디네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정령왕에게 애걸복걸하려던 찰나였다.
슈슉-
거의 모습을 감추기 직전인 인간 진형을 향해 정령왕이 어마무시한 속도로 가속했다.
이강호의 앞에 재차 나타난 정령왕이 아까와는 다르게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녕... 진심으로 우리를 도와줄 생각인가요? 이강호?]
“그렇다.”
[...그렇다면 디네와 당신들의 유대를 믿고, 그 말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는 건.”
[예, 세계를 다스리는 네 명의 정령왕 중 물의 정령왕, 저 아쿠리네의 권한으로 당신들을 초대하겠습니다. 우리 정령계의 본토, 유르시아로.]
스스슥-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령왕, 아쿠리네의 앞으로 거대한 포탈이 생성됐다.
이강호가 그토록 원하던 심층부로 향하는 포탈이었다.
* * *
[이 포탈을 통해 넘어가면 2분 안에 제가 보낸 정령 하나가 당신들에게 도착할 거예요. 자세한 것은 그에게 들으세요.]
“음?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텐데 그냥 같이 넘어가서 직접 설명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정령왕?”
[이건 본체가 아니라서요. 함께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럼, 바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포탈은... 오래 유지하면 안 돼서요.]
정령왕의 말에 이강호가 그새 쫓아와 옆에 자리한 디네를 응시했다.
디네가 이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망설임 없이 포탈로 뛰어들었다.
후웅-
순식간에 주위 배경이 전환된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벼락 내리치는 소리가 귀를 찌른다.
휘이잉-
그리고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수많은 토네이도까지.
대리자에게 침략당한 심층부의 환경은 무척이나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디네가 깜짝 놀랐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왜, 원래는 안 이랬어?”
[다, 당연하지 이 바보야! 이런 데서 사는 생명체가 어딨냐?]
김주희에게 소리를 지른 디네가 연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김주희는 손가락을 이용해 디네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너무 심란해하지 마. 우리가 왔잖아. 다시 괜찮아질 거야.”
[...정말, 정말 그렇게 될까?]
“물론이지 짜샤! 그런데 너 본 세계가 이렇게 된지도 여태 모르고 있었어?”
[내 위치 사수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해서... 적에게 당해 역소환 되면 최대한 빨리 다시 방어하러 갔어야 했거든.]
“...힘들었겠네. 고생했어.”
[...후...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디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령왕이 말한 정령이 도착한 때는 딱 그때였다.
[너희들인가. 아쿠리네님께서 말씀하신 인간 대리자들이.]
정령은 남성체 정령이었다.
“그렇다.”
이강호가 답하자 정령의 눈이 빠르게 사람들을 훑었다.
대충 수준을 짐작해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휘자와 대화를 하고 싶다만. 누구지?]
“나다. 이강호라고 한다.”
이강호가 손을 뻗었다.
정령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그 손을 잡았다.
[...에르크록시라고 한다.]
“에르크록시?”
[그렇다.]
에르크록시, 물의 최상급 정령중에서도 탑 3안에 드는 차기 정령왕이 될 자를 지칭하는 이름.
[와, 당신이 에르크록시? 멋지다.]
디네가 눈을 빛내며 에르크록시에게 다가갔다.
반면 에르크록시는 디네를 보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니? 에르노라? 상급정령이 대체 여기 왜...]
그 표정은 마치 보여줘선 안 될 것을 보여준 자의 표정이었다.
이강호는 그제야 디네가 왜 안쪽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것인지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감춘 거로군.’
상급정령은 어차피 심층부로 들어온 대리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맡을 수 있는 곳은 외부.
정령왕은 황폐화된 내부의 상황을 알게 될 시 외부 방어를 맡은 정령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을 염려하여 아예 정보를 차단, 맡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강호가 말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에르크록시? 전황에 대해 듣고 싶다만...”
[...알겠다. 왕의 명령이니 알려주도록 하지.]
현재 알베타스와 쿠룬, 샤크아크는 사방으로 퍼져 이 세계의 중추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상태였다.
최상급 정령들은 이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며 저항하고 있지만.
[놈들의 군세가 너무 막강하다. 그렇기에 점점 밀리고 있지.]
알베타스와 쿠룬, 샤크아크에게 밀려 점점 조금씩 심층부를 장악당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
정령이 하던 말을 뚝 멈췄다.
아무리 자신들을 돕기 위한 지원군이라곤 하나 인간들도 대리자인 것은 매한가지.
최중요 기밀사항을 말해줘도 될지 말지 망설임이 든 것이다.
허나.
“본체가 있는 장소까지 밀리게 될 것이다?”
[...!!]
이강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툭 말하자, 정곡을 찔린 것인지 에르크록시의 눈이 순간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네놈 그걸 어떻게... 설마...!]
에르크록시의 시선이 디네에게로 향했다.
디네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어필하며 빠르게 고개를 젓자 이강호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디네에게 들은 게 아니다.”
[...그럼 대체...]
“너희 정령들은 무한히 재소환되는 걸로 외부를 막고 있었다. 당연히 본체가 있겠지. 그렇다면 그 본체는 어디에 숨겨 두었을까.”
[......]
“당연히 최고 깊은 안전한 장소겠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이다.”
이강호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제 내가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궁금증이 풀렸나? 에르크록시?”
[...너희들이 추측할 정도이니 적들도 인지하고 있겠군.]
“그러겠지. 그러니 어정쩡하게 정보를 통제하며 알려줄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정보를 제공해라. 그래야 우리도 도울 수 있으니.”
[...그러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에르크록시가 물을 이용해 거대한 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지형을 표기한 지도였다.
[여기 보이는 빨간색이 적들이고. 파란색으로 표기한 것이 우리 정령들이다.]
“흠, 진형이 많이 좁혀져 있는 것을 보니 꽤나 밀리고 있군.”
[그렇다.]
“당장 밀리면 안 되는 위험한 곳은 어디지?”
[이곳이다.]
이강호의 질문에 에르크록시가 빨간색이 다수 몰려있는 곳에 점을 하나 찍었다.
[이곳에는 땅의 최상급 정령, 보레크와 보레나의 본체가 다수 잠들어 있다. 그래서 현재 여러 정령들이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해 막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뚫릴 것 같나?”
[그렇다. 적들이 우리 이상으로 더 집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쪽부터 도와주었으면 한다만...]
“흠, 알았다. 그런데 무슨 종족인지 아나?”
[외형을 본떠줄 테니 직접 봐라.]
답한 에르크록시가 물로 적들의 모습을 본떴다.
목에 존재하는 상어의 아가미와 문신,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
“샤크아크 종족인가.”
샤크아크, 물에서 뿐만이 아니라 육지에서도 강한, 물이 주특기인 종족.
그들은 매우 강하다.
허나.
‘딱 좋군.’
이강호가 입꼬리를 미세하게 치켜세웠다.
그는 이왕 하는 거 이번에 정령들에게 제대로 신뢰를 얻을 생각이었다.
처음 정령왕에게 말한 것처럼 이 세계를 정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 아는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중간에 이변이 일어날지.
언제나를 대비한다.
정령과의 신뢰는 그것을 위한 보험이었다.
“그럼, 가볼까.”
[나도 너희들의 곁에서 함께하겠다.]
“마음대로. 길 안내를 부탁하지.”
이강호가 손을 뻗자, 에르크록시가 앞장서서 길 안내를 시작했다.
* * *
빛과 어둠의 세계 중층부.
레드 드래곤의 진형.
세레나는 여러 수하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엘프와 델바람, 블러드소울이 이곳에서 550km 떨어진 북서지역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이 층으로 오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놈들은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인간들은요? 제가 말한 인물들은 발견했나요?”
“아뇨, 놈들의 동향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만 세레나님께서 말씀하신 자들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흠, 그렇단 말이죠. 고마워요. 지금처럼 수고해주세요.”
“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수하가 물러났다.
세레나는 살포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흠,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절멸의 탑을 나온 이후 세레나는 인간들의 추적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어떤 한 인물 때문이었다.
이강호도, 유세현도 아닌 빛의 신전에 들어가기 위한 아이템, 롱기누스를 지니고 있는 자.
루시펠.
그런데 그녀는 유세현, 이강호 등등과 함께 실종된 상태였다.
‘대충 인간들의 총원을 계산했을 때 나눠진 건 거의 절반.’
그렇다면 나눠진 인간들의 절반은 어디로 향한 것일까.
설산지대와 용암지대가 닫혀 갈 수 있는 지대는 이곳, 빛과 어둠의 지대뿐이었을 터인데.
그때였다.
데프하우어가 돌아온 것은.
세레나가 확 바뀐, 그녀 본래의 무미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데프하우어. 돌아왔다는 건 루시펠을 발견했다는 거겠지?”
“예, 발견했습니다.”
데프하우어는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자신의 성과를 말했다.
“그들은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있었습니다.”
“다른 세계?”
“예, 정령들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정령?”
“예. 그리고 그들은 정령왕이 열어준 포탈을 건너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데프하우어가 인형처럼 정지했다.
세레나는 데프하우어가 그러건 말건, 마음속으로 정보를 취합해 정황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반으로 나눈 전력, 정령왕이 열어준 포탈.
“데프하우어.”
“예.”
“정령왕 말고 다른 정령들 중 인간들과 각별히 친해 보이던 정령이 있었나?”
“친해 보이는 것 말씀이십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질문을 정정하지. 인간들 곁은 유난히 맴돌던 정령이 있었나?”
세레나가 그리 묻자 데프하우어는 바로 답했다.
“예, 물의 상급정령 에르노라 하나가 유세현과 김주희, 이강호의 부근을 끝임 없이 날아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데프하우어 명령 하나를 더 내리겠다.”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 바로...”
세레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프하우어가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 * *
빛과 어둠의 지대 외층부.
이강호에게서 얻은 기억을 토대로 중층부로 진입한 델바람 등등과 다르게 아무 정보가 없었던 마왕군은 아직도 외층부에서 단서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길, 천하의 이 몸이 이게 무슨 신세냐...”
벨제뷔트의 입에서 연신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지금 한낱 잡졸이나 할 법한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신세였다.
여유가 없기에 군단장이건 뭐건 싹 다 단서 찾기에 동원된 것.
“제기랄...”
유세현이 마왕을 처치하겠다고 호언장담 했을 때 그는 다시 권력을 쥘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유세현은 싹 입을 닫고 사라졌고, 자신의 처지는 바뀐 것이 없었다.
물론, 유세현이 그 당시 동맹을 제안할 생각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만...
“후...”
그래도 짜증이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길... 제기라알-!”
결국 참다못한 벨제뷔트가 발작을 일으키듯 고함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그의 머리 위로 검은 흑빛이 스쳐 지나간 것은.
‘저건... 저건...!!’
무척이나 익숙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데프하우어!”
벨제뷔트는 뭔가에 홀리듯 하던 일은 내던지고는 그를 뒤쫓기 위해 자리에서 도약했다.
벨제뷔트와 데프하우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