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67화 (55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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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디네.”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강호 오빠.]

이강호의 인사에 디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김주희와 투닥거리며 잠시 처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던 디네였지만, 이제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였다.

[잘... 지냈어?]

“뭐, 그럭저럭.”

[훗, 오빠는 언제나 한결같네.]

무미건조한 이강호의 말에 실소를 내뱉은 디네가 언제 오두방정을 떨었냐는 듯 사뿐히 지면에 착지했다.

인원들은 이에 아까와 달리 경청할 자세를 갖췄다.

이제부터 디네의 입에서 나올 말은 방금 전 김주희와 놀던 것처럼 영양가 없는 말이 아닌...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오빠들과 같은 대리자들에게 침략당한 상태야.]

“......”

[그중에서도 외부 결계를 뚫고 들어와 이곳까지 파괴한 것은 바로 놈들... 오빠도 잘 알고 있는 종족이야.]

“뭐?”

이강호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알베타스.]

“......”

종족명을 들은 이강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알베타스, 끝없이 진화하는 종족으로 에반 비텔스바흐를 앗아간 깊은 악연이 있는 종족.

‘그렇군. 놈들이었나.’

다른 종족에게 절멸당했으면 했는데...

[우리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놈들을 막을 수 없었어.]

“네 탓이 아니다. 디네. 알베타스가 우리와 만났던 그때보다 더 진화했다면 아무리 수가 많아도 상급정령의 힘으로는 막는데 무리가 있었을...”

[아니, 놈들도 놈들이었지만 놈들이 거느리고 있는 이상한 종족들...]

“응? 지금 뭐라고...”

[놈들은 다른 종족들을 거느리고 있었어.]

그리 말하는 디네의 눈동자에는 공포심이 서려있었다.

이강호는 디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놈들이 새롭게 다른 모습으로 진화 한 걸 다른 종족이 되었다고 인식한 게...”

[그런 게 아니야. 놈들은 알베타스가 아닌 다른 종족이 확실해.]

“...그게 무슨...”

“외형이 어떻게 되죠? 모습을 물로 표현해주실 수 있을까요 디네씨?”

이벨린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디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로 놈들의 형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다부진 체격.

투구 같은 두상.

형태가 점점 완성될수록 이강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놈은... 아니 이놈들은...

“쿠룬... 그리고...”

“샤크아크.”

하나도 아닌 두 종족이 알베타스를 따르고 있다니?

그들은 일반 하위 종족이 아닌 엘프나 델바람과 나란히 하는 상위 종족이었다.

“말이 안 된다. 놈들은 프라이드가 높아. 미치지 않고서야 타 종족을 따를 리...”

이강호가 별생각 없이 거기까지 중얼거렸을 때였다.

그의 뇌리에 순간 벼락이 치며 에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먹힌 건가?”

에반처럼?

놈들의 수장과 핵심 대리자들이?

“미친...”

아무리 이강호라고 할지언정 이번만큼은 욕이 안 나올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단일 종족인 상태로도 상대하기 짜증나는 종족인데, 두 종족을 흡수해버리다니?

동시에 그는 왜 용암지대와 설산지대가 닫혀버린 것인지 이젠 얼추 짐작이 되었다.

‘에반 때문이겠지.’

에반도 회귀 전 최후의 생존자에 속하는 인물.

만약 그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돌아온 것이라면, 그렇기에 인간의 노림수를 막은 것이라면.

별 이유도 없이 일이 왜 이렇게 꼬여버린 것인지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뭐 잘 풀리는 일이 없군. 그래서 디네, 놈들은?”

[놈들은 지금 이곳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어.]

디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이에 이강호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두고 이 세계로 구태여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디네. 우리도 그곳에 들어가고 싶은데. 안내해줄 수 있나?”

[......]

디네의 입이 꾹 닫힌다.

그럴 만도 했다.

사실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어서 그렇지, 타 정령들에게 있어선 인간들도 똑같은 침입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곳에 잠들어있는 무엇인가를 위해 세계를 파괴하려는 알베타스와 같은 존재... 그것이 인간인 것이다.

[......]

침묵이 길게 이어진다.

이강호는 차분히 기다릴 뿐 닦달하지 않았다.

디네, 튜토리얼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해온 동료.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입장이 달라졌지만, 그들에게 디네는 아직도 재잘거리기를 좋아하는 동료였다.

그리고 동료에겐... 강요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 디네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하고 착잡하기 그지없을까.

마침내 디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강호 오빠. 세현 오빠. 김주희... 내가 왜 이곳에 온 줄 알아?]

“......”

[...그냥... 그냥 얼굴이 오랜만에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온 거야.]

그렇게 말하는 디네의 목소리는 서글프게 울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적인데... 싸워야 하는 입장인데... 김주희 니 재수 없는 얼굴이 왜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지...]

“디네야...”

김주희가 마찬가지로 서글퍼져 디네를 향해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볼에 톡 닿자, 디네가 더 이상 복받치는 감정을 못 이겨내겠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왜... 왜 우리가 적이 되어야 하는 거야? 응?]

“...디네야...”

[왜 우리 세계에 그런 게 잠들어 있어서... 왜...!! 강호 오빠. 강호 오빠는 회귀자잖아. 이 세계에 대한건 대부분 알고 있었잖아. 왜 우리가...]

“...미안하지만, 여기 세계에 대한 건 나도 모르고 있었다. 회귀 전 이 세계는 닫힌 세계였거든.”

[......]

디네가 푹 고개를 떨궜다.

지금 그녀는 끓어오르는 이 감정을 어떻게 주체해야 될지,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세현 오빠. 강호 오빠. 주희야... 나... 이만 가볼게. 미안하지만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줄 순 없어. 지금까지 함께해서 정말 재미있었어. 적이 될지언정 이것만큼은 절대 잊지 못할...]

“잠깐만요 디네씨! 저희는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심층부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게 아니에요!”

이벨린이 떠나려는 디네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뭐?]

그러자 디네가 놀란 눈이 되어 홱 몸을 돌렸다.

이벨린은 목청을 가다듬은 뒤 계속 말을 이었다.

“방금 말한 그대로예요. 우리는 이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없어요. 정보도 없어 사실 파괴하는 방법도 모르구요.”

[...그럼 대체 왜 더 깊은 곳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막기 위해서예요. 놈들을. 우리가 클리어하기 전까지.”

[응? 지금 그게 무슨...]

이해가 되지 않는지 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벨린은 이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 빛과 어둠의 세계를 클리어하는 법을 알고 있어요. 아니 완벽히는 모르지만 거의 알고 있죠.”

다섯 세계로 이루어진 유적지, [파이브]는 어떤 세계를 클리어해도 신물 파편이 등장하며 세계 전체가 닫힌다.

즉슨 인간이 빛과 어둠의 세계를 클리어하게 되면, 이곳 물의 세계는 안전한 상태로 닫히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빛과 어둠의 세계를 클리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해요. 다시 말하지만 설산지대나 용암지대와 달리 완벽하게 클리어 조건을 알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아하, 그래서 놈들을 막는다고...]

“예, 맞아요.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셨죠?”

[응, 확실히 이해됐어.]

“그럼 더 깊은 심층부로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음... 나야 뭐, 마음 같아선 승낙이지! 그런데 이런 중요한 건에 대한 결정은 내 권한 밖이라...]

“예? 그럼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허락을 받아야 돼.]

“허락... 말인가요?”

[응, 그런데 내가 잘 설명하면 분명 이해해 주실 거야!]

“음...”

이벨린의 안색에 묘하게 짙은 그림자가 맺혔다.

디네.

천방지축 같은 이 물의 정령의 평소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꼬일 거 같은데...’

그래도 물러날 수는 없는 법.

“그럼 잘 부탁한다 디네.”

[걱정 마 강호 오빠! 나 몰라? 나 디네야! 디네!]

그렇게 인간 진형은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자신만만하게 변한 디네의 뒤를 따라 하릴없이 걷기 시작했다.

* * *

[저, 저건? 적이다!]

[잠깐! 얘들아! 멈춰봐!]

[어? 에르노라잖아?]

물의 정령들의 진형.

물의 정령들은 난데없이 적들을 데리고 나타난 디네 때문에 한바탕 큰 소동을 겪어야만 했다.

[야! 에르노라!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 곳까지 적들을 데리고 오다니 너 정말 미쳤어?]

[아, 그런 거 아니래도. 그리고 내 이름 에르노라 아니고 디네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아 진짜 뭐래는 거야. 디네는 무슨... 야! 그보다 너 이거 진짜 어떡할 거야? 공격하지 말라고 해서 일단 공격하지 않기는 했는데...]

[와, 진짜 인간이야. 나 정말 오랜만에 봐!]

[정말 우릴 공격하지 않을까? 에르노라가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방심하면 안 돼.]

물의 정령들이 사람들을 보며 수군거렸다.

이벨린은 그런 그들을 보며 멋쩍은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우리를 썩 반기는 모습은 아니네요.”

“뭐,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거지.”

이강호가 그리 답하며 디네를 응시했다.

디네는 아직까지도 이 정령 부대를 이끄는 지휘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 얘네들은 우리 편이라니까 그러네? 내가 보증한다니까?]

[아니, 너 자격도 없는데. 뭔 보증이야 보증은.]

[아 답답해. 됐고! 너랑은 말이 안 통한다. 정령왕님이랑 말해볼 테니까 비켜줘.]

[뭐? 정령왕님? 정령왕님이 니 친구냐? 게다가 거기까지 이놈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너 정말 미쳤어?]

그들의 말다툼은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의 싸움을 보는 듯한 느낌.

결국 이 싸움이 막을 내린 때는 이상을 감지한 정령왕의 분신이 그들의 앞에 나타나고 나서였다.

쿠구구-

보글보글-

[어, 어? 이건...]

[정령왕님?]

공간이 일시적으로 뒤틀리며 물이 합쳐져 거대한 구의 형상을 이룬다.

구체의 중앙에는 두 개의 눈이 있었는데, 정령왕이 눈을 번쩍 뜨자 모든 정령들은 고개를 숙이곤 예를 차렸다.

사람들이 디네를 따라 마찬가지로 예를 갖추자 정령왕이 천천히 입 열어 말했다.

[이들은... 대리자들이로군요.]

[예, 맞아요. 정령왕님.]

얼굴을 치켜든 디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동료들이기도 해요. 저들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정령왕님!]

[...오, 디네. 사랑스런 나의 딸...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할 리는 없고. 한번 자세하게 설명해보겠니?]

[예! 물론이죠!]

과거, 자애로운 정령왕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었던 물의 정령왕답게 물의 정령왕은 디네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경청해주었다.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모르는 상황.

마침내 자초지종을 설명한 디네가 입을 닫았다.

모두의 시선은 대번에 정령왕에게로 쏠렸다.

[흠... 그렇군요. 그런 이유에서 이들은...]

[예, 맞아요 정령왕님! 그러니 이들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흠...]

잠시 생각에 잠겼는지 정령왕은 입을 닫았다.

곧 정령왕이 결정을 내렸는지 말했다.

[안타깝지만 내부로 들여보내 줄 수는 없어요.]

“...왜지? 당신들에게도 결코 손해는 아닐 텐데?”

이강호가 물었다.

정령왕은 바로 답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굳이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막을 수 있다 이건가?”

[예, 맞아요.]

“거짓말이 능숙하지 못하군. 정령왕.”

[......]

“너희들이 더 깊은 내부로 들어갈수록 강해진다는 건 디네에게 들어 알고 있다. 분명히 마지막 심층부에서는 원래의 힘을 뛰어넘어 대리자와 필적할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 종족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쿠룬, 샤크아크가 없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두 상위 종족이 있는 한 유적지에 존재하는 세계의 운명은...

“멸망뿐이다. 그러니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해라. 우리를 신뢰할 수 없다고.”

[......]

정령왕이 침묵했다.

정곡을 찔렸다는 뜻이었다.

이내 정령왕이 다시 입 열어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솔직히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당신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 단지 대리자라서?”

[예, 맞아요. 대리자라서.]

“......”

이강호는 입을 닫았다.

정령왕의 단호함을 보건대 뭘 더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시간만 버렸군. 나중에 후회하지마라. 정령왕.”

이강호가 몸을 돌린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세계를 반으로 부술 것 같은 어마무시한 진동이 사람과 정령들을 덮쳤다.

[이, 이건?]

[큰일 났습니다! 천족과 티탄족들이...]

[최후의 저지선을 뚫었습니다!]

다급히 달려온 정령의 보고에 디네와 정령왕을 포함한 정령들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디네의 세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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