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4/606 --------------
‘...무슨...’
‘벨제뷔트가 이렇게 허무하게...’
싸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마계 2인자의 모습에 공간에는 일시적으로 한없이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제루웬도 마족도 인간도 그리고 그 대단한 로드인 아르펜조차도 그 자리에서 정지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벨제뷔트를 차분히 내려다보는 유세현.
꿀꺽-
지켜보고 있던 인원들의 목너머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유세현이 천천히 입을 뗐다.
“벨제뷔트.”
“......”
벨제뷔트는 체념한 것처럼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도 그는 체념하고 있었다.
“벨제뷔트.”
“...죽여라. 인정... 하겠다...”
벨제뷔트는 유세현과 함께 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일로 그가 어떤 성정을 지니고 있는 인물인지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동료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하지만 적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인물.
벨제뷔트가 판단하기에 유세현이 현재 자신을 살려줄 가능성은 0.001%도 되지 않았다.
“벨제뷔트.”
“...빨리... 죽여라... 나를 우롱하지 말고.”
단호하게 말하는 벨제뷔트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마왕에게 굴복했을 때도 그랬듯이 아무리 벨제뷔트라 한들 죽음은 한없이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무로 돌아간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저 부서져 없어진다.
“벨제뷔...”
“그만! 그만! 그만 내 이름을 불러라!! 빨리 끝내란 말...”
“난 지금 널 죽일 생각이 없다.”
유세현의 그 한마디에 벨제뷔트가 한없이 놀란 눈빛이 되어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뭐... 라고...”
“널 죽일 생각이 없다고 했다. 벨제뷔트.”
“......네놈, 대체 무슨 생각...”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유세현의 발언에 벨제뷔트를 포함하여 모두가 벙찐 얼굴이 되었다.
벨제뷔트가 했던 판단처럼 유세현이 여기서 벨제뷔트를 살려줄 이유는 1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현씨! 그놈은 우리를 죽이려 했던 놈입니다 살려준다니요!”
“세현씨 왜 갑자기 그런 판단을...!”
하지만 방금 전의 발언은 새발의 피였을 뿐.
이어지는 말은 그들에게 더욱더 큰 충격을 선사했다.
“벨제뷔트. 나와 동맹을 맺지 않겠나?”
“...뭐?!”
“응?”
“세현씨!! 지금 무슨...!!”
마족을 포함하여 인간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벨제뷔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너... 그 말... 진심이냐?”
어느 누구도 패배자에게 동맹을 제안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신뢰할 수 없는 자에게라면 더더욱.
“진심이다. 벨제뷔트.”
하지만 유세현의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유세현... 네놈... 정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벨제뷔트. 나와 함께 마왕을 처단하지 않겠나?”
유세현이 비로소 본심을 털어냈다.
“...?! 무, 무슨...”
벨제뷔트는 그 말에 한순간 무척이나 큰 당혹감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동맹을 맺자면서 갑자기 무슨 이런 뚱딴지같은 제안을 한단...
“큭... 크큭... 큭큭큭...”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정말 찰나의 순간 뿐.
벨제뷔트는 머리가 무척이나 뛰어난 자였다.
“크크크큭... 크하하하하! 유세현... 네놈...!!”
단번에 표정이 바뀐 벨제뷔트가 폭소를 내뱉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고 하더니!!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이윽고 굽혔던 무릎을 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벨제뷔트.
그가 이번에는 되레 유세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유세현,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진심으로?”
“물론이...”
“무리다! 네가 아무리 마왕과 필적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해도 넌 마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마왕을 쓰러트린다 해도...”
“인정받지 못 할 거라 이 말인가.”
“그렇다. 너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 어떤 짓을 해도 말이지.”
“흐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에게는 좋은 일 아닌가?”
그 말에 벨제뷔트의 입이 뚝 닫혔다.
확실히 그렇게만 된다면 최고로 혜택 받는 인물은 다름 아닌 벨제뷔트 본인이었다.
마왕을 제외, 무력만으로는 2인자이니까.
마왕이 죽고 난다면 힘 때문이라도 남은 마족들은 자신을 따라야 된다.
‘확실히 놈의 제안은 나에겐 무척이나 좋은 일이다.’
반란을 하기 위해 계속 각을 보고 있었지만, 너무 입지가 좁아진 탓에 아예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가 께름칙하다. 뭔가가...’
뭔가 유세현이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한 느낌.
당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단순 느낌만으로 거절하기에는...’
몇 번을 생각해도 이득일 뿐인 제안.
“흐음...”
그렇게 결론이 나왔기에 벨제뷔트의 고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유세현의 목적이 실제론 마왕을 없애고 마족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족세력을 단순히 약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만약 놈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면...
‘잘만하면 다시 내가 실권을 잡을 수도 있다. 원래 내 군세뿐만 아니라 마왕의 군세 전부를 흡수하면서!!’
“좋다, 수락하도록 하지 그 동맹.”
언제 그랬냐는 듯 자존감을 되찾은 벨제뷔트가 씨익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유세현은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원래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동맹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 * *
극적인 동맹 체결이후 또 다시 시작된 이동.
혹시나 유세현에게 간파당할까 조마조마했지만, 제루웬과 아르펜은 별 탈 없이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죽다 살아난 데르메가 그들을 열심히 한껏 띄워준 덕분이었다.
물론.
“어? 근데 아르펜씨 아까 세현씨에게 소개할 땐 마법부대 소속이라고 했는데 분명 저한텐 세현씨 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
“아, 제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아 오해가 있군요. 정확히는 세현씨와 함께 한 적 있던 마법 부대소속이었습니다.”
“아, 대마법사 아린 하이워커님의!”
“예, 맞습니다.”
약간의 위기가 있었지만 격렬한 전투 이후인지라 다행히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이거, 상황이 더 재밌게 돌아가는군. 마왕, 그 루시뷀트를 제거하겠다라...’
아르펜이 굉장히 흥미로운 듯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단순히 목적이 그것뿐일까?’
벨제뷔트를 뒤흔든 묘한 의문이 아르펜의 머릿속 또한 뒤흔든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왕 제거에 실패할 시 죽게 될 텐데 고작 세력 약화를 위하여 마왕을 치겠다니?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마족을 자신의 휘하에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마족을 휘하에 두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뢰할 수 있는 마족이 필요하다.
유세현이 그토록 아끼는 인간을 위에 두고 다스리겠다는 건 안일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자존심 강한 마족들은 참지 못하고 단번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나 벨제뷔트의 아래로 규합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세현이 마족을 휘하로 두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를 따르는 강한 고위 마족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유세현, 저 자에게 그런 마족이 있을 리가 없을 거란 말이지.’
‘라고 생각하겠지.’
전진해나가는 유세현의 시선이 일순간 벨제뷔트를 훑었다.
벨제뷔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동맹을 제안한 유세현이 당연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벨제뷔트의 생각이 일반적으론 맞는 것까지도.
허나 안타깝게도 유세현은 일반적이지 않는 존재였다.
그에게는 내부에 존재했었던 루시뷀트가 남기고 간 기억이 있었으니까.
스스로가 누군지 존재를 의심케 할 정도의 강렬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기억.
인간으로서 살아온 유세현의 기억보다도 아득히 긴 그 기억은 권능의 제어를 제외하고도 유세현에게 무수히 많은 정보를 선사했고 그로인해 유세현은 당장이라도 마군을 이끌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유세현은 신의 회랑에 진입하기 직전 마족의 습격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간은 아직도 약하다.’
강해졌지만 수가 너무 줄었다.
이 탑을 나가면 또 다시 신물파편 조각을 찾아 헤매게 될 텐데 전력이 부족할 것이 너무도 뻔했다.
힘이 필요하다.
한마디만 내뱉으면 거침없이 돌격하여 적을 끝장내버리는 강력한 힘이.
‘그러니...’
마왕을 없애 마족을 내 것으로 만든다.
반드시.
그 다짐 이후 유세현의 뿔피리가 반응한 때는 한참이 지나 마족과 인간을 몇 번 더 조우한 뒤에서였다.
* * *
‘어떻게 해야 된다... 어떻게...’
루시아와 무림군에 의해 퇴각한 키르쉬나.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고심하며 또 고심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 세레나를 가만히 두기에는 그녀가 남긴 발자취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길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분명 남기지 않으셨을 거다.’
그럼에도 자취를 남겼다는 건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인데...
‘제길, 그 빌어먹을 인간 계집... 그 인간 계집은 길목을 비킬 생각이 추호도 없다.’
레드드래곤 군단 일부에 속하는 키르쉬나의 부대만으로는 이제 이전보다 더욱 집결해버린 인간세력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키르쉬나는 타들어가는 답답함에 가슴을 몇 번이고 강하게 내리쳤다.
퍽! 퍽!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
이대로라면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그때.
“키르쉬나님! 로드께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로드께서? 갑자기 왜...?”
저벅 저벅-
간이식 막사내부 안으로 육중한 체격을 지닌, 굉장히 매섭게 생긴 눈빛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니 정말로?! 도대체 퀴르벨이 왜...’
키르쉬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퀴르벨을 확인키 무섭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레드의 딸 키르쉬나, 로드를 뵙습니다.”
“로드를 뵙습니다!”
“어, 그래.”
퀴르벨은 거만한 발걸음 그대로 키르쉬나가 일어난 자리에 가 앉았다.
퀴르벨은 키르쉬나가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뒤에야 운을 뗐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느냐? 키르쉬나?”
“...예?”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죄송하지만 잘...”
“인간 따위에게 패퇴하다니. 무능한 놈...”
“......”
“키르쉬나.”
“예.”
“너, 세레나가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고 있지? 뒤따를 방법도.”
정말 뜬금없는 질문, 그러나 키르쉬나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이 일은 측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건만 어떻게?
‘설마 배신자가? 아니 그럴 리가...’
“어이, 키르쉬나. 내 질문에 감히 답하지 않을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말하신 대로 뒤따를 방법도...”
키르쉬나는 어정쩡하게 거짓을 내뱉는 걸 선택하지 않았다.
퀴르벨의 저 쏘는 듯한 말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때 종종 하는 말투인 탓이었다.
여기서 거짓말을 했다간 정말 뼈도 못 추릴 가능성이 큰 것!
키르쉬나는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이, 인간 놈들을 격퇴하면 보, 보고할 생각이었습니다. 놈들을 격퇴시키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로드시어.”
“호오, 그랬었어?”
“예. 하지만 놈들의 군세가 생각보다 훨씬 많았던지라... 수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당시에는 거의 수가 막상막하였지만, 그녀는 이것만큼은 거짓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그래. 그럼 그건 둘째치고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세레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정확한 위치는 저도 잘 모릅니다. 일전 보고 드렸다시피 행방불명이 되셨기에... 다만 이곳의 중추로 향하셨을 거라 예상됩니다.”
“중추로? 어떻게? 우리조차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
이걸 어떻게 말해야 될까.
키르쉬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이, 키르쉬나...”
‘젠장...!’
키르쉬나는 눈을 질끔 감았다.
“그... 사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세레나님께서 특수한 물건을 얻으셨었습니다.”
“음? 물건?”
“예, 그 물건이 중추로 안내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진작 보고하지 않았지?”
“확실치 않아서 조사를 한 뒤에 세레나님께서 직접 보고 한다고 하셨는데...”
“행방불명이 됐다... 이건가?”
“예.”
“추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만약을 위해 세레나님이 만드신 특수마법이 있습니다. 흔적을 남기면 해독하는 방식인데 이런 식으로...”
키르쉬나는 어쩔 수 없이 특수한 마법식을 사용해 해독법을 선보였다.
퀴르벨은 그것을 보자 흥미로운 눈빛이 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세레나가 만들었다는 거냐?”
“예.”
“크하하하! 역시 덜떨어져도 내 핏줄이라는 건가? 확실히 이런 식으로 하면 이 이상한 공간에서도 흔적을 남길 수 있긴 하지. 머리 좀 썼는걸?”
왠지 기분이 좋아졌는지 만족스럽게 웃은 퀴르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가보도록 할까?”
“...예? 어딜...”
“어디긴. 당연히 내 딸 세레나의 곁이지.”
“......”
“귀찮은 벌레 놈들, 이참에 다 없애주도록 하지. 키르쉬나 곧 레드들이 도착할 것이다. 부대를 정비해라.”
“...예. 로드시어.”
키르쉬나는 한편으론 이를 악무면서도 퀴르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퀴르벨은 레드의 로드였으니까.
그렇게 키르쉬나가 바깥으로 사라지자, 퀴르벨이 손가락을 툭 튕겼다.
그러자 한 드래곤이 나타나 퀴르벨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떠십니까. 로드시어.”
“그래, 인정하도록 하마. 지금까지는 너에게 이 정보를 준 드레보스의 추측이 다 맞다. 비야크.”
“그렇다면...”
“하지만 경거망동 하지 마라.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으니.”
“......”
“앞으로 내가 다 밝혀낼 것이다. 그리고 만약 네가 한 말이 사실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러시다면...”
“퀘루안을 죽인 놈들을 친히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할 것이다.”
신의 회랑(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