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7/606 --------------
‘이런 미친!’
크라베스는 예상치 못했던 퀴르벨의 행동에 억소리를 터트리면서도 곧장 대응에 들어갔다.
주먹에 강대한 마력이 서려 있다.
저건 슬그머니 떠보기 위해 하는 공격 같은 것이 아니다.
저걸 제대로 맞게 된다면, 육신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될 터.
스슥-
콰앙!
다급히 가드를 올린 크라베스의 양팔과 퀴르벨의 주먹이 맞부딪치자, 이차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며 맹렬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치잇.’
그것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폭발이 아니었다.
엄청난 고열.
크라베스의 미간은 순식간에 와락 구겨졌다.
‘제기랄... 이 미친 도마뱀자식...’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싸움을 걸 줄이야.
퀴르벨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호오, 쓰레기 주제에 이걸 막아?”
“너... 이딴 짓거릴 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동시에 크라베스의 눈이 번뜩 빛났다.
치지지직-!
파앗-
영혼의 힘을 끌어올린 크라베스의 육신이 순식간에 퀴르벨을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시작된 전투.
“쓰레기가. 단번에 처리해주도록 하마.”
“망할 도마뱀 자식이 어디 뚫린 입이라고...!!”
슈욱-
퍼엉!
콰과광!
파바바바밧!
공방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이에 둘 주위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어휴...”
엘라뉘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 닫힐지 모르기에 한시라도 빨리 저쪽으로 넘어가야 하건만, 이런 식의 불필요한 전투를 일으키다니.
“크라베스님!”
이어서 크라베스를 돕기 위해 영혼들 사이에서 이브 등등 추종자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 순간까지도 크라베스와 퀴르벨은 격렬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펑-!
퍼버버벙!
퀴르벨이 발현한 거대의 화염구가 아슬아슬하게 크라베스의 볼을 스쳐 지나간다.
스쳤을 뿐이건만 크라베스의 볼에는 검은 그을음이 남았다.
‘이 불길...’
크라베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 누군가가 떠올라 맴돌고 있었다.
보통의 불꽃과는 차원이 다른 불꽃을 다루던 놈...
‘이강호...’
퀴르벨의 불꽃은 이강호 마냥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역시 로드... 광룡이라 불린다 했었나? 불릴만 하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퀴르벨은 무척이나 강한 상대였다.
허나.
‘질 수는 없지...’
그 또한 블러드 소울이란 한 종족을 이끄는 수장.
게다가 드래곤처럼 색깔별로 수장이 나뉘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단일, 한 번 망했던 세계를 구원한 희망이자 영웅으로써 패배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고오오오-
퀴르벨의 불꽃에 맞서 크라베스에게 휘감긴 영혼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슬쩍 흘겨 살핀 엘라뉘스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전투에 참여하려는 이브와 렘벨크를 포함한 크라베스의 추종자들을 막아섰다.
“잠깐, 멈춰라.”
“놈... 지금 가로막는 거냐? 좋다... 너 먼저 없애...”
“잠깐, 지금 우리가 싸우게 되면 일은 정말 것 잡을 수 없게 된다.”
“...뭐? 그게 무슨...”
“당신들의 제왕, 크라베스가 한 말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뭐?!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엘라뉘스! 이딴 놈,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30초 안에...”
이야기가 들렸는지 전투를 이어가고 있던 퀴르벨의 역정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허나.
“시르벨린. 알겔라우스. 드라프나우어.”
엘라뉘스가 세 로드를 슬쩍 흘겨보며 작게 읊조리자 시르벨린이나 드라프나우어 뿐만 아니라 크라베스에게 거북함을 보이던 알겔라우스까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현 시점에선 엘라뉘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계속이어 전투를 하게 되면...
슈슈슉-
순식간에 다가간 세 로드가 퀴르벨을 막아섰다.
“어이 퀴르벨. 거기까지 해라. 지금 저 두 종족과 여기서 전면전을 할 시간 따윈 없다.”
“닥쳐! 나도 아니까! 누가 한대? 전면전이 일어나기 전에 놈들의 머리를 끝장내면 그만이야. 다시 말하지만 30초만 있으면 저놈의 머리통을 부술 수...”
퀴르벨은 더욱 열이 받았는지 더더욱 크게 역정을 냈다.
평소에는 굉장히 정상인 듯 하면서도 분노를 터트리게 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존재, 그가 바로 퀴르벨이었다.
그리고 퀴르벨은 스스로 허접하다고 생각하는 종족에게 동급이라 취급당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에이...”
이를 알아챈 알겔라우스가 쯧 혀를 찼다.
이 상태의 퀴르벨은 말로는 말릴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붙잡아!”
알겔라우스의 외침과 동시에 네 명의 로드가 일제히 퀴르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는지 크라베스를 신경 쓰고 있던 퀴르벨은 순식간에 네 로드에게 모든 사지가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퀴르벨이 바둥거리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 너희들 뭐 하는 거냐!! 이거 안 놔?!”
크라베스는 그런 퀴르벨을 뒤로 한 채, 다른 로드들을 응시했다.
“지금 뭐하는 거지? 너희들 우리들과 한판 붙어볼 생각이었던 거 아니었...”
“퀴르벨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당신의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쿠구구구-
그 순간 생성되었던 균열이 빠르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렇게 많은 시간은 유지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지금 당장 통과하지 않으면...
“퀴르벨, 이래도 더 해볼 생각인가? 자칫하다간 준비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만...”
“...쳇!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그만 놔라.”
각 로드들은 퀴르벨의 약조를 듣고 나서야 그를 놔주었다.
등을 휙 돌린 퀴르벨이 떠나기 전 크라베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곱게 죽지는 못할 줄 알아라.”
“큭, 너야말로...”
“어서 움직여라!”
“포탈로 뛰어들어!”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엘프와 블러드 소울, 드래곤, 세 종족은 마치 서로 동맹을 맺기라도 한 것 마냥 서로 뒤섞여 일사분란하게 포탈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 * *
한편 그 시각.
신의 회랑 내부.
이강호의 팀에 이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이벨린과 남궁시영은 앞으로 어떡해야 될지에 대해 회의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아씨, 강호씨가 뭐 따로 얘기해 준 것 없나요?”
“예, 없습니다.”
“흠... 난감하군요...”
루시아의 답변에 이벨린이 지긋한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꼬아 턱을 받혔다.
이 중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이강호에게서 따로 정보를 받았을 인물은 루시아, 그녀 정도 밖에 없었는데 그녀조차도 받지 못했다면 정말 아무도 이 신의 회랑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석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예,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어찌됐던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으니 강호 오빠의 팀도 이곳에 도착은 했을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찾도록 해요!”
유혜인의 말에 이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강호의 팀도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세 개의 주술이 동시에 성공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내부로 이동되지 않는다 했었으니까.
“그럼, 당장 움직이도록 하죠. 스승님, 레피아 두 분께서 수색 팀장을 맡아주세요.”
“그러도록 하마.”
“그러지 뭐.”
“그럼 출발 준비를...”
“알았어.”
단도를 휙휙 돌리고 있던 레피아가 답을 함과 동시에 등을 홱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곧바로 아린이 따랐다.
이벨린은 그런 둘의 등을 지그시 응시하며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추적의 달인 레피아와 대마법사인 아린이 이곳에 있는 건 천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강호는 이렇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여, 레피아와 아린을 이곳에 배치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혜인씨의 말처럼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해.’
이강호에게 들은 바, 이 지역은 무척이나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안전지대에 가만히 있으면 이종족이 등장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안전해야 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분명 가만히 있는다 하더라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된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렇게 강제 이동된 공간은...
‘대부분 좋지 않다고 했었다.’
그러니 계속해서 이동할 것.
이것은 이강호가 그녀에게 해준 몇 안 되는 조언 중 하나였다.
“총지휘관님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죠.”
이벨린이 손을 쓱 내리자,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잠깐, 라부르스. 여기... 아까 지나왔던 장소 아니야?”
표식용으로 만들어둔 마력구체를 발견한 라부르스의 동료 쿠르크가 말하자, 그것을 본 라부르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이곳에 들어와서 벌써 하루.
그들은 처음에 만났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과도 조우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무슨 이런 장소가...”
그들이 봤을 때 이곳은 고작 15명의 소수 인원으로 다니라고 만들어둔 공간이 아니었다.
최대한 많은 인원들을 흩뿌려 공간의 왜곡점을 찾고, 어디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여 나아가야 되는 곳.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아니 그게 통할지도 미지수다.’
지금까지 겪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왜곡점 주위에 있는 균열은 양 공간을 왕복할 수 있는 균열도 있었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일방통행 균열이 더 많았다.
대규모 인원이라 할지라도 일방통행 균열에 잘못 휘말리는 순간 뿔뿔이 흩어질 수 있는 것.
아무쪼록 현재 라부르스 뿐만 아니라 유세현도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이래서 강호가 말해줘도 별 의미가 없을 거라고 한 거군.’
유세현은 마나의 흐름에 의식을 집중했다.
마력이 난잡하게 배배 꼬아져있어 있어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는 게 존재할지도 모른다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얼마의 공간을 나아갔을까.
특정 왜곡점을 지난 순간이었다.
우웅! 우웅!
집중하고 있던 유세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공간 포켓이 난데없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의문에 찬 유세현은 인원들의 시선이 다른 왜곡점에 쏠린 틈을 타, 아공간 포켓을 꺼내 내부를 살폈다.
‘이건...’
그는 진동의 원인을 살포시 쥐고 조심스레 바깥으로 꺼냈다.
지잉- 지잉-
계속해서 격렬하게 진동한다.
유세현의 손에는 김다혜가 죽기 전 자신에게 넘겨준 아이템, 기억의 뿔피리가 쥐여있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신의 회랑으로 진입한 이후 그는 이것을 안 살펴보지 않았다.
이강호조차도 용도를 모르는 에픽 등급의 아이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뿔피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심지어 불어보기까지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정보 변환도 없었기에 다시 넣어둔 것이었는데...
유세현은 조심스레 뿔피리를 꺼내 다시 한 번 정보를 살폈다.
아이템명: 기억의 피리.
등급: 에픽 [??? Rank]
상세정보: 기억을 담고 있는 피리입니다. [기억이 무엇인가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특수한 힘에 의해 나머지 자세한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미세하게 정보가 바뀌었다.
‘무엇인가에 반응하고 있다라... 지금이라면...’
유세현은 피리에 입을 갔다댄 뒤 힘껏 숨을 불어넣었다.
우우우웅-!
그러자 군데군데 난 구멍으로 바람이 빠져나오며 지금까지 울리지 않던 뿔피리가 웅장하게 소리를 내뿜기 시작했다.
“뭐, 뭐야?”
주위 균열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 다급히 소리의 발생지인 유세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세현이 숨을 멈추고 뿔피리에서 입을 뗀 순간이었다.
슈슈슈슉-
왜곡점 주위에 있는 균열이 소리에 공명하며 하나로 합쳐지더니 보통의 균열보다 더 거대한 균열, 포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에 모두가 놀라 소리쳤다.
“어?!”
“이, 이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길이 조금이지만 보이는 순간이었다.
신의 회랑(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