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38화 (52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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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천마는 고독했다.

그는 천하제일검, 10대 고수 등등 수많은 귀재를 배출한 독고세가라는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어미 되는 자가 정실이 아닌 노예 신분의 첩이었기에 마땅한 이유 없이 항상 세가 사람들에게서 질타와 배척을 받았다.

화풀이용의 감정 쓰레기통.

그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그들은 천마에게 가문의 비전 무공은커녕 흔한 일반검술조차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12살이 되던 해 유일하게 그를 아껴주던 어미가 숙부의 주먹에 의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을 때, 천마는 복수를 다짐했다.

고작 정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이 가문사람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방관만 한 자신의 아비, 아니 쓰레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을.

그 다음해 세가는 어미가 죽어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어진 천마에게서 독고의 성을 빼앗은 뒤 세가로부터 방출했지만 천마는 이에 괘념치 않아했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세가는 그에게 있어서 감옥.

세상이 얼마나 난세이건, 그에게 있어서 현재 이 세가보다 더한 곳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배고프면 음식을 훔쳐 연명하고, 남은 시간에는 오직 복수의 일념을 다지며 칼을 휘둘렀다.

그렇게 성장하고, 또 성장하여 낭객이 되어 얼마나 정처 없이 떠돈 것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을 때.

아무도 그에게 무공와 검을 알려준 일이 없건만, 그는 어느덧 그의 어미가 만인의 하늘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 천(天)과 똑같은 천(天)의 별호를 지닌 초고수로 불리고 있었다.

천마는 도전해오는 비무를 단 한 번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끊임없이 했다.

패한 자들은 천마의 강한 무공과 기상천외한 검술에 하나같이 큰 경외를 보냈다.

그렇게 홀로 천마신공을 만들어낸 그가 미쳐버린 신수, 광룡을 갈랐을 때.

그는 비로소 단신으로 독고세가로 쳐들어가 세가의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자신의 아버지였던 자는 물론이거니와 10살 된 어린아이, 막 태어난 아기라 해도 그는 봐주지 않았다.

천마는 마지막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숙부의 심장을 찌른 뒤, 피로 얼룩진 가택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를 뒤늦게 말리러온 고수들이 보았고, 천(天)이라 불리던 천마는 그때부터 천마(天魔)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천마는 민간인들에게 폭거를 일삼던 마교에 쳐들어가 교주를 베고, 스스로 교주의 자리에 올라 교의 교리를 다시 썼다.

신분 따위는 상관없는, 힘의 순리가 곧 진리가 되는 지금의 교리를...

* * *

트르르륵-

탁!

‘....!!’

마치 영화필름이 끊기듯, 1인칭으로 펼쳐지고 있던 장면이 뚝 끊기며 어둠이 찾아왔다.

유세현은 그제야 비로소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린다.

‘으...’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10년? 20년? 아니면 30년?

한 사람의 인생을, 천마의 시점으로 생생히 느꼈다.

마치 천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 돌아가야 해.’

유세현은 이번에야 말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허우적거렸다.

내면세계의 시간이 아무리 바깥과 많이 다르다 해도, 한 사람의 인생을 전부 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상태라면 바깥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그렇게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이번에는 다른 기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유세현이 거부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마왕의 기억은... 이미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 *

‘으...’

마왕의 기억까지 전부 들여다 본 유세현은 더욱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두 인물의 방대한 정보량은 그것을 접한 것 자체만으로 사람인 그에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마왕의 기억은 그나마 중간 중간 잘렸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미쳤을 것이다.

강력한 두 존재를 자신의 내면에 살게 해준 것에 대한 부작용이 이런 것일 줄이야...

‘으...’

이 정보량을 대체 어떻게 통제해야 된단 말인가.

유세현은 유입된 두 존재의 기억에 의해, 현재 자신이 유세현인지 조차도 헷갈리고 있었다.

‘큭... 안돼... 정신차려야 된다.’

기억에 먹히면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될 터.

어쩌면 정신이 나가 피아도 구분 못하는 괴물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동생이나, 친우 이강호, 김주희 등등 동료들에겐 피해를 절대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절대로...

‘난... 나다!’

유세현이 눈을 빛내며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세현이 비로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

가볍게 숨을 내뱉는 그의 눈빛은 전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슈우우욱-

쿵!

루시뷀트가 내지른 루베르크가 유세현의 목 바로 옆을 스쳤다.

그가 잘못 노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정도쯤 되는 대리자는 결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목에 다다르기 직전, 유세현이 빙그르르 굴러 회피했다.

[으음?!]

살짝 놀란 듯 작은 탄성을 내뱉은 루시뷀트가 즉시 유세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세현이 깨어난 것이라 판단을 내리고 채 움직이기 전 움직임을 미리 봉쇄하기 위함이었지만.

“어딜.”

유세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재빨리 굴러 빠져나온 유세현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루시뷀트의 몸체를 걷어찼다.

빠악!

[큭!]

이에 얻어맞은 루시뷀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유세현이 착용하고 있는 공간의 부츠는 과거 티탄족의 유물.

루시뷀트가 착용하고 있는 마갑주의 방어를 뚫고 꽤 큰 충격을 입힌 것이었다.

[군주시어!! 괜찮으십... 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세현은 김주희를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던 레오릭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이에 레오릭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항전에 나서야만 했다.

‘무슨...’

레오릭은 안 그래도 빨랐던 유세현의 공격이 왜인지 이전보다도 더 빨라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아공간 포켓에서 여분용 검을 꺼낸 유세현이 허리를 젖혀 날아오는 그라프쉬르를 아슬아슬하게 회피함과 동시에 암흑투기를 레오릭을 향해 날렸다.

‘아니?! 이건...!!’

그리고는 곧장 검으로 레오릭의 목을 노렸다.

‘큭!’

레오릭은 어쩔 수 없이 목을 내주지 않기 위해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고, 유세현은 그사이 쓰러져있는 김주희를 빠르게 챙겼다.

김주희의 상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이기 그지없었다.

“김주희!”

“서... 선배...?”

“그래 나다.”

“깨어...나셨군요. 다행...이예요.”

그런 주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유세현이 깨어났다는 것에 옅은 안도의 미소를 보였다.

과거, 자신의 몸만 챙기던 여우 갔던 김주희는 어디가고 어쩌다 이런 멍청이 같은 애만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일까.

“아니다 싶으면 버렸어야지. 바보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헤헤...”

유세현은 짧게 혀를 참과 동시에 곧장 질주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다.’

김주희를 등에 짊어지고 루시뷀트와 레오릭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김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또한 불가능일 게 뻔했다.

그러니 이곳을 벗어나 도움을 청한다.

그게 그의 목표였지만...

“선배... 이곳을 벗어나 도움을 청하려 하는 거라면... 무리에요. 처음 준비했던 계획이 막혀... 차선책을 실시하고 있는 도중이거든요...”

“뭐? 차선책? 그렇다면 현재 팀이 3개로 쪼개져 있다는 거야?”

“예... 맞...아요.”

유세현의 미간이 일순간 꿈틀거렸다.

차선책.

이벨린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강호에게 미리 언질 받은 그는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족들이 막고 있어서 두 번째를 선택한 거구나.’

“그런데 두 번째 장소는 웬만해선 적들이 모르는 거 아니었어? 설마 미행이라도 당한거야?”

“모르...겠어요. 미행은 확실히 아니고... 제르오펜이 배신... 했다고 해도 뭔가 말이 안 돼요... 놈들 전부가 제르오펜이 있는 곳이 아니라 이곳으로 몰려왔거든요. 제르오펜은 이벨린씨 팀으로 편입돼서 이 장소 자체를 모를 텐데...”

“......”

유세현의 입이 꽉 닫혔다.

팀이 쪼개져있는 상황이라면 김주희의 말처럼 지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자신의 몸을 챙기기도 힘든 상황일 테니까.

‘그럼 남은 방법은 어떻게든 버티는 것뿐이라는 건데...’

“김주희, 주술은 어떻게 됐어. 성공은 했어?”

“예. 약 4분 뒤에... 문구만 새겨 넣으면 끝이에요...”

4분.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대리자에겐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유세현은 마음을 다잡고는 김주희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주희 일단 정말 고맙다. 이렇게 될 때까지 지켜줘서.”

“헤헤...헤... 뭘요... 당연한 걸 한 건데요. 선배 그보다... 적이 와요...”

치지지지직-

콰과과광-

흑뢰와 함께 하늘에서 검은 인형(人形)이 유세현의 머리위로 뚝 떨어졌다.

[어딜 감히 내빼려 하느냐. 넌 못 간다.]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고 나야.”

유세현은 마찬가지로 흑뢰를 사용해 되받아쳤다.

치지직-

콰과과광!

이에 서로 맞부딪치며 상쇄되는 흑뢰들.

루시뷀트는 이 모습을 보고는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론 적잖이 당황해했다.

‘내 흑뢰를 저런 가짜가?’

상쇄되었다는 것은 힘이 동급이라는 의미.

이에 유세현도 자신이 해놓고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권능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막 익힌 것이 아닌, 마치 예전부터 오랜 시간 다뤄온 듯한 감각.

[네놈, 방금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후웅-

가속하여 접근한 루시뷀트가 유세현을 향해 사선으로 대검을 내려그었다.

유세현은 그것에 평소처럼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다.

살짝 몸을 틀어 대검을 회피하고, 팔꿈치로 가슴팍을 밀쳐낸다.

그러면 루시뷀트는 일순간 균형을 잃을 것이기에 다시 자세를 잡는 동안 시간을 끄는 게 가능하다.

이것이 김주희를 짊어지고 있는 그가 현재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니, 방법이었을 터였다.

대검을 회피하고 생각했던 대로 팔꿈치로 가슴팍을 밀쳐내려던 유세현의 두 눈에 문득 또 다른 경로가 비쳤다.

그것은 이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경로였다.

유세현은 일부러 한 박자 늦게 팔꿈치로 가격하는 척하며, 루시뷀트가 방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그리곤 그가 예상처럼 방어를 위해 손을 올리기 무섭게 무게중심을 아래로 하여 몸을 역으로 돌려 떨어뜨림과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해 발로 루시뷀트의 투구를 가격했다.

빠악-

[...!!]

제대로 가격당한 루시뷀트는 순간 넋이 나간 듯 자리에 멈춰 섰다.

투구에 감춰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이마에는 현재 힘줄이 뽈록뽈록 돋은 상태였다.

[네놈...]

파앗-!

부상자를 업고 있는 자에게 틈을 보이다니, 그로서는 엄청난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잔뜩 열이 받은 루시뷀트가 어마무시한 마력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유세현에게 재차 접근했다.

그때까지도 유세현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뭐지?’

적의 경로가 엄청나게 뚜렷하게 보인다.

마치 뭘 할지, 뭘 노리고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

아까전의 흑뢰도 그렇고... 이번의 반격도 그렇고...

‘설마...’

유세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시뷀트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개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세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천마와 마왕, 그들이 행해왔던 힘의 활용법이나 검법 등의 일부가 기억과 함께 현재 자신에게 배어들었음을.

신의 회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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