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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굉장히 신중한 걸음걸이를 보이며 제단 근처로 다가온 마족은 오른팔을 잃은 외팔의 마족이었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
‘후...’
김주희는 만에 하나를 대비해 창대를 꽉 움켜쥐었다.
놈의 목적이 제단이라면 그나마 나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세현 선배라면...’
놈은 높은 확률로 이곳을 뒤질 테고, 혹시나 발각된다면 그 즉시 놈을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음? 이건...?”
마침내 제단이 눈에 들어온 것인지 마족이 그곳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뭔가를... 한 건가?”
마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에 김주희는 마족의 목표가 신의 회랑이 아닌 유세현이라는 것을 파악함과 동시에 의문에 빠졌다.
‘놈은 역시나 주술에 대해 모른다. 그런데 주술에 대해 알지도 못한 놈들이 대체 어떻게...’
이곳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이강호의 정보에 따르면, 이곳은 신의 회랑에 대한 존재를 알아낸 자들이 거기서 더 힘겹게 단서를 모아야지만 겨우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뭐지? 대체 어떻게... 어디서 놈들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간 거지?’
배후가 분명히 있다.
김주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마족의 얼굴이 낯이 익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한 얼굴은 분명 아닌데,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느낌...
‘뭐지? 착각인가?’
그녀는 한 번 마주한 적은 웬만하면 잊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습관, 행동 패턴 등등을 외워둠으로써 추후 다시 조우했을 때 그것을 적극 활용하여 공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흠... 대규모 전투 때 만났던 놈인가?’
김주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굳이 놈에 대해 애써 떠올리려 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발각이 되느냐 안 되느냐.
그것뿐이었으니까.
마족이 이리저리 제단 주위를 둘러보다 손가락으로 제단 주위를 쓱 훑었다.
마족은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흠... 발자국조차도 5분 안에 없어지는 곳에서 타고남은 재라...”
중얼거린 마족이 순간적으로 목을 획 돌렸다.
놈이 응시한 곳은 김주희가 정확히 숨어있는 장소였다.
‘...!!’
파앗-
눈이 마주친 순간 김주희는 순식간에 보법을 운용해 마족을 향해 튀어나갔다.
김주희를 발견한 아가레스는 그녀를 보기 무섭게 쾌재를 불렀다.
“크하하하! 여기 있었군!”
유세현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나, 아가레스는 김주희가 튀어나온 장소에 유세현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어.”
인간들 모두가 마족에 대항해 힘겹게 싸우고 있는 현재, 저런 강자가 이때까지 잠자코 숨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휘이익-
김주희의 날렵하면서도 예리한 창이 아가레스를 향해 파고들었다.
아가레스는 너무도 빠른 속도에 순간적으로 흠칫했지만, 능숙하게 자신의 장기인 어둠의 못을 날려 방어함과 동시에 몸을 재빨리 뒤로 빼냈다.
‘저 계집은 분명 빙결능력을 사용하는 인간 측의 에이스. 내가 상대할 게 못 된다.’
그 후, 아가레스는 곧바로 레오릭 주위에 배치해두었던 통신병에게 통신을 보냈다.
[놈을 발견했다. 당장 내가 일러준 좌표를 레오릭님께 알려라.]
[예!]
그 사이 김주희는 재차 아가레스의 목숨을 노렸다.
“어딜 도망치려고. 넌 못가.”
이에 아가레스가 비릿한 조소를 내뿜었다.
“크크크, 나에게 이토록 목매는 걸 보니 저곳에 놈이 있나 보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걸 보니 온전한 상태가 아닌가 보군.”
“...개소리.”
“정곡을 찔렸단 표정이군. 앞으로 30초, 그 안에 그분께서 이곳으로 오실 거다.”
“......”
아가레스의 중얼거림에 김주희의 창에 망설임이 발생했다.
만약 놈이 정말 그새 연락을 한 것이라면 놈을 처치하는 것보단 한시라도 빨리 유세현을 챙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왜, 내가 그새 연락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나? 그럼 이렇게 말하면 믿을 수 있으려나? 너희에게 귀화한 마족.”
“...!!”
“놈과 연락을 주고받던 자가 바로 나다.”
“...큭!”
김주희가 곧장 몸을 돌렸다. 놈이 만약 진짜 제르오펜과 연락을 주고받던 자라면 놈의 말처럼 실시간으로 정보가 새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이탈해서 세현 선배를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 해!’
하지만 김주희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숨어있던 이유도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진퇴양난.
‘앞으로 약 6분.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끌어야 해.’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이곳입니다. 군주시어!”
쿠구구구구-
포효한 아가레스의 육체가 갑자기 부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집채만 하게 커졌다.
그의 고유특성 거대화를 사용한 것이었다.
“받아라!”
거대해진 몸체만큼이나 커진 대량의 어둠의 못이 유세현을 들쳐 업은 김주희에게 날아왔다.
김주희는 놈의 그 모습을 본 순간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셀론... 맞아. 그때의 그 마족이 틀림없어!’
이제는 먼 과거, 판도라 외부 마교의 본거지에서 셀론과의 전투 당시 셀론의 자폭에서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팔을 자른 마족.
“큭, 이런...”
화려한 몸놀림으로 못을 피하는 김주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날아오는 못이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못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저놈... 일부러 이목을 끌고 있다.’
보다 더 자신의 위치를 잘 알리기 위해서.
‘이래서는...’
도저히 숨을 수가 없다.
김주희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아가레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화 된 몸은 잘 다루지 못하는 이상 샌드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빙공을 사용해 순식간에 없애버리려는 심산이었지만...
“크크크크.”
김주희가 접근하자 아가레스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축소시켰다.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해줄 성 싶으냐. 인간 계집.”
“...작아졌다 해도 결과는 똑같아. 넌 지금 죽게 될 거야.”
“기절한 인간을 둘러업은 채로 어딜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스스슥-
아가레스가 채 말을 끝낼 새도 없이, 순식간에 고속 이동한 김주희가 아가레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가레스는 방금 전보다도 훨씬 빨라진, 그 어마무시한 속도에 놀라 재빨리 몸을 뒤로 뺐지만, 김주희의 창은 어느새 그의 목덜미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마, 말도 안돼. 어떻게 한 명을 업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눈에 잔상을 남길 정도의 속도를 선보이다니?
‘주, 죽는다!’
아가레스가 죽음을 직감한 찰나였다.
[훌륭하다. 아가레스.]
“...!!”
쿠우우우!
칼날 바람을 가르며 하늘에서 레오릭과 마왕이 김주희의 머리위로 뚝 떨어졌다.
* * *
갑작스러운 두 존재의 등장에, 김주희는 아가레스의 목숨을 거두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유세현을 업고 있는 상태인 현재, 마무리 했다면 등을 내주게 되어 치명상을 입게 되었을 것이 너무도 다분했다.
‘큰일이다.’
김주희의 이마에서 삐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곳에는 이강호 말고도 루시펠, 제넥, 아퀼라 등등의 강한 동료들이 있었으나 전황이 나빠 도저히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호호호. 넌 못 간다. 가짜.”
“비켜! 이 망할 계집아!”
아퀼라는 나르슈나와 휘하부대에게.
이강호는 쿠니아칸과 다른 여러 병사들에게.
마지막으로 루시펠은 벨제뷔트의 군세에 붙잡혀 있었다.
유세현의 상태를 본 마왕이 김주희를 향해 물었다.
[계집, 어떻게 된 거냐. 놈은 왜 저런 상태인 거지?]
“...말해주면 그냥 보내줄 거야?”
[이년이 어딜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됐다, 레오릭.]
당장이라도 돌진할 것 같은 레오릭을 마왕이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마왕은 잠시 유세현을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마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벌레는 벌레였던 모양이군.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먹혀버리다니.]
“......”
[전투를 고대했건만, 실망이군.]
마왕이 작게 조소했다.
김주희는 그런 마왕을 향해 한소리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혹시나 흥미를 잃은 마왕이 그냥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자 놈을 내려놔라.]
하지만 마왕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지 김주희에게 유세현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김주희는 조심스럽게 중지를 올리며 마력을 발산했다.
“흥, 웃기는 소리 마셔.”
솨아아아-
트드드득!
그녀의 발끝부터 시작된 냉기가 매섭게 부는 칼날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김주희는 절대 유세현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 이곳에서... 자신이 처참하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야, 덤벼.”
김주희가 그 어느 때처럼 다부지게 말하며 창끝을 까딱였다.
* * *
쉬이익-
펑!
퍼버버버벙!
콰앙-!
“커헉!”
김주희가 각혈을 토해내며 땅을 향해 힘없이 고꾸라졌다.
모든 힘을 전부 사용하여 필사적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혼자선 레오릭과 마왕의 공세를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어찌 보면 예정되어있던 결과였다.
“으으... 선...배.”
김주희가 부들부들 떨며 쓰러져있는 유세현을 향해 힘겹게 손을 뻗었다.
레오릭은 그런 그녀의 손을 짓밟는 것으로 행동을 제지했다.
[끝까지 귀찮게 하는군. 계집.]
굉장히 맘에 안 든다는 말투였다.
레오릭으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주희는 정말 귀찮을 정도로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었으니까.
[이젠 끝이다 계집.]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인지 레오릭이 그라프쉬르를 높게 치켜들었다.
그 사이 마왕은 쓰러져있는 유세현에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봤다.
가만히 뒀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놈을 지금껏 그토록 신경 썼다니...
마왕은 놈 때문에 한 순간 이성을 잃었었던 적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 한심해하며 루베르크를 치켜세웠다.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놈을 베면 이제 이 세계에서 어둠을 다루는 자는 다시 오로지 자신뿐일 터였다.
놈의 신물 파편이 들어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덤.
[잘 가라, 벌레.]
마왕은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유세현을 향해 루베르크를 내려 그었다.
* * *
천마와 마왕이 합세하여 루시뷀트에게 대항한 직후.
천마와 마왕의 영혼이 완전히 자신의 안에서 사라졌음을 느낀 유세현은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딘가 마음 한편이 뻥 뚫린 느낌이 든다.
그들은... 이제와서 말하지만 좋은 스승이자 친구이자 여행의 동반자였다.
“스승님...”
유세현은 물살을 타듯 잠시 동안 내적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마음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마와 마왕이 사라진 건 무척 슬픈 일이었지만 현재는 전투 도중, 이 내적 세계가 아무리 바깥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하더라도 계속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동료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그가 바깥으로 다시 나가려던 찰나였다.
스스스스-
파앗!
지금껏 줄곧 마왕과 천마가 머무르고 있었던 공간에서 강렬한 빛이 발생함과 동시에 수많은 기억이 유세현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건...’
그것은 천마와 마왕이 지금까지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증거, 영혼의 흔적이었다.
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