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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바람계곡의 늦은 오후.
경계 근무를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제르오펜은 눈을 감기 무섭게 난데없이 날아온 통신에 몸을 튕기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르오펜.]
‘이런...!!’
적어도 하루는 지나고 다시 연락할 줄 알았는데.
[제르오펜, 제르오펜... 대답해라 제르오펜...!!]
닦달해오는 아가레스의 목소리가 연거푸 반복해 울린다.
제르오펜은 발끝부터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통신에 답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혼자라 답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예, 아가레스님.]
[제르오펜! 위치는 알아냈나? 당연히 알아냈겠지?]
아가레스가 제르오펜이 역시나 하고 있던 그것을 캐물었다.
제르오펜은 자신의 처지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아가레스의 말에 방금 전보다도 더욱 짜증이 솟구쳤지만 아가레스는 자신의 상관, 그는 입술을 곱씹으며 사죄를 표했다.
[아닙니다. 송구하지만 아직 못 알아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레스님.]
[뭐라?]
[아가레스님. 지금 인간진형은 여전히 대기중인 상태입니다. 단독으로 움직일 수는 없기에 알아내기 위해서는 최소 하루나 이틀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대기중인 상태라니!! 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아가레스의 분노 섞인 외침이 사자후마냥 제르오펜의 뇌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르오펜은 그 강렬한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껴 다급히 답했다.
[아, 아가레스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지금 인간 진형에 있어...]
[이런 멍청한 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그게 무슨...]
당혹스럽게 중얼거리는 제르오펜의 표정에 순간 강한 의문이 맺혔다 사라졌다.
지금 아가레스가 자신에게 난데없이 화낼 이유는 단 한 개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인간들이...]
[그렇다 이놈아! 인간들이 우리 군과 격돌했다!!]
[...!!]
아가레스의 말을 들은 제르오펜의 동공이 파르르 지진을 일으켰다.
설마 설마 하면서 말한 것이었는데.
‘이런...’
제르오펜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설마 내가 마족이라는 게 들킨 건가?’
감시당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아무런 정보도 안 알려 준 것인가?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투란다스 론 아르카드가 죽고 뒤이어 제국의 황제가 된 베르네브 론 아르카드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인류를 통솔하겠다는 허망한 야망을 지니고 있던 그가 그 야망을 포기하고 발설했다면?
‘제길...’
제르오펜의 머릿속에 순간 오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망쳐야 되는가. 아니면...?
그때였다.
베르네브 론 아르카드가 정말 오랜만에 그에게 접근한 것은.
“제르오펜공 잠시 할 말이 있소만.”
“......”
제르오펜은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타이밍에 등장하다니.
[제르오펜. 난 지금 너에게 꽤나 실망했다. 설마 입지를 다져놓지 못할 줄이야. 어떻게든 당장 알아내서 나에게 연락...]
[아가레스님 지금 누가 저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송구하지만 잠시 연락을 끊도록 하겠습니다.]
제르오펜은 우선 거치적거리는 아가레스와의 통신을 과감히 끊었다.
그리고는 베르네브를 향해 평온한 표정을 최대한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이 타이밍에 지금 베르네브가 자신에게 접근한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제르오펜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제르오펜이 승낙하자 사일러스 마법을 주위에 건 베르네브가 입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르오펜공, 슬슬 시작할 생각인가 본데. 언제쯤 시작할 생각이오?”
너무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시작이라니?
제르오펜은 순간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할 뻔 했지만 베르네브가 아직 입을 닫지 않았기에 그저 침묵한 상태로 떠드는 말을 들었다.
“동쪽에서 엄청난 수의 마기병들이 발견 되었다고 내 수하들에게 들었소. 이거 지금 감히 내 제국을 장악하고 있는 무뢰배들을 치기 위한 병력 아니오?”
그리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제르오펜은 깨달을 수 있었다.
베르네브, 이 미련한 멍청이는 아직도 인간 장악이라는 헛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제르오펜이 비로소 입 열어 말했다.
“아니다.”
“...아니라고?”
“그렇다. 저것을 본대로 착각하고 있나 본데 저건 극히 일부인 정찰병에 불과하다.”
“오오오...”
그 말에 베르네브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기병들은 정찰병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 해준 말이었는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겠지.’
저런 부류는 대개 생각을 그리하니까.
“아무튼 베르네브, 지금은 물러나서 기다려라. 때가 오면 알려주겠다. 아마 멀진 않을 것이다.”
“멀지 않다라 하면...”
“늦어도 일주일... 내 약속하지.”
“오오. 역시 위대한 마족... 고대하고 있겠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줘서일까? 베르네브는 추가적으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즐거워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베르네브가 떠나자, 제르오펜은 베르네브가 사라진 쪽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는 지금만큼은 자신도 단순한 베르베브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됐을 터인데.
‘후...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상태를 보아하니 베르네브는 아직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인간들은 여태까지 그래왔듯 자신이 마족인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기병들이 없는 서쪽으로 배치 된 건 아마 우연이겠지.
‘마기병이라...’
대략적인 상황을 아가레스에게 일러주면 마기병들의 위치정보를 토대로 현재 인간진형의 위치 특정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연락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
그러나 제르오펜은 연락을 할지 말지 망설였다.
망설이면 안 되는 것인데... 왜인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아가레스의 여전히 그 거만한 행동, 돌아가게 된다면 또 애꿎은 일을 도맡아 하게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인간과 함께 했다고 해도 자신은 인간이 아닌 마족이었으니까.
‘아...’
문득 제시카의 얼굴이 제르오펜의 눈앞에 일순간 아른거렸다.
제르오펜은 자신도 모르게 제시카가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제시카 또한 함께 서쪽으로 배치되었기에, 개인시간을 사용한다면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오빠?”
제르오펜을 발견한 제시카는 손을 흔들며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그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은 때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웬일이야? 나한테 먼저 찾아오고? 갑자기 내 얼굴이 보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야?? 하긴 내가 워낙 매력 있어야지~”
다가온 제시카가 장난스레 제르오펜의 가슴을 툭툭 쳤다.
제르오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실로 여러 감정이 섞여있는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제르오펜이 말했다.
“응, 너 보고 싶어서 왔다.”
“헤엑?”
그러자 제시카가 지레 기겁을 하며 뒤로 빠르게 샤샤샥 물러났다.
제르오펜이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표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탓이었다.
“오빠, 혹시 오다가 돌에 머리 박았어? 아니다. 그럼 돌이 부서졌을 텐데...”
“야, 임마.”
“아, 혹시 빌어먹을 바람 칼날에 베이기라도 한 거야? 근데 바람 칼날에 저주가 붙어있던가?”
“이게...”
결국 그렇게 제르오펜과 제시카는 티격태격 농담반인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고, 이를 감시하고 있던 리체 케머런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을 전령을 보내 여느 때처럼 이벨린에게 보고했다.
이벨린은 전령의 말을 듣기 무섭게 짧게 혀를 찼다.
‘이런, 베르네브가...’
설마 제르오펜과 접촉할 줄이야.
설마 이런 상태까지 왔는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마기병에 대한 정보는 놈에게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하겠어...’
이벨린은 잠시 곰곰이 고민을 했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수색대가 무사히 복귀하고 나면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네. 지금 처리하는 수밖에.’
이벨린이 은밀하게 주요 인원들을 불러 모으려 한 순간이었다.
“이벨린씨!”
리체 케머런이 간이 막사내로 뛰어 들어왔다.
이벨린은 리체를 보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리체씨! 제르오펜의 감시는 어쩌고...”
“그게... 앗!”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리체 케머런이 다급히 몸을 숨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밖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벨린씨, 긴히 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제르오펜?’
그렇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제르오펜이었다.
* * *
인간진형, 조잡하게 제작된 간이식 막사의 내부.
그곳에서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중압감이 흐르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온 제르오펜이 대뜸 자신의 의태를 풀더니 모든 것을 털어놨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쪽으로 귀화하고 싶다... 이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
“저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벨린씨. 당장에나마 아가레스에게 거짓정보를 흘려 교란시킬 수 있습니다. 제발 저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이젠 웬만해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벨린이 꽤나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제르오펜이 투항하는 것은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그녀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찬가지로 갑작스런 제르오펜의 투항이 이해가 안가는지 숨어있었던 리체 케머런이 튀어나와 곧바로 제르오펜을 향해 검을 겨눴다.
제르오펜은 그녀를 보자 무척 당혹스러운 눈동자가 되었다.
“리체... 케머런씨?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마족의 질문에 답할 생각 따윈 없습니다! 이벨린씨! 뭘 생각하는 겁니까! 놈은 마족입니다! 수작일 게 뻔합니다!”
“......”
리체 케머런의 말에 제르오펜의 눈동자가 더욱 파르르 흔들렸다.
정체를 진즉 발각당한 상태였던 것인가!
“이벨린씨!”
“...잠시만요 리체씨. 제르오펜씨는 지금 목숨을 걸고 스스로 정체를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말 자체는 일단 한번 들어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슨...!! 놈은 마족의 끄나풀... 제국을 엉망으로 만든 자입니다!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리체의 말에 제르오펜이 몸을 움찔거렸다.
저것을 거론한다면 제르오펜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과거의 일입니다. 리체씨. 그리고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 베르네브의 탐욕 때문이고요. 만약 베르네브가 탐욕이 없었더라면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놈은 마족...”
“리체씨 이건 그런 식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우리 쪽에도 이미 아군인 마족이 있지 않습니까.”
“...예? 아......”
루시펠, 아퀼라. 그리고...
“하지만 그분들은...”
“다르다고요? 아닙니다. 유세현씨의 말에 따르면 루시펠씨도 처음엔 적이었었습니다.”
“......”
리체 케머런의 입이 꾹 닫혔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도 머리로는 이벨린의 말이 좀 더 옳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제르오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한 찰나였다.
“하지만... 리체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아무리 자진을 했다지만 들켰다고 생각해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
살짝 굽혀지려던 제르오펜의 허리가 다시 바짝 곧추섰다.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
이들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면 피해는 줄 수 있을지언정 자신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제르오펜이 바싹 긴장해 침을 꿀꺽 삼키자, 이벨린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르오펜씨.”
“예.”
“이유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예?”
“이쪽으로 오고 싶은 이유 말입니다. 아직 말 안하지 않았습니까.”
“아...”
제르오펜의 눈동자가 순간 데구르르 굴러갔다.
본능적으로 어떤 말을 해야 잘 보일지 계산한 것이었지만, 그는 이내 계산을 포기하기로 하고 마음먹었다.
당최, 이렇게 목숨을 걸고 귀화를 시도한 이유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진솔하게...
“전...”
제르오펜은 그렇게 말을 시작했고, 그날 제르오펜은 인간 진형에 편입되었다.
공방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