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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사람들과 함께한 그의 성격은 이전보다도 훨씬 많이 인간에 동화되어 있었다.
이곳 인간진형에서는 힘의 순리로 서열을 매기던 마족진형과 다르게 직책은 가지고 있되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대했으니까.
일방적인 명령조에 극심한 반발감을 가지게 된 것.
[아, 혹시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약간의 시간을 주겠다. 앞으로 두 시간 안에 답하도록 하라.]
‘아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빨리도 말한다.’
제르오펜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의 심정은 현재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가레스에게서 계속 인간진형에 머무르고 있으라는 특명을 받았을 때는 버림 받는 게 아닌지 그리 불안했었는데.
이젠 아가레스에게서 연락이 오는 게 되레 불편하다.
‘아, 젠장. 이걸 반응해야 되나?’
그는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아, 그냥. 차라리 무시를 할...’
제르오펜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것이지?
‘제길... 이놈들과 너무 오래 함께했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고유특성인 의태로 인간인척 하고 있지만 자신의 본질은 결국 마족이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정체를 들키게 되는 날엔 그 즉시 토벌 당하게...
‘되려나...?’
그런 생각이 들자 짜증으로 가득하던 제르오펜의 표정에는 순간 구슬픔이 맺혔다.
‘...후...’
제르오펜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짚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사실 해야 될 일은 진즉 정해져 있었지만 그는 도통 그 행동을 취하기 싫었다.
‘하지만... 난, 결국...’
“제르오펜, 오빠.”
그때였다.
나무 옆, 누군가가 명랑한 목소리로 제르오펜을 불렀다.
“어?”
제르오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응시하자, 그곳에는 한 인간 여성이 서 있었다.
이벨린의 팀으로 옮긴 이후 어쩌다 목숨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친해진, 제시카 뮬이었다.
“아, 제시카구나. 경계 교대하고 온 거야?”
“응! 그런데 왜 그렇게 놀래?”
“응? 노, 놀래다니? 뭔 말이야?”
“흐음~”
순식간에 다가온 제시카가 고개를 들이대며 제르오펜을 빤히 쳐다봤다.
제르오펜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도 모르게 잔뜩 굳은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제시카가 제르오펜의 볼을 잡아당기며 베시시 웃었다.
“하하,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오빠.”
“어, 어? 무슨 소리야? 난 별로 긴장한 게...”
“에휴, 얼굴에 긴장했다고 써져 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예쁜 내가 갑자기 훅 들어와서 긴장한 거 맞지?”
“......”
제시카가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르오펜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확 구겨졌다.
“뭐래는 거야. 너 메주야 임마. 메주. 정신 차려.”
이번에는 제르오펜이 역으로 제시카의 볼을 잡아당겼다.
제시카는 그 손을 쳐내며 삐진 듯 볼을 잔뜩 부풀렸다.
“아~ 뭐래. 그거 알아? 내가 메주면 오빠는 묵사발인거?”
“아, 묵사발은 또 뭔데?”
“으이그, 묵사발도 몰라? 어휴~ 촌스러워 묵사발도 모르다니.”
“야! 나 아르카드 대륙인이야 임마! 지구에만 있는 명칭을 내가 어떻게 아냐! 그리고 따지고 보면 촌스러운 건 너지! 넌, 처음엔 미스릴이 무슨 물질인지도 몰랐다며.”
“아~ 그거 언제 적 이야기야~”
제시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제르오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팍팍 인상을 쓰고 있던 얼굴에 미세한 실소가 맺혔다.
태어나고 지금까지, 힘의 순리를 따라야 했던 제르오펜에게 있어 이렇게 허물없이 관계를 가진 인물은 지금까지 이 인간 여자, 아니 제시카가 처음이었다.
“...야, 제시카.”
“응?”
그리고 그래서 일까?
“정말 뜬금없이 궁금해서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에...”
“엉엉. 뭔데?”
“내가 마족이면 넌 어떻게 할 거냐? 나 죽일 거냐?”
그는 장난으로라도 꺼내선 안 될 말을 꺼내었다.
제시카의 고개는 대번에 갸웃 꺾였다.
“응? 난데없이 그게 뭔 소리야?”
“...말 그대로의 소리야.”
“흐음? 그렇다는 가정하에 라는 거지?”
“응.”
“음... 만약 그렇다면 그동안의 정을 봐서 깔끔하게 목을 쳐줄게!”
제시카가 장난스런 어조로 즉답했다.
“그리고 나온 코인은 내가 특별히 잘 써주도록 할게! 헤헤...!”
“......”
제르오펜이 볼을 긁적였다.
진심이 1도 들어가지 않는 장난스런 소리, 그러나 그녀에게서 그러한 답이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제르오펜은 무척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제르오펜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자, 예리한 눈초리로 그것을 읽은 제시카가 물었다.
“그런데 오빠. 이건 왜 물어본 거야?”
“...응?”
“아니 그냥.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봤나 해서.”
“...그냥 말 그대로 궁금해서...”
“아 정말? 음... 아닌 것 같은데...”
제시카가 재차 얼굴을 들이대며 그를 빤히 들여다봤다.
평소 그녀가 자주하는 행동이었지만, 찔리는 게 있던 제르오펜은 순간 뜨끔하여 몸을 움찔거렸다.
“음... 정말 이상해...”
“......”
제르오펜은 당장이라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 같은 것을 육체를 조작해 간신히 막아냈다.
미묘한 변화를 이렇게 바로 캐치하다니 지금까지 너무 친하게 지냈던 것일까?
제시카가 말을 이었다.
“오빠, 혹시 다짜고짜 목을 따버리겠다고 한 거 때문에 섭섭해져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야 임마. 날 뭐로 보고 네가 한 말 따위에...”
“에이 아니긴, 표정 보니 그런 거 같은데. 조금 진지하게 답해줘?”
“아니, 진짜 괜찮...”
“난, 이제 마족이던 뭐건 종족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행동이 중요하지.”
“응?”
“오빠는 나를 구해줬었잖아. 내가 그런 오빠의 목을 솔직히 어떻게 칠 수 있겠어.”
제시카가 제르오펜의 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오빠가 나와 같은 팀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아쉬워.”
“......”
“아, 벌써 집합시간이네. 오빠, 나 이만 가볼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제시카가 순식간에 도약하여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제르오펜은 그 상태 그대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행동이... 중요하다라.
‘......’
제르오펜은 망설이다가 아가레스를 향해 통신을 보냈다.
* * *
제르오펜이 제시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멀찍이 숨어 그 둘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 다행이네요. 제시카양이 더 이상 그를 압박하지 않고 물러나서.”
“그러게나 말이구나.”
바로 이벨린과 아린이었다.
“스승님, 놈은 어째서 그런 말을 제시카양에게 꺼낸 걸까요?”
“흠...”
이벨린의 말에 아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아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아마...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다고 봐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저런 말을 굳이 꺼낼 이유가 없으니.”
“놈이 제시카양에게만은 마음을 열었다 이 말인가요?”
“그녀는 그 일 이후 제르오펜과 친해져 오빠 동생처럼 지냈지 않았느냐. 믿을 수는 없지만 지금 상황만 보면 제르오펜은 제시카에게 마음을 연 게 분명하다.”
“아쉽네요. 제시카양이 놈의 정체를 모르는 게.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정보를 은근슬쩍 캐내보라고 해볼까요?”
“아니, 제시카양이 놈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야. 만약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테지. 만약 지금 우리가 놈의 정체를 말해준다면 제시카양이 어떻게 반응할지 장담할 수 없다.”
“...음, 그럼 계속 이렇게 감시를 이어가는 수밖에 없...”
“쉿.”
아린이 갑작스레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제르오펜에게서 지금까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특수한 파장이 갑자기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설마?!’
아린은 곧장 마법을 전개했다.
지이잉-
그것은 9서클에 도달한 그가 이전 제르오펜이 발산했던 파장을 분석해, 이때만을 위해 제작한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곧 그의 머릿속으로 문자가 나열되며 정보가 취합되기 시작했다.
[아가레스님. 드디어 기회가 생겨 연락드립니다.]
아린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맺혔다.
“성공하셨나요? 스승님?”
아린은 제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들어 보거라.”
아린이 마력의 실 하나를 이벨린을 향해 넘겼다.
이벨린이 그 마력의 실을 잡자, 정보는 그녀에게도 넘어오기 시작했다.
둘은 그대로 대화 엿듣기에 치중했다.
[그래, 제르오펜. 지금 인간세력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느냐.]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주변 정찰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흐음, 그래?]
[예, 알아내는 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가레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제르오펜이 물었다.
정말 좋은 질문이었기에 아린과 이벨린은 눈동자를 번뜩 빛냈다.
[후후후, 나 말이냐?]
[예.]
[난 지금 칼바람이 난무하는 계곡에 있다.]
[예?]
제르오펜의 고개가 갸웃 꺾였다.
그가 말하는 환경이 이곳과 아주 유사한 탓이었다.
[크크크, 뭘 놀래는 것이냐.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가 갑자기 됐다면 당연한 거 아니더냐. 제르오펜, 너도 이곳에 있는 거겠지?]
‘...!!’
서로를 응시하고 있던 아린과 이벨린의 눈동자가 동시에 화들짝 커졌다.
벨제뷔트의 군세가 같은 구역에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타, 탑을 내려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다시 올라오신 겁니까?]
하지만 그 정보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가레스가 웃었다.
[크크크크, 궁금하더냐.]
[...예! 저는 사실 다시 올라오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예? 그게 무슨...]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아가레스가 대뜸 웃기 시작했다.
그가 지그시 말했다.
[흡수 됐단 말이다. 벨제뷔트의 군세가! 누구에게 흡수 되었겠느냐!!]
쿵-
아린과 이벨린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서, 설마...”
[자! 빨리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어 말해라! 내가 친히 마중 나가주도록 하겠다!]
팟-
통신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이벨린이 지그시 읊조렸다.
“대비를... 해야겠군요.”
“그래야겠구나.”
“제르오펜은 이제 처리하도록 하죠. 스승님.”
이벨린의 말에 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 살려둔 것이었지만, 벨제뷔트의 군세가 마왕군에 먹혔다면 이제 이야기는 달랐다.
살려두게 되면 이용은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쪽의 정보만 무의미하게 빠져나가게 되겠지.
그리고 결국 안 좋은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벨린은 곧장 이태광과 남궁시영 등 강자들을 소집한 뒤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남궁시영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게 됐군요. 그럼 바로 처리하도록 하죠. 아마 이 정도 전력이면 순식간에 처리가 가능할 거예요.”
“그럼 바로...”
“아 그런데 그보다도 강호씨와 주희씨, 세현씨가 정찰을 나갔다고 들었는데... 인원을 보내 이 사실에 대해 알려야 되지 않을까요. 행여나 마주치기라도 하면...”
“흠, 저도 그렇고 싶습니다만 어디로 가는지 방향조차도 알려주지 않고 나가서...”
마왕 vs 마왕(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