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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순간 정적이 일었다.
만약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진짜 그래야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허무하게 소멸될 수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이쪽의 입장이 많이 불리하다.’
수적 열세와 부상, 거기에 시도 때도 없이 폭주하는 마력까지.
놈들이 언제 뒤통수를 쳐올지 모르기에, 초긴장 상태로 변심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대비해야 되는데 그것만으로도 기력과 체력이 무지막지하게 소비할 게 너무도 뻔했다.
‘그러니 이제는 단서는 둘째 치고 어떻게든 생존자를 찾아내야만 한다.’
판도라에 그나마 장점이 존재한다면 괴랄하지만 평등하다는 점이었다.
웬만하면 예외 없이 양측 모두에게 룰이 똑같이 적용된다.
‘무저갱에서 빛이 올라왔을 때 분명 거기에는 많은 인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황으로 볼 때 이곳에 떨어진 인원은 극소수...’
즉, 무저갱은 생명체를 가려 삼켰다는 의미가 되고, 그렇기에 양측 동등한 비율로 삼켰을 확률이 높았다.
이쪽이 4명인 것에 반해 드래곤의 수가 총 8명이었으니, 최소 4명의 사람이 더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것이다.
‘제발, 흔적만이라도...’
욱신-
다음 순간 붕대를 칭칭 감아 고정시킨 오른쪽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큭...’
상당한 고통을 동반하는, 퀘루안의 브레스가 남긴 부작용이었다.
‘쯧.’
하지만 유세현은 살짝 혀를 차는 것을 끝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세 명의 동료들에게 더 이상 마음의 부담을 가중시킬 순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세현은 제발 생존자의 흔적이 나타나길 소망하며 눈앞에 있는 덩굴을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 * *
“오늘부로 10일 째로군요...”
제3조의 조장 제롬의 말에 사라진 유세현을 대신해 팀을 이끌고 있던 루시펠의 시선이 저편 하늘로 향했다.
유세현을 포함하여 일부 인원들이 실종 된지 10일째.
현재 특수한 공간을 형성한 무저갱의 주위는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빛의 막에 감싸여져 그 어떤 것의 접근도 불허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영락없이 튕겨져 나갔으며 마법이나 무공, 고유특성도 통하지 않았다.
레드드래곤들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상황은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
“팀장님... 무사하셔야 될 텐데...”
비록 유세현이 폭주하여 그 난리를 피긴 했으나, 그간 보여준 게 있었기에 아직도 많은 이들은 유세현에게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제롬이 한없이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자 루시펠이 조심스레 입 열어 그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괜찮을 테니.”
“하지만 그 당시 제가 보기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 뭔가 제어를 못하는 걸 넘어서서 스스로의 힘에 먹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극복 할 겁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저 내부에는 그녀도 함께 있잖아요?”
“...아...”
“그녀와 함께라면 분명 괜찮을 거예요.”
루시펠이 그리 말하며 옅게 미소 짓자, 제롬도 마지못해 인상을 바꾸며 쓴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하긴...”
“그럼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도록 하죠. 그래서 적들의 동향은? 뭐 바뀐 바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레드가 여전히 경계 근처 주위를 계속 서성이고 있는 데에 반면, 실버와 골드는 3일전 서쪽 방면에서 한 번 발견 된 것을 끝으로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흠, 완전 잠적이라... 조금 찜찜하군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부팀장님, 무리해서라도 실버, 골드에 대한 수색 범위를 늘리는 게 어떨까요?”
제롬이 다분히 의견을 내놨다.
루시펠은 이에 몇 분 동안이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수색 범위 확장이라... 본래라면 안 하는 게 맞다.’
그들의 인원은 현재 한정되어 있었기에, 다른 쪽에서 인원을 끌어와 수색범위를 늘리게 되면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는 경계에 커다란 틈이 생기게 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적들의 침투를 보다 쉽게 허용할 것이며, 만약의 일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대처가 늦어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퇴로를 맞고 있는 후미와의 교신이 끊겨 고립될 수도 있으리라.
상당한 리스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펠이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 그것은 빛의 장막 내부에 있을 유세현과 다른 이들 때문이었다.
만약에 실버와 골드가 무슨 수작을 벌여와 현 부대가 이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면, 추후 장막에서 빠져나온 유세현와 인원들은 적진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는 신세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사태는 절대 발생해선 안 돼.’
루시펠은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제롬씨 지금 바로 위치로 돌아가지 마시고 잠시 대기해주세요. 곧장 다른 조의 조장님들을 소집하겠습니다.”
“부팀장님... 그 말씀은...”
“제롬씨의 의견대로 수색범위를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대폭으로.”
* * *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사 전달이 끝난 뒤, 썩은 나무를 엮어 만든 허름한 간이식 막사에서 나온 루시펠은 다시금 빛의 장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들은 무사할까.
“후우...”
제롬을 달래기 위해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한 루시펠이었지만 사실 불안한건 그녀도 매한가지였다.
지금까지 줄곧 유세현의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던 흉흉하면서도 광폭한 마력은 제롬의 말마처럼 이젠 되레 독이 되어 그를 좀먹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루시펠은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굉장히 인상적인, 그녀를 떠올리며 소망했다.
‘그가 정말로 잘 극복해내기를... 그녀가 부디 그를 잘 보살펴 주기를...’
* * *
잠에서 깬 김다혜는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있던 고무줄을 사용해 질끈 묶어 올렸다.
“후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본래 좋지 않은 상황에선 평소보다도 더욱 긍정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 중에 기본이건만... 김다혜의 한숨은 현 상황이 최악 중에 최악임을 말해주고 있는 증거였다.
‘후... 안돼. 이러면 안돼!’
“흡!”
짝!
김다혜는 자신의 뺨을 강하게 쳐 애써 안 좋은 생각을 떨쳐낸 뒤 보법을 운용하여 나무에서 내려왔다.
타닥-
사뿐히 착지한 땅 아래에서는 유세현이 육포를 나눠주고 있었다.
“받으세요.”
“고마워요. 세현씨.”
“김다혜씨도.”
“어어... 고마워, 잘 먹을게.”
유세현이 나눠준 육포의 양은 고작해야 손가락 다섯 마디 정도로 무척이나 적었지만, 모두는 그것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먹었다.
꼬르륵-
씹을 때마다 사람들의 배꼽에서는 마치 항의하듯 꼬르륵 소리가 끝없이 올라왔다.
F랭크 10%로 스텟이 격하 된 지금, 그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영양 섭취를 할 필요성이 있었으나, 이곳에는 에너지가 거의 되지 않는 풀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먹을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동물도 과일도 그 흔하디흔한 독버섯, 벌레조차도 없었다.
물이야 마법으로 제조가 가능했기에 괜찮았지만, 덕택에 식량은 15일이 경과한 현재 유세현이 소지하고 있는 육포를 제외하곤 진즉 동이 난 상태.
유세현이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보다 식량을 많이 소지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풀떼기를 우걱우걱 뜯어먹고 있었을 터였다.
아니 이미 육포와 섞어 먹고 있긴 하다.
‘후우, 이 숲...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드래곤, 생존자, 단서 이 세 가지 일만으로도 충분히 골이 아프다 못해 터질 지경인데, 거기에 식량문제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는 유세현도 식량문제만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최악의 경우 몬스터의 시체를 먹으면 됐었다.
유세현은 슬쩍 포켓에 눈을 흘겨 남은 식량을 확인했다.
잘해봐야 4일을 못 버티는 식량이었다.
‘어떡한다...’
어떻게든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가 더 흘렀을 때였다.
[크랴랴랴랴랴랴랴!]
산등성이의 저편, 마치 사자후 마냥 거칠게 울려 퍼진 포효소리가 풀숲을 헤쳐나가고 있던 일행의 귓등을 때렸다.
“어... 어?”
그것은 일행에게 있어선 너무도 난데없고 생뚱맞은 괴음이었다.
“어, 어... 이거...”
“드래곤 소리 맞죠?”
어리둥절한지 눈을 빠르게 반복해 깜빡이는 강희수와 유승혜.
반면 김다혜는 포효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한 모양이었다.
“놈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 같네요.”
“예?”
“놈들도 한계라는 거겠죠.”
김다혜가 배꼽을 손으로 툭툭 치자, 강희수와 유승혜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아...!! 식량!”
“그러고 보니 걔네들은 우리보다도 더 쫄쫄 굶었겠네요! 놈들이 준비성이 좋은 세현씨보다 식량을 더 잘 챙겨놨을 리는 없을 테니.”
“어떡하죠? 놈들의 부름에 응하실 건가요?”
강희수가 곧바로 유세현을 향해 물어왔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찌 답할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총 경과일 20일.
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얻은 수확, 제로.
확실히 이제 그들에게 남은 방법은 좋건 싫건 협력밖에 없었다.
‘생존자를 찾기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남은 기한은 80일.
유세현은 차분히 포효가 울린 산등성이를 응시했다.
* * *
“크아아아아! 젠장할!! 빌어먹을!! 배고파아아아!!”
숲속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참다 참다 폭발한 퀘루안이 내뱉는 괴성이었다.
“야야, 퀘루안 좀 진정...”
“으아아아! 이 빌어먹을 버러지 같은 공간 같으니이이이! 아무것도 없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말이이이!”
“야야, 퀘루안. 좀 진정하라니까?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 힘만 더 빠진다?”
“으아아아아아아!”
라플라스가 그를 진정시켜보려 노력 했으나, 라플라스가 그러면 그럴수록 퀘루안의 언성은 되레 높아졌다.
그 또한 유세현처럼 식량난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야야, 여기 나무뿌리 좀 씹어봐. 이건 그나마 조금 괜찮...”
“크아아아! 그놈의 나무뿌리하고 풀떼기! 지긋지긋해!”
퀘루안이 방방 날뛰었다.
이에 라플라스가 그의 수하들에게 눈치를 보냈으나, 그들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퀘루안님은 이런 걸로 폭발하면 원래 못 말리는 거 알지 않으십니까.”
“놔두면 괜찮아질 겁니다.”
“에휴... 그래...”
라플라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작 배고픔에 폭발하는 다혈질이 눈치는 왜 그리 빠른 건지...
오랜 시간 동안 퀘루안과 알고 지낸 라플라스였지만 그로서는 아직도 퀘루안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야 퀘루안. 너 성질내는 건 좋은데 조만간 놈들이...”
바로 그때였다.
“여간 배고픈 게 아닌 모양이군.”
저편, 나무 위에서 유세현과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어, 왔나? 팔은 좀 괜찮고?”
유세현을 발견한 퀘루안은 자신의 팔을 덜렁덜렁 장난스레 흔들며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도발해왔다.
자존심이 높은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욱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세현은 그저 할 일을 할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우리를 찾은 이유를 말해라. 드래곤.”
“...재미없는 놈이군. 원래 이런 거엔 반응을 좀 해줘야 재미있는 법인데 말이지?”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우리를 찾은 거라면 우리는 다시 가도록 하지.”
유세현이 망설이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퀘루안이 대뜸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크크크크크!”
웃음은 점차 커져갔다.“크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이내 폭소하는 퀘루안.
그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하하!! 어딜 가겠다는 거냐 인간! 너희도 마땅히 방법을 찾질 못해 이곳에 온 것 아니더냐!”
“......”
“뭐, 장난은 이쯤 하도록 하고. 단도직입적인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니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겠다. 우리와 손을 잡자 인간. 라플라스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 100일 이내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소멸한다지?”
그 말에 유세현의 눈매가 일순간 날카로이 날이 섰다.
‘정수의 결정을 지니고 있어야 나타나는 정보를 알려주다니... 설마 갈등을 해소한 건가? 아니면 단지 급해서?’
유세현이 바라던 것은 라플라스와 퀘루안의 갈등, 즉 드래곤 간의 갈등이었다.
전자라면 그로선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
“할 거냐 말 거냐! 뭐 어차피 이미 답은 나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는 동안 퀘루안이 재차 재촉해 물어왔다.
유세현은 잠시 하던 생각을 접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좋다. 손을 잡도록 하지.”
태초의 정원(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