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8/606 --------------
스슷-
스스슷-
풀숲을 거칠게 헤치며 나아가던 유세현의 신형이 일순간 휘청 흔들렸다.
“윽...”
불탄 오른팔이 지끈거린다.
지금이라도 당장 끊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세현아!”
“세현씨! 괜찮으세요?”
“...적...들은?”
“따라오고 있진 않아요!”
“놈들도 휴식이 필요한 게 분명해요!”
드래곤이 뒤쫓아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희소식이었지만, 유세현의 귀엔 이 말이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시야가 일그러져 흐릿하기 그지없다.
그의 팔을 잡아먹은 브레스는 단순히 오른팔에 타격을 입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깨를 타고 퍼져나가며 전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열기를 덜어줘야 될 어둠의 마력이 되레 약해진 그를 잡아먹으려는 듯 미쳐 날뛰었다.
점점... 의식이 희미해진다.
‘안돼... 여기서 절대 정신을 잃을 수는 없다. 절대 잃을 수는...’
털썩-
“?!”
“세현씨!”
“세현아!!”
결국 유세현은 버티지 못하고 지면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 * *
뜨겁다.
지금까지 당해봤던 그 어떤 화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강호의 불길에 당한 자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큭...”
유세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움직여 간신히 눈을 떴다.
“후우... 후우...”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꽤나 익숙한, 먼 과거엔 자신이 자주 바라봤었던 얼굴.
김다혜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힐링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김다혜씨.”
“...?!”
유세현이 힘겹게 입을 열어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자 오른팔에 잔뜩 집중하고 있던 김다혜의 어깨 일순간 들썩였다.
정신을 차린 유세현을 확인하기 무섭게 파르르 떠는 김다혜의 입가.
“세, 세현아...”
“......”
“다행이야...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유세현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김다혜는 이내 흐느끼듯 울기 시작했다.
“난... 난... 너가 너무 정신을 못 차리길래 어떻게 되는 줄만 알았어.”
“......”
그 모습에 유세현은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그것 밖엔 현재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과거와 똑같은 반면, 유세현은 변했으니까.
물론 잠깐 연기하는 것이라 치고 태도를 바꿔 과거처럼 대한다면 그녀가 진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행동은 상대방의 마음을 기만하는 행위.
유세현이 그런 걸 할 리가 없었다.
“아... 미, 미안... 나도 모르게...”
다행히도 김다혜는 금방 감정을 추슬렀다. 아니, 추스른 척을 했다.
유세현이 자신에게 부담을 느끼면 안 되기에.
황급히 눈물을 닦고 치유마법을 재개한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
이에 유세현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입을 열었다.
“김다혜씨...”
“으...응?”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는...”
“아, 여기? 동굴이야. 운이 좋아서 발견할 수 있었어.”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음... 대충...”
기절한 후 깨어나기까지 경과된 시간은 총 5시간으로 세 명이 교대해가며 계속해서 자신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유세현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 보려고 하다 갑자기 증대된 심장의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고 제자리에서 뒹굴었다.
“큭!”
“세, 세현아!”
유세현이 고통스러워하자 김다혜가 황급히 심장 쪽에 치유의 빛을 날렸지만 당최 이 문제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기에 힐은 그에게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통증은 무려 5분 동안 그를 미친 듯이 괴롭히다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김다혜가 경계 교대를 위해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세현아. 오늘 만큼은 그냥 아무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
“그럼 이따 또 올게.”
김다혜는 그 말을 끝으로 비 내리는 바깥을 향해 나아갔다.
유세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고개를 돌려 잠시 응시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퀘루안의 진형.
퀘루안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기 무섭게 라플라스를 불러 세웠다.
라플라스는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아, 경계하랴 흔적 찾으랴 힘들어 죽겠구만. 뭔데 퀘루안? 왜 부른 거야?”
“왜 불렀겠어?”
허나 그런 행동이 퀘루안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자 말해봐.”
팔짱을 낀 퀘루안이 어디 한 번 변명 해보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라플라스는 마음속으로 이 사단을 낸 유세현을 향해 쌍욕을 박았다.
‘젠장!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퀘루안이 이렇게 나오면 대충 얼버무리는 건 불가능한데...’
여기서 대충 얼버무렸다간 퀘루안의 성격상 더 큰 의심을 사게 될 터.
라플라스는 어떻게든 그럴 듯한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 안간힘을 썼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이었다.
퀘루안을 속일 정도의 시나리오를 구상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야, 라플라스. 말해보라니까? 너 이러면 더 이상해 보이는 거 알...”
“그 놈이 한 말 사실 맞아.”
그렇기에 라플라스는 이렇게 된 거 되레 한번 꼬아 깔끔하게 인정하는 쪽으로 가기로 했다.
“뭐?”
“놈이 한 말 사실 맞다고.”
“......”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탄하던 퀘루안 눈매가 단번에 매섭게 변화했다.
그러자 라플라스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야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비밀임무 수행한 거였으니까.”
“나도 모르는 비밀임무를??”
“어, 임마. 내가 너보다 세레나님이랑 더 친하잖냐.”
“...세레나님께서 지시했다는 거냐?”
“어.”
“놈이 말한 마교인이란 건 뭐지? 6층에서 대체 뭘 한 거냐.”
“말 못해 임마.”
“너...”
“아, 말하면 혼난다고 짜샤! 니가 이 임무 마친 뒤에 직접 세레나님한테 들어!!”
“......”
퀘루안의 붉은 눈동자가 라플라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에 라플라스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마찬가지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팍팍 티냈다.
“아, 망했네. 세레나님한테 드럽게 혼나겠네.”
퀘루안은 그런 라플라스의 행동에 이내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까발려진 거 더 혼나는 게 싫어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는다는 게 좀 어이없긴 했지만, 라플라스는 지금까지 쭉 그래왔음으로 더 뭐라 하기가 그랬다.
“후우... 그래, 그럼 일단 이 건에 대해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퀘루안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야, 라플라스.”
“......”
“아 쫌! 삐져서 그러고 있지 말고!”
“...뭔데.”
“넌 쫓는 게 나을 것 같냐. 아니면 수색 하는 게 나을 것 같냐?”
“음...”
솨아아아-
금방 그칠 것 같던 빗줄기는 장대비가 되어 아직까지도 쏟아지고 있었다.
덕택에 흔적은 빠르게 지워지고 있는 상황.
물론 추적하려고 제대로 마음먹는다면 할 수는 있을 터지만...
“어차피 놈들도 별거 모르는 눈치던데?”
“그래 보이지?”
“응, 내 생각엔 우선은 단서를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흠...”
퀘루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 시간이 길진 않았다.
언제 소멸할지 모르는 불안한 공간.
놈들을 잡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건 이곳에 대한 탈출 방법을 찾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생각을 마친 퀘루안이 명령을 하달했다.
“이곳에서 2시간 휴식 후, 움직이도록 하겠다.”
* * *
유세현이 재차 깨어났을 때 그의 곁에 있는 인물은 강희수였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후우... 제가 또 몇 시간이나 잠들...”
“네 시간이요.”
질문을 다 내뱉지도 않았건만 찰떡 같이 알아들은 강희수의 대답은 빛처럼 빨랐다.
“그런데 세현씨.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열은 다행히 내렸긴 한데, 오른팔은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차도가 없는 것 같아보여서...”
“으음...”
그 말에 유세현은 빠르게 몸 상태를 체크했다.
그들이 열심히 간호해준 덕택에 타오를 것 같던 육체의 온도는 정상 수치로 돌아온 상태인 반면, 눌러 붙은 오른팔은 아예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 팔은... 못 쓴다.
“안타깝게도 오른팔은 앞으로의 전투에선 사용하지 못 할 것 같군요.”
“......죄송해요. 우리가 잡히지만 않았다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
“그보다도 혹시 뭔가 발견한 게 있습니까?”
경계를 하기 위해서는 주위 수색이 필수사항이다.
그런 과정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가능성을 염두 한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돌아온 것은 절레절레 젓는 고개뿐이었다.
“아뇨. 특별한건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렇습니까...”
유세현의 입에서 아쉬움의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에 강희수는 쓴 웃음을 내비쳤다.
“세현씨도 사람이네요.”
“...?”
“아... 이상한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에요. 제가 본 세현씨는 언제나 대단했거든요. 마도철을 잡은 것부터 시작해서 마왕성 공략에... 더 나아가 항상 특별한 지역을 소수의 인원으로 탐험하여 정보를 가지고 오시고... 거기에 함께 뭘 할 때는 항상 최전방에 서셨잖아요. 그래서인지 뭔가 사람 같지 않다고 할까?”
“......”
“뭐, 대충 그런 뜻이에요. 아, 교대시간 됐다. 조장님 불러올게요. 쉬고 계세요.”
시간을 확인한 강희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그녀가 동굴 밖으로 자리를 뜬지 얼마 되지 않아, 온 몸이 비에 홀딱 젖은 김다혜가 내부로 걸어 들어왔다.
김다혜는 곧바로 유세현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또 바로 힐링 스킬 써줄게.”
“아뇨, 괜찮습니다. 대부분은 회복이 됐고 팔은... 이건 여기선 백날을 해도 고칠 수 없습니다.”
“......”
“각자 쉬도록 하죠. 김다혜씨도 눈 좀 붙이시기 바랍니다..”
김다혜의 눈은 많이 퀭했다.
전투로 체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경계와 유세현의 치료를 함께 병행한 영향이었다.
“...알았어.”
물기를 대충 닦아낸 김다혜가 몸을 푹 수그렸다.
“......”
그 후 동굴에는 둘의 작은 숨소리만 잔잔하게 울렸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김다혜가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현아. 자?”
“......”
“자는구나.”
유세현이 답하지 않자, 김다혜가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김다혜는 한동안 유세현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김다혜의 입술이 달짝인다. 그녀가 고백하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있으니 예전 생각이나. 그때 누워있던 쪽은 반대로 나였지만...”
과거, 유세현과 김다혜가 연인이었던 시절.
김다혜는 감기몸살을 정말 심하게 걸려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약을 먹어도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몸은 부서질 듯 아팠다.
지금 보면 그건 백혈병의 전조증상이었다.
유세현은 그런 김다혜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무척이나 아팠지만 지금으로선 기쁜 기억... 추억.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그런 상상을 지금까지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곁에, 그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
심장이 욱신거린다.
그녀는 울컥 다시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아냈다.
“그래도... 역시 멀리서 보는 것보단 가까이서 보는 게 좋네.”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 * *
이 공간에 떨어진지 일주일째.
이쯤 되면 다른 생존자를 발견 할 법도 하건만, 우습게도 여타 생존자들의 행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무지 발견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요. 100명 전부가 아니라 절반의 인원이 이곳에 떨어졌다 쳐도 지금쯤이면 누구를 만나도 진즉 만났어야 되는데...”
“그뿐만이 아니야 승혜야. 사람도 사람이지만... 드래곤의 흔적조차도 보이질 않아.”
“설마 우리와 그때 그놈들만 이곳에 떨어진 걸까요?”
난감한 상황이었다.
스탯이 이런 상황에서 단서를 찾으려면 인원이라도 많이 있어야 하건만...
강희수가 한껏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거 이러다가 망할 드래곤 놈들과 협력해야 되는 상황이 오는 거 아니에요?”
태초의 정원(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