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8/606 --------------
엘프, 마족, 델바람을 포함해 생전 처음 보는 붉은 피부의 종족까지.
제루웬 베루의 보고와 곳곳에서 들어오는 전언으로 엘라뉘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한 아르펜은 차분히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렇게 많은 상위 종족이 한 지역에 모이게 되는 일은 굉장히 희귀한 경우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최초.
지금까지 그들은 암묵적으로 서로 겹치지 않게 동선을 짜왔었다.
마족이 제 1유적에 들어가면 드래곤은 그곳을 피해 다른 유적을 노렸고, 천족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슷한 힘을 지닌 자들끼리 맞붙게 되면 아무리 잘 싸운다 한들 피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싸우지 않는 쪽이 보다 병력을 온존하여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완전히 끝이란 건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족이나 인간진형 정도는 사냥을 잠시 멈춘다면 당장이라도 칠 수 있습니다만... 병력을 모을까요?”
아르펜의 부관 제렉스가 물었다.
아르펜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놔둬.”
“예... 그럼 당장 집결... 예? 놔두신다고요?”
“그래.”
“어째서... 마족은 몰라도 인간들 정도는 병력을 모으면 가뿐히...”
제렉스의 눈가에 의문이 서렸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저 나약하기만한 약소 종족이었다.
마족은 그렇다 쳐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종족을 놔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 혹시 엘프나 델바람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제렉스.”
“예?”
“이젠 인간들을 더는 우습게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어찌 됐든 여기까지 올라온 자들이니.”
드래곤이 인간에게 당할 수도 있다.
아르펜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결국 이것이었기에, 비로소 의중을 이해한 제렉스의 입가에서는 헛바람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르펜님, 아르펜님 답지 않으신데요? 상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물론, 이 탑을 오르며 스탯이야 많이 증가했겠지만 인간이에요! 인간! 고작 해봐야 6서클이 한계인... 그런 자들이 어떻게 감히 우리와 비벼볼...”
“엘라뉘스가 놈들 중 일부는 우리의 마법, 아니 마법보다도 더 뛰어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어.”
“우리의... 마법보다 말입니까?”
“그래. 뭐, 우리처럼 범용성이 뛰어난 건 아닌 것 같다고 하긴 했지만.”
“흐음, 좀처럼 믿기지 않습니다만... 엘라뉘스님이 또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니고...”
“아무튼 동향만 계속 살펴봐.”
“후... 그럼 그러도록 합죠.”
“아, 그리고 나 잠시 7층에 갔다 올 테니 부대는 네가 총괄하고 있어.”
“예에? 7층이요?”
아르펜의 갑작스런 말에, 제렉스는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 됐다.
그가 이윽고 버럭 소리쳤다.
“아니 아르펜님! 너무한 거 아니십니까? 짬시킬 게 따로 있지! 이런 상황에서...”
그러나 그 순간 아르펜의 표정이 싹 변화했다.
“중요한 거야.”
매우 진지하게.
“중요... 한 거요?”
아르펜이 평소 희희낙락거리는 드래곤이라지만, 그 또한 블루드래곤의 로드로서 진지할 땐 한없이 진지한 인물이라는 걸 제렉스는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제렉스는 그를 로드라고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중요한 거...”
“뭔데요?”
“흐음... 아직까지는 추측에 불과해. 그러니 갔다 와서 말해줄게.”
그렇게 말하는 현재 아르펜의 뇌리엔 어느 누군가가 비치고 있었다.
아주 먼 과거, 아니 수만 년을 살아온 드래곤에겐 찰나의 시간에 불과한 과거.
스탯을 제약당하는 디메리트를 감수하면서까지 판도라 내부로 떠났던 드래곤.
‘세레나 레퀴아르크.’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심복이었던 셀론 브라트크리트.
아르펜은 레드드래곤 진형에 놀러갔다가 막 판도라 내부로 떠나려던 셀론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오~ 셀론, 어디 가냐?]
[아, 아르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아, 그냥. 심심해서. 근데 넌 어디 가냐? 그 장치, 내부로 넘어갈 때 사용하는 장치 아니냐?]
셀론은 당시 숨기려 했으나, 아르펜은 장난기만큼이나 질긴 인물이었다.
[아, 어차피 숨겨봤자 의미 없는 거 알잖아? 걸린 이상 조사해보면 다 나와~]
[...잠시 인간진형을 살피러 갑니다.]
[인간진형을? 걔네를 왜?]
[후...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넘어오면 거기서 설명해준다고 하셔서...]
[오면? 누가 이미 넘어가 있는데?]
[세레나님이요.]
[오, 세레나가?]
[예.]
[아, 그래서 구만. 걔 말이면 네 입장에 거절도 못 할 테고... 안 귀찮냐?]
[...일러바치지 않으실 품성인 걸 아니 아르펜님께만 솔직히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사실 귀찮아 죽겠습니다. 뭣 하러 제가 거기까지 가야되는지... 어휴...]
셀론은 푸념했고, 그 당시 아르펜은 그냥 수고하라며 웃고 넘겼다.
세레나는 훌륭한 인품과 별개로 가끔 특이한 행동을 보이는 인물로 드래곤 내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녀라면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그 이후 셀론을 보지 못했지.’
세레나에게 물어보면 인간의 강함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 아니 적어도 근접할 수 있지는 않을까.
현재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 간다. 제렉스.”
“조심히 다녀오십쇼.”
“어야~”
인사를 건넨 아르펜이 채 다섯 보를 걷지 않았을 때였다.
대뜸 발걸음을 멈춘 그가 뒤를 휙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 맞아. 제렉스. 의심받지 않게 카스디아의 행방 좀 감시해봐.”
“예? 카스디아요?”
“응~ 이유는 묻지 말고~ 그럼 진짜 간다.”
슈슉-
아르펜이 자취를 감추자, 제렉스가 쩝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휴, 대체 뭔 생각을 하시는 건지.”
그는 그러면서도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일부 블루드래곤을 소집했다.
* * *
“음... 일단 던전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시간에 걸쳐 루시아가 발견한 동굴의 탐색이 이루어졌다.
“만약 던전이었다면 인형에 연결되어있던 저의 마력의 실이 끊어졌을 거예요.”
인형술사, 크리슈나의 말이었다.
이벨린이 입을 열었다.
“흠... 그럼 일단 들어간다 해서 당장 갇힐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차단 함정이 있을 수 있으니 100% 라고 장담할 수는 없네만...”
“일단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확인해볼게요.”
크리슈나가 손가락을 움직여 실을 조종하자, 인형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 때였다.
“윽!”
실이 늘어지며 크리슈나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뭔가 외부의 힘에 의해 잘려나갔다는 의미였다.
“흠... 이로서 안에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해졌군.”
“루시아씨... 아직도 들려요?”
이벨린의 물음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괴로움에 찬 목소리는 여전히 그녀의 귓등을 때리고 있었다.
어차피 특수한 장소를 발견하면 들어 가냐, 들어가지 않느냐 결국 둘 중 하나였기에 이벨린이 결정을 내렸다.
“우선은 소수정예로 팀을 꾸려 살펴보죠. 그리고 괜찮다 싶으면 병력을 조금씩 이동시키도록 하죠.”
동굴의 폭은 약 10m 정도로 한 번에 많은 사람이 이동하기에는 상당히 좁았다.
그들은 루시아를 포함해 총 세 팀에서 10명을 선발했다.
이태광 팀의 이태광과 리체 케머런, 유혜인, 이한별, 이용석.
이벨린 팀의 아린, 크리슈나.
남궁세가 쪽에서는 남궁제와 남궁시영이 참여했다.
이벨린은 전체를 통괄하기 해야 하기에, 루시펠은 루시아를 제외한 인간진형 최강의 무력 소유자였기에 팀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 된 탐색.
스스스-
진입하여 조금 나아가자 벽에서 뿜어져 나온 스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일행을 감쌌다.
제일먼저 이상이 발생한 것은 크리슈나였다.
“꺄악!!”
인형을 필두로 하여 선발로 나아가던 그녀가 기운에 닿기 무섭게 머리를 붙잡고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것!
이에 남궁제를 포함하여 모두가 토끼눈이 되었다.
탑의 기운에 의해 저항력이 아무리 전체적으로 낮아졌다지만 상위 대리자가 이런 식으로 단번에 쓰러지는 건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궁제가 외쳤다.
“호신강기를 펼치게!”
“그레이트 쉴드!”
아린이 발현한 마법이 크리슈나와 루시아의 전신을 뒤덮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크리슈나의 표정이 그나마 한결 나아진다.
“후우... 후우...”
이내 정신을 차린 크리슈나는 호신강기를 펼치며 저항하기 시작했지만, 마찬가지의 입장인 루시아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루시아 언니는 무공을 익히지 못했어요!”
“루시아씨! 여기서 벗어나세요!”
그러나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모두를 경악케 만드는 것이었다.
“할아버님 저는 괜찮으니 마법을 해제하셔도 돼요.”
“...?!”
“예?”
모두가 놀라 루시아를 쳐다봤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신강기로 버티고 있는 그들은 이 기운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가늠이 되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할아버님.”
“...그래 너의 말을 믿으마.”
아린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장막을 거뒀다.
기운이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쌌으나 루시아는 정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지 멀쩡히 서 있었다.
잠시 뒤 유혜인이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 언니도 우리 오빠처럼...”
특수특성 보유자인 것을 떠올린 것.
“기묘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이 동굴... 루시아씨의 특수특성과 상성이 잘 맞는 동굴일지도 모르겠군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봄세.”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 앞에서 루시아의 시선이 내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의 저편으로 향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괴... 로워...]
[해...방... 시켜줘...]
무엇으로부터 해방 시켜달라는 것일까.
‘아무쪼록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도가 왠지 이곳에 있을 것 같아.’
루시아는 그리 생각하며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탐색 1일차.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갔음에도 일행이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공간이 점점 넓어짐과 동시에,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인원추가가 이루어지며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3일.
“젠장!”
쿵!
팀 솔로를 이끄는 길드의 길드장, 마르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힘껏 지면에 내리찍었다.
흙먼지가 주위에 뭉게뭉게 피어올라 공기를 혼탁하게 했으나, 사람들은 그저 냉정히 마르크를 바라볼 뿐 딱히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이런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진정하세요. 마르크씨.”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에밀리가 사라졌어요. 에밀리가!”
인간진형은 현재 긴급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갑작스레 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제 1-F과 연락이 끊겼어요.”
“제 5-C팀도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전투의 흔적도 없이.
악몽을 꾸는 땅(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