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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에르비아크의 시선이 일순간 유세현 일행이 도주한 경로를 향했다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둘 중에 무엇을 우선시해야 될지 순식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어차피 지금 쫓아가 봐야 늦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전력 노출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엘프쪽으로 가는 게 옳다 판단한 에르비아크가 곧바로 거구의 몸을 움직였다.
만약 다른 위협이 없었다면 로드인 엘라뉘스에게 맡기고 뒤쫓는 것을 선택했겠지만 마족, 델바람이라는 변수가 남아 있는 이상 그녀는 사원에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편이 옳았다.
에르비아크가 날갯짓을 반복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지금 시기에 최정상을 다투는 놈들이 전부 이 탑에 몰리게 된 거지?’
이건 줄곧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던 의문이었다.
이곳에는 신물 파편 조각이 잠들어 있지 않을 터인데.
‘분명 뭔가 노리고 있는 게 있다.’
문제는 현재로선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
드래곤조차도 감히 부러워 할 마력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한 번에 모습을 드러낸 최정상 종족들...
‘시간이 없다. 아이템을 얻으려면 빨리 얻어야 된다.’
에르비아크는 여러모로 촉박함을 느끼고는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 * *
“언제쯤 돌아올 것 같나.”
스토크의 물음에 일행이 침묵했다.
엘프의 본의 아닌 도움을 받아 좀 더 수월하게 도망칠 수 있었던 그날로부터 이틀.
그들은 레피아의 복귀를 눈곱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흠... 너희들의 동료도 아닌 내가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솔직히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난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만.”
“...확실히 지금 상황에선 그렇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편이 났긴 하겠군.”
“그럼 언제쯤 진군할 생각이지?”
드래곤의 규모파악이 끝난 터라 동맹인 스토르 벤과 인간세력은 게이트로 함께 나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두 세력만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지만, 마족이나 델바람, 엘프의 등장 덕에 시선이 분산돼 드래곤의 경계가 일부 느슨해져 지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재 드래곤은 게이트를 중점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
회의를 마친 스토크가 막 돌아가려 할 때였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 언니!!”
레피아였다.
“무, 무사했구나! 역시 무사했어!”
“하아... 하아...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녀의 모습은 말과 달리 무척이나 만신창이였다.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 완전히 떡이 되어 있었으며 전신은 진흙과 오물 투성이었다.
검은꽃들의 부축을 받으며 레피아가 다가오자 이강호의 얼굴에 쓴 미소가 맺혔다.
“무사했군, 레피아.”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무사해야지. 당신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일단은 좀 쉬겠나?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괜찮으니...”
“아니, 어차피 알아낸 것도 별로 없어. 그러니 그냥 지금 얘기해줄게.”
“.......”
“놈들을 지휘하고 있는 건 엘라뉘스라는 이름을 지닌 드래곤이야.”
굉장히 간교하고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이강호의 동공이 일순간 확대됐다.
“엘라뉘스?”
다른 이들은 잘 모를지언정 그만큼은 엘라뉘스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드래곤 로드!’
모든 그린드래곤에 대한 통솔권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고작 5층에서 머무르고 있다니?
“알고 있는 이름인가? 이강호?”
눈치 빠른 스토크가 물었다.
이강호는 말하는 편이 좋을지 말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곤 입을 뗐다.
“그래, 알고 있는 이름이다. 놈은 그린드래곤 로드다.”
“......”
그러자 이강호의 예상과 같이 스토크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뭐? 로드?”
“또 뭐 알아낸 게 있나? 레피아?”
“아니, 이게 끝이야. 뭘 찾고 있는 건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고생했다. 좀 쉬어라.”
“후우... 그럴게. 피곤해 죽겠네.”
“언니 우선 씻어요!”
레피아가 검은꽃들과 함께 멀어졌다. 스토크가 말했다.
“일을 그대로 진행할 건가 이강호?”
“그래야 되지 않겠나? 어차피 우리에겐 다른 남은 길은 없으니까.”
“......”
스토크의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그린드래곤 로드가 있건 없건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타 종족이 게이트를 먼저 통과하게 되면, 윗층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으란 법이 없었기에 약자인 그들이 되려 제일먼저 선두를 선점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좋아. 이걸로 스토크는 웬만해선 딴 짓을 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이강호가 전부 의도한 것이었다.
로드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스토크가 섣불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강호는 게이트로 길을 뚫는 것도 뚫는 것이지만 기회만 된다면 동료들과 함께 엘라뉘스가 노리고 있는 무언가를 노려볼 작정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이곳에서 그 아이템을 얻은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만물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으로 제작 된 반지.
‘진리의 반지.’
무려 에픽 SSS랭크로 막강한 효과를 지니고 있는 그 반지를.
‘한 달에 한 번 상대의 스킬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지.’
이것은 엘라뉘스가 로드 중에서도 최정상으로 우뚝 설수 있게 해준 아이템이었다.
이 아이템을 지니고 있으면 상대의 허를 좀 더 손쉽게 찌르는 게 가능했으니까.
어떻게든 가지고 싶어 필사적으로 조사를 했지만, 결국 소재지를 알아내지 못했던 아이템.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확률은 있어.’
이곳은 절멸의 탑.
과거 인간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마지막까지 클리어하지 못한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이었으니까.
* * *
한편 유세현은 이벨린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지켜본 결과는 어땠습니까?”
제르오펜에 관한 이야기였다.
“흠... 솔직히 최근까진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의 팀은 과거에 진즉 전멸해버려서 캐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하지만 그 말은...”
“예, 딱 한 번. 세현씨가 섬으로 침투했을 때 딱 한 번 제르오펜이 수상쩍은 모습을 보였어요. 이걸...”
이벨린이 수정구를 내밀었다.
특수 도구를 이용해 장거리에서 촬영한 것을 저장해놓은 수정구였다.
“화질은 거리가 거리인지라 많이 조악해요.”
“한번 봐보도록 하죠.”
재생시키자 손을 귀에 다 붙인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제르오펜의 모습이 비쳤다.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고 있는 거 같군요.”
“저도 그리 생각해요.”
뭐라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동거지였다.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연락을?”
“그게 이상한 부분이에요.”
유세현의 의문에 이벨린도 그것이 궁금하다는 듯 턱을 짚었다.
“뭔가를 작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말이죠.”
힘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도 유세현과 동료의 수준상 불가능이었기에, 불온한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결국 시위 같은 걸 벌여 자잘한 훼방을 놓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에 한에서다. 만약 놈이 인간이 아니라면...’
유세현은 똑똑히 들은 바가 있었다.
베르네브를 깔보는 그 말투를.
아무리 몰락했다고 하나 황제를 그런 식으로 대놓고 쓰레기 취급할 수 있는 자는 없었기에 위화감이 생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더 나아가 그 자존심 높은 베르네브가 반발하지 않고 수긍한 것도 한 몫 한다.
생각을 마친 유세현이 말했다.
“이벨린씨 지금 제르오펜이 편입되어있는 길드가 어디죠?”
“림핑 길드로 길드를 잃은 사람들이 뭉쳐 만든 소규모 길드에요.”
“그 길드에서 놈을 자연스럽게 차출 해올 수 있겠습니까?”
“가능은 하죠. 몇 명 되지 않으니 전력보강을 빌미로 전부 이쪽에 편입시키면 되니까요. 설마 일부러 풀어 준 뒤 단서를 잡을 생각이신건가요?”
“예, 그런 길드에 있으면 눈치 보느라 더 행동을 못 할 테니까요.”
지금은 만전을 기해야 할 때였다.
놈이 별거 아닌 인물이라면 괜한 공을 들인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만약 아닐 시에는 큰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잘 만하면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흠... 세현씨의 의지가 그렇다면... 알겠어요. 그렇게 해드릴게요.”
“예, 감사합니다.”
유세현이 밀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는 유혜인의 밝은 표정이 보였다.
“오빠! 오빠! 레피아 언니가 돌아왔어!”
“...다행이네.”
답하는 유세현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맺혀있었다.
* * *
인간세력과 스토르 벤 세력이 일제히 이동을 개시했다.
도합 10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기에 여러 종족들의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제 생각엔 두 세력은 힘을 합쳐 게이트를 넘으려는 것 같습니다.”
에르비아크의 보고에 막 찾아낸 단서를 해석하고 있던 엘라뉘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그런 거라면 적당히 견제만 하라 이르거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지금 엘라뉘스가 해석하고 있는 단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단서와는 달리 보통 것이 아니었다.
이 유적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 아닌 진리의 파편을 그녀는 현재 엿보고 있었다.
이 유적이 왜 탄생했는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존재하는가.
그리고 잠들어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선 무슨 조건을 추가로 클리어 해야 되는가.
“거의 다 알아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느니라.”
“그럼 그때까지 어떻게든 놈들이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 하도록 막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에르비아크.”
“예.”
에르비아크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서자 이번에는 그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에르비아크님! 네 개의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동시에 발생한 일입니다!”
“뭐?”
에르비아크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지금껏 잠잠하기 그지없던 세력이 전부 움직이기 시작하다니? 그것도 동시에?
‘설마 정보가 새어나간 건가? 그럴 리가?’
“어디로 움직이고 있느냐!”
“섬의 외곽을 타고 게이트가 위치한 방향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
“이곳이 아니라... 게이트 쪽이라고?”
에르비아크의 동요가 더욱 커졌다.
놈들이 당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러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었다.
노린다면 이 사원을 노려야 정상일 터인데.
게다가 지금처럼 같은 곳을 목표로 두고 움직이면 맞부딪치는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뜻인데...
‘설마...’
거기까지 생각한 에르비아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간과 스토르 벤을 뒤쫓고 있는 건가?’
그것밖에는 현재 달리 생각할 거리가 없었다.
‘역시 뭔가를 지니고 있는 건가... 벨제뷔트나 카시우스, 카그네프까지 탐을 낼 뭔가를...’
곧장 병력의 일부를 집결시킨 에르비아크의 눈동자가 인간세력이 위치해 있을 저편을 차갑게 응시했다.
* * *
“이야~ 정말 줄줄이 소세지 마냥 따라오네.”
“그렇겠지. 우리가 6층으로 튀어버렸는데 그곳에 탑을 나갈 수 있는 탈출로라도 있으면 머리가 아파질 테니 말이야.”
이강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답했다.
놈들이 왜 이 탑에 진입한 것인지 이유를 알고 있는 자로서 진즉부터 이 같은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도 확실하지? 제르오펜...”
“응, 틀림없어. 마족이야.”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것이었다.
제르오펜이 벨제뷔트의 수하인 아가레스의 끄나풀인 게 밝혀진 것!
이동이 시작되자 제르오펜은 허술해진 틈을 노려 다시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줄곧 지켜보고 있던 유세현이 그 모습을 포착한 덕분이었다.
“마력까지 위조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방치했다간 정말 큰일이 났을 수도 있겠어.”
“으... 최악이에요! 황제자식! 지금까지 마족에게 사람들을 팔아먹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꽤 오래된 거 같은데 언더월드로 향했었던 레피아씨의 길드와 사람들이 습격당한 이유도 분명 그놈 탓일 거예요!”
“그렇겠지.”
“뭐... 일제강점기 때 나라를 팔아먹었던 놈들도 존재하는데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그보다도...”
흐름을 끊은 유세현이 이강호를 응시했다.
“그놈...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지?”
“지금으로선 굴러들어온 복이라고 할 수 있지.”
“굴러 들어온 복이요?”
“그래... 굴러들어온 복...”
김주희의 말에 답한 이강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진리의 반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