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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데려가 달라 해도 안 데려가더니~”
“레피아, 당시 사람들에게는 네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얼마 전 동료들을 좀 더 의지하라고 한 건 다름 아닌 너...”
“아니 누가 뭐래? 안 따라가겠다고 했어?”
“......”
“그냥 이제야 좀 내 중요성을 깨달은 건가 한거지~ 어때 깨달으셨나 이강호?”
장난스럽게 투덜거린 레피아가 이강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강호는 그저 피식 웃어주었다.
이윽고 빛이 떨어지고 출발의 시간이 다가오자 떠나가려는 동료들을 향해 루시아와 루시펠이 씁쓸한 감정을 표했다.
“미안해요. 이번 일에 도움을 주지 못해서...”
유세현이 보기엔 우스운 일이었다.
그간 해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로 미안해하다니.
이강호가 한마디 했다.
“둘에겐 빨리 맞는 무공을 찾아줘야겠군.”
“가능하겠냐? 비급서를 지니고 있는 사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며?”
“흠... 어렵기야 하겠지. 하지만 둘 다 꼭 무공이 필요하긴 해. 정 안되면 일반 무공이라도 익히게 하는 수밖에 없어.”
일반무공이란 말에 유세현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둘은 상성이 잘 맞는 상승무공을 얻게 될시 다른 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강해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내가 천마신공을 마스터 한다면... 아니 그래도 무리겠구나.’
비급서의 집필에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드는 탓이었다.
“후우...”
거기까지 생각한 유세현은 이만 생각을 접었다.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곧게 뻗은 나무들이 위용스런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 * *
“자, 그럼 가볼까.”
말과 동시에 레피아의 육체가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레피아가 일정영역을 탐색하면 일행이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의 수색이었다.
모두의 능력이 출중한 만큼 처음부터 다 같이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발각되지 않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두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놈들의 중추에 도달하여 목적을 알아낸다.
그것이 현재 일행의 목표였다.
스스슥-
“이 앞까지는 괜찮아. 들어와.”
“알았다.”
레피아가 길을 만들면, 유세현은 만에 하나를 대비해 주위 마력의 흐름을 보다 면밀히 살폈다.
레피아가 아무리 이 일의 프로이고 각별히 주의를 요하고 있다 하지만, 드래곤의 감지 마법은 일반 대리자들의 알람 마법이나 트랩과는 한 차례 차원을 달리했기에 발각 된 걸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일행은 잡초가 발에 짓이겨지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게 각별히 신경 썼다.
그렇게 4시간.
콰르르르르-
그들은 마침내 이강호가 마음속으로 점찍어 두었던 지점인 폭포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유세현과 레피아가 신호를 주자 일행은 폭포의 물줄기 뒤에 숨겨져 있는 동굴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계속된 고유특성의 사용으로 온몸이 땀범벅이 된 레피아가 수건으로 몸 이리저리를 닦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감시가 그리 살벌하진 않은데? 아니, 되려 다른 종족보다 쉬워.”
“훗, 그건 네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레피아.”
“아니 봐봐. 경계병이 하나도 없잖아.”
드래곤의 특성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경계를 하면 되는 놈들은 구태여 직접 몸을 쓰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대범한 놈들이네... 그러다 그 잘난 마법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놈들도 안심하고 사용하는 거다.”
실제로 그 잘난 스토크도 걸렸다 하지 않았던가.
무공을 배우지 않은 존재들은, 아니 무공을 익히고 있다 하더라도 숙련도가 높지 못한 자들은 드래곤의 감지마법에서 벗어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놈들이 방심하고 있는 이번에 알아내야 돼. 만약 발각 되면 경계가 더 삼엄해져 많이 힘들어질 거다.”
“쩝, 힘만 제약당하지 않았어도 훨씬 괜찮았을 텐데...”
유세현이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레피아가 깜짝 놀랐는지 축 쳐져있던 허리를 벌떡 폈다.
“뭐? 힘을 제약 당했다고? 난 그런 거 당하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부터?”
아군의 힘의 약화는 불안만 증대시킬 뿐 좋을 게 하나 없었기에 구태여 밝히지 않은 탓이었다.
이윽고 이강호가 스탯의 약화와 스킬의 봉쇄까지 간단히 설명하자 레피아가 입 열어 말했다.
“꼭 패널티는 아니네?”
“그렇지. 드래곤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을 테니까.”
4층까지는 탑에 들어온 이종족들과 공간이 분리되어있어 만날 일이 없었기에 그저 패널티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밝혀도 될 때가 온 것이다.
“놈들도 스텟 하락에 주요 스킬 몇 개가 봉쇄 됐을 거야.”
“흠... 그렇단 말이지...”
레피아가 여러 감정이 섞인 시선으로 떨어지고 있는 물줄기를 응시했다.
당당히 수색에 동참한 데다, 이강호에게 부연설명을 듣기까지 했지만 그녀는 사실 아직도 꺼림칙한 기분을 좀처럼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마족과 천족, 둘 다 경험해 본 장본인으로서 드래곤도 어마어마하게 끔직한 존재일 게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많이 의지하고 있는 동생, 검은꽃들과 동료들을 위해 내색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사실 그녀도 생명체인 이상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솔직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될지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정보를 얻은 다음엔? 힘이 없는 인간 세력을 이끌고 뭘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강호와 유세현... 그리고 김주희, 이 셋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어선 무척 신비한 존재였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으니까.
끝임 없이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이뤄내 왔다.
묘한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자들.
“야, 아퀼라. 내 육포 집어먹지 마라.”
“흥, 니꺼 내꺼가 어딨나? 먼저 집어 먹은 사람이 임자지.”
“이게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 처먹어서...”
“너한테 배운 건데?”
“선배님, 전 맹세컨대 쟤에게 저런 걸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
뭐, 가끔 어린애나 할 것 같은 싸움을 볼 때면 엄청나게 미덥지는 못할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하... 둘이 참 사이가 좋네.”
“안 좋거든요?”
“안 좋다.”
거의 동시에 답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이미 짓고 있던 레피아의 헛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 * *
한편 유세현 일행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수색을 이어가고 있는 동안 인간진형에는 드래곤들이 들이닥쳤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날아온다!”
“대피하라!”
콰아앙!
수많은 마법 세례와 브레스에 의해 숲이 높아 없어지고 지면에 푹 꺼진다.
드래곤들은 악명답게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공격해온 수가 고작 25마리임에도 불구하고 도주 이외에는 다른 대응이 딱히 불가능했다.
저 멀리 점으로 보일 때부터 피난을 시작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관측자들이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회군하는 드래곤을 확대 기구를 통해 본 이벨린이 옆에 있는 아린을 향해 말했다.
“스승님, 제 생각에 저들의 목적은 섬멸이 아닌 거 같아요.”
“확실히 그렇구나.”
아린도 그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드래곤들의 습격은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위협이었지만, 전멸시키려는 것치고는 일처리가 너무 대충이었다.
집요하게 쫓아왔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혔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단순히 변수를 고려한 것일 수도...”
다른 의견을 내놓은 이는 다름 아닌 이태광이었다.
“놈들의 수는 고작 25마리였네. 세현 동생이나 강호 동생이 있었다면 충분히 몇 놈은 죽일 만 했어. 게다가 이 섬에는 스토르 벤도 있지.”
튜토리얼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김길태가 죽은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대신 생각해줄 책사가 없어져서일까?
이태광은 무대포가 아닌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단언하긴 이르다는 거군요.”
“그렇지.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좋은 의견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지는 건 좋지 않죠.”
아무튼 이로서 한차례 위기는 넘겼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머리 바로 위, 상공에 작은 알갱이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
사람들은 그걸 확인하기 무섭게 사색이 되었다.
“이, 이런... 하필 지금?!”
입자들이 흙이 되고 지면을 이루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섬이 만들어졌다.
중력과 더해 이 탑의 신기 현상 중 하나였다.
“제기랄!”
그리고 섬이 여지없이 등장할 때면 그곳에서는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하나하나가 전부 강력하기 짝이 없는 괴물 같은 몬스터들이!
“태광씨!”
“이쪽은 내가 맡도록 하지!”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투쟁했다.
과거였다면 이겨내지 못했을 테지만, 1층부터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군과 맞서 싸우며 이곳까지 도달한 그들은 본인들의 생각보다도 훨씬 강해져 있었다.
“리체 언니!”
“하압!”
그들의 싸움은 빛이 떨어져 어둠이 찾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 * *
“후욱... 후욱...”
“아... 더는 못 움직여...”
많은 이들이 곤죽이 되어 땅에 드러누웠다. 여기저기가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주위를 한번 둘러본 이벨린이 무겁기 그지없는 다리를 힘겹게 지면에서 뗐다.
“후우...”
이벨린 또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에게는 피해를 종합하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될 책임이 있었다.
“젠장... 저희 쪽에선 총 15명이 사망했습니다.”
“...15명씩이나...”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진형은 무림인들이나 레피아, 이태광의 길드 정도뿐이었다.
이벨린은 마지막으로 무림 측의 대표를 맡고 있는 남궁시영의 보고를 받은 뒤에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쉴 수 있...’
“이, 이벨린 언니!”
그때 다급한 유혜인이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강타했다.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늘해졌다.
“왜, 왜? 또 무슨 일이 생겼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이건 언니가 꼭 봐봐야 될 거 같아서.”
“응? 내가?”
이벨린이 유혜인의 뒤를 따라 고지대로 이동했다.
“저길 봐봐!”
유혜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동쪽 섬의 상공이었다. 저곳도 마찬가지로 섬이 생성된 것이 분명했다.
만원경을 받아든 이벨린이 힘을 쥐어짜내 마력을 부여하자 동쪽 섬을 향해 낙하하고 있는 몬스터들의 상이 확대되어 뚜렷이 보였다.
“?!”
그리고 그 몬스터들을 보는 순간 이벨린은 한 번 벌어진 입을 감히 다물 수 없었다.
“에... 엘프?”
그렇다.
떨어지고 있는 건 괴상한 형태를 한 몬스터가 아니라 엘프와 똑같은 외관을 한 생명체였다.
* * *
2일, 그게 섬에 침투한 유세현이 첫 드래곤을 목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내부 깊숙한 장소였는데, 게이트가 위치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머리카락이 초록색인 걸 보니 그린드래곤이군.
이강호가 수화로 말했다.
수화는 보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숙련되어있지 않으면 자칫 잘못 이해할 수가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대화 방법이었지만, 마력을 소량이라도 사용해야 되는 전음과 달리 마력을 1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는 최고로 유용한 수단이었다.
-머리카락 색으로 그게 구별이 가능해? 다른 종류의 드래곤인데 그냥 저 머리색으로 한 거일 수도 있잖아?
-그렇지 않아. 드래곤들은 자존심이 세서 항상 뭔가를 할 때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거든. 셀론의 머리카락 색 기억나지?
-아... 그나저나 습격을 감행했던 놈들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이걸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린드래곤의 비중이 많다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연속적으로 볼 확률은 높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는 꽤나 중요한 정보이기도 했다.
과거 알테리아 대륙에서는 드래곤들이 색으로 무리를 나누어 서로가 서로를 참견하지 않은 데에 반면, 이 판도라에 떨어진 이후로는 많은 무리들이 통합되어 색의 경계가 이전보다 모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린드래곤의 비중이 많다는 건...’
이곳에 그린드래곤에 대한 많은 권한을 지니고 있는, 높은 격의 그린드래곤이 존재하고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었다.
그린드래곤 로드 엘라뉘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