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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만요!”
깜짝 놀란 이벨린이 다급히 말렸으나 이강호가 한번 움직인 발을 멈추는 일은 결코 없었다.
“가, 강호씨! 막무가내로 가봤자 소용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건 우책이에요! 괜히 반감만 더 사게 될 거라고요! 일단은...”
“방법이 안 보인다며?”
“......”
“걱정마라. 오늘 당장 뭘 할 생각은 없어. 정말 만나만 보러 가는 거다.”
이에 이벨린은 더는 그의 행보를 말릴 수 없었다. 차분한 어조로 보건데 지금 이강호는 이벨린이 평소 알고 지내던 그 냉정한 이강호였다.
약간 분노한 것 같긴 하지만... 그가 이유 없이 깽판을 친 적은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어요.”
“마음대로. 세현아, 넌 루시펠씨와 같이 이곳에 남아있어 줘.”
“응? 우리 둘만?”
“응, 생각이 있거든. 루시아씨만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루시펠와 유세현을 제외한 셋은 조악하지만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행여나 숨어들지 않을까 이벨린이 생각했지만 이강호는 그 대담한 거동처럼 당당하게 정문을 향했다.
이에 이벨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미래가 뻔히 보였다.
그리고 예상처럼 시작된 대립.
“멈춰라. 이곳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정문을 당당히 통과하려 하자 황궁병사 둘이 일행을 막아섰다.
혹시 몰라 이벨린이 말해봤지만...
“폐하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니 길을 비켜주세요.”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벨린님. 폐하께서는 그 누구도 명령 없인 들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역시는 역시였다.
소용이 없었다.
이에 잠시 멈춰 지켜보던 이강호의 발이 재차 움직였다.
병사들이 순간 화들짝 놀래 하며 외쳤다.
“돌아가란 말 못 들었나! 더 이상 다가온다면 공격하겠다!”
“......”
“이놈이 그래도!!”
결국 이강호가 멈추지 않자 병사 둘이 날아들었다.
병사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저들을 순식간에 제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웅-
퍽!
“컥!”
순식간에 당수로 목의 경동맥을 직격 당한 병사 한 명이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황궁의 문지기가 일반병사에 비해 스탯이 높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 무슨! 헉?! 크악!”
두 번째 병사도 손쓸 틈 없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손을 휘휘 턴 이강호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인가. 심각하군.”
“......”
이후 내부로 진입하자 병사들이 침입을 깨닫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적개심을 활활 불태우며 외쳤다.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황제를 불러라.”
후웅!
그러나 그런 그들도 역시나 이강호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얼마나 여유로운지 루시아가 나설 필요조차도 없었다.
“마, 말도 안돼.”
마치 괴물이라도 마주한 사람마냥 남은 병사들의 눈이 지진을 일으켰다.
어느 한 병사가 드디어 깨달은 듯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새, 생각났다! 저 얼굴... 등에 짊어지고 있는 창... 이강호다!”
“이, 이강호?”
“그 말로만 듣던 이강호 말이야?”
“물러서!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이에 다른 병사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비켜라!”
그런데 그때 저편에서 양각으로 새겨진 호랑이무늬 갑주를 착용한 사내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병사를 밀치며 다가왔다.
이강호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무래기가 분명했지만 그는 마치 뭐라도 되는 것 마냥 당당히 이강호의 앞에 섰다.
“네가 이강호라고?”
“그렇다만.”
“폐하는 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네가 예전에 얼마나 마음대로 황궁에 들락날락 거렸는진 모르겠지만 지도자가 바뀐 이상 절차를 거쳐...”
“하... 상상 이상이군.”
“뭐?”
“더 이상 너와 나눌 말은 없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접근한 이강호가 딱밤을 날렸다.
딱-
콰광!그것만으로 사내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 벽에 처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커, 컥! 너 이놈...”
그 모습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병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강호가 방금 굉장히 쉽게 제압한 자는 황제가 창설한 기사단 중 하나인 블랙타이거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비록 블랙타이거가 중간급의 기사단이라고는 하나, 기량만으로 병사 10명은 족히 상대하는 자를 이런 식으로 눕혔다는 건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는 뜻이었다.
“주... 죽여 버리겠다.”
사내가 이를 악물자 대기가 진동했다.
우웅-
수식이 서서히 그려지고, 기하학적인 도형이 공간을 수놓았다.
이강호는 저것의 정체가 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법... 그것도 엄청난 고위마법이군.’
이강호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자가 과거 왕궁마법사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순식간에 다가가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크헉!”
마법사가 기절하자 마법진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사라졌다.
싸울 투지를 잃은 병사를 쓱 훑은 이강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계속가지.”
* * *
많은 이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일반 기사단인 블랙로즈부터 시작하여, 최정예 기사단인 화이트울프까지.
그러나 그런 그들도 이강호의 상대는 전혀 되지 못했다.
아니, 상대가 되긴 커녕 털끝조차도 건드는 게 불가능했다.
“마, 막아라!”
“어, 어떻게 말입니까?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너무 너무 강하단 말입니다!”
퍽!
“크악!”
현재 기사단에게 있어서 이강호는 괴물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아, 아린에게서 배운 스킬을 날려!”
“제가 배운 마법은 광역기라 사용했다간 전부 휘말립니다!”
“제, 젠장! 그럼 단일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크악!”
이윽고 기사단 모두를 제압한 이강호가 현 황제, 베르네브 론 아르카드의 앞에 섰다.
쓰러진 기사들을 배경으로 이강호가 지그시 응시하자 베르네브의 목 너머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적지 않게 동요했으나 이를 숨기고 품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자긴 왕이다 이건가.’
이강호가 마음속으로 비웃음을 흘리기 무섭게 베르네브가 근엄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행패인가 이강호. 지금 자네가 저지른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나?”
“행패는 무슨, 만나주지 않기에 직접 뚫고 온 것뿐이다.”
“허... 나를 알현하기를 원했다는 건가? 하지만 난 그런 보고는 들은 적이 없다. 만약 했다면...”
“수락했을 거라는 건가? 이벨린의 알현조차도 거부하는 주제에? 웃기는군.”
“......”
이강호가 비웃자 일순간 심기가 뒤틀렸는지 베르네브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이강호가 연이어 말했다.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전부 치우고 사람들을 물려라. 1:1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전부 데리고 나가라.”
어차피 이강호가 해하려 하면 막을 방도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베르네브가 요구에 따랐다.
이강호는 주위가 다 물러나자, 도청마법이 걸려있는지 확인하기 무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제는 당연히 전부 민감하기 그지없는 ‘그것’들이었다.
이에 베르네브가 열변을 토했다.
“너는 우리에게 정보를 숨겼다. 우리를 철저하게 부려먹을 생각이었던 거 아닌가?”
“아니다. 내가 정보를 구태여 말하지 않은 이유는...”
“분열 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 생각하며 너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꽤나 있었지.”
“......”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하려 했어.”
“내가 정보를 알려줘 성장한 거 아닌가?”
“이용해먹으려면 강해야 했을 테니 그런 거겠지.”
베르네브는 이강호의 말을 궤변이라 물고 늘어지며 철저하게 불신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정보를 주면 군사를 몇 번 움직여주는 기브 엔 테이크 방식도 거절했고, 어떻게 통치를 하던 관여를 하지 않겠으니 협력해 달라는 제안 또한 소용없었다.
그는 이벨린과 레피아의 추측처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강호와 아예 엮이지 않으려했다.
이강호로서는 답답한 일이었다.
‘그깟 권력이 대체 뭐라고...’
과거에는 그저 생존하기 바빴었다.
하루에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갔기에 서로 의기투합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권력이 존재하려야 존재할 수가 없었다.
‘후우... 더 이상은 말하나 마나겠군.’
이강호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평소 동료를 제외한 이들에게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그로서는 의례적으로 보이는 적의였다.
이에 베르네브가 의자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거만한 자세 그대로 실소를 머금었다.
“눈빛이 사납군. 설마 짐을 해치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간 넌 대리자들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베르네브가 돌아가는 머리만큼은 꽤 좋다는 증거였다. 그는 이강호의 강함을 보았기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으나 끝내 해치진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강호가 수긍하듯 가만히 있자, 베르네브가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만약에라도 암살을 계획 중에 있다면 시도는 꿈도 꾸지 말아라. 나도 비장의 수단 하나 둘 정도는 지니고 있으니까.”
베르네브가 포켓을 뒤적이더니 구슬을 하나 꺼냈다.
“이건 라분의 눈동자라는 아이템이다. 순간적으로 대량의 영상을 퍼트릴 수 있지.”
그는 이강호가 묻지 않았음에도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다.
거드름까지 피우는 게 겉으로는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반대로 이강호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인지 준비를 참 많이 해뒀다.
“알았으면 그만 돌아가 봐라. 그리고 다시는 내 제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라.”
“......”
이강호가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베르네브는 이강호가 몸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돌린 이강호가 방을 빠져나가기 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르네브, 넌 오늘 고작 권력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다.”
정말 작은 목소리였으나, 주위가 한없이 고요했기에 베르네브는 이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흥, 그래 봤자지. 이걸 지니고 있는 한 이강호, 너에게 방도 따윈 없다.’
그러나 그런 본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베르네브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어떻게 됐어? 이야기는 잘 됐냐?”
그렇게 물은 유세현은 이강호의 표정을 보고는 잘 안됐음을 깨달았다.
“뭐, 괜찮아. 사실 확인을 위해 간 거지 기대는 거의 안했었으니까.”
“으음~ 그래? 그래서 어쩔 거야? 설마 암살할 생각이냐?”
“아니, 그건 놈이 라분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어서 불가능해. 죽이는 순간 아이템의 효과로 영상이 이 일대에 있는 대리자들에게 퍼져 내가 한 짓이란 걸 알게 될 거야. 얼굴을 가리면 당장 정체를 숨길 순 있겠지만 이미 가렸다는 점에서 의혹이 끊이질 않겠지.”
“그럼?”
“방도가 있어. 혼란을 야기하는 데다가 시간이 소요되기에 별로 사용하긴 싫었지만.”
“뭔데?”
“이 안락함을 부숴버리는 거야. 안주하게 되는 근원을 없애버리는 거지.”
“...뭐?”
“예?”
순간적으로 유세현을 포함한 일행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순간적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
“서, 설마 이강호 당신!!”
“아~”
이벨린이 경악해하는 반면, 유세현은 피식 웃으며 그의 가슴을 툭 쳤다.
“야, 나와 루시펠씨를 데려온 게 이거 때문이었냐?”
“응, 맞아. 너와 루시펠씨가 나서줘야겠어. 할 수 있겠지? 역할 놀이.”
“물론,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
“후후, 맞아.”
유세현과 이강호가 서로를 응시하다 주먹을 툭 맞댔다.
오직 그들이기에 할 수 있는, 모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르카드 제국(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