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606 --------------
쿠르르 콰광!
천지가 개벽되며 세상이 격동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갇혀 있던 망자들의 환호 섞인 비명소리가 유적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수히 많은 대리자들은 이상 현상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하... 하늘이 뚫렸어.”
쿠구구구궁!
이내 전 세계에 퍼져 있던 망령과 망자들이 뚫린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자, 대리자들은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봤다.
100억.
어마어마하게 많은 망령이 하늘 끝으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대리자들조차도 전율케 하는 굉장히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여태껏 이 세계를 단절시키고 있던 수천 개의 거대한 문이 일제히 쓰러졌다.
쿠구구-
쾅! 쾅! 쾅! 쾅! 쾅!
“이... 이건?”
대리자들의 눈앞에 두 개의 알림창이 나타났다.
[맹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세계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
지금까지 줄곧 망령과 몬스터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던 대리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알림이었다.
“푸, 풀렸어? 우리 드디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야?”
“그, 그런 거 같아.”
“살았다! 살았어!”
“아니, 그보다도 왜 갑자기 경계가...”
“왜겠어? 뻔한 거 아니야?”
그리고 동시에 대리자들은 깨달았다.
“유적이... 클리어 된 거로군.”
“분명해. 그걸 제외하고는 다른 이유 따윈 생각할 수 없어.”
“그럼 대체... 누가 클리어 한거지? 엘프? 델바람? 아니면... 역시 마족인가?”
“난 마족이라고 생각해. 벨제뷔트, 그 자식 예전부터 암흑지대에 꽁꽁 처박혀서 뭔가를 하고 있던...”
이윽고 엘프가 클리어 했냐느니 델바람이 클리어 했냐느니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현상은 한 종족의 명운을 건 도박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일 뿐, 아직 이 세계가 완벽하게 클리어 된 것은 아니라는 걸.
크람베르를 처리하고 동족의 영혼을 해방하여 영웅이 된 크라베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크크크... 크크크크크...”
지금 그의 입가에서는 스산하면서도 환희를 담은 조용한 웃음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이내 그가 팔을 크게 벌리고 포효했다.
“크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해냈어! 내가 해냈다고!”
데프하우어와 벨제뷔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밸런스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무너진 것이었으니까.
그것도 무척이나 안 좋은 쪽으로.
크라베스가 저편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렘벨크! 이젠 너도 깨달았겠지? 누가 맞았고 누가 틀렸었는지를!!”
“......”
“자! 이브와 협력하여 수호자를 제치고 이쪽으로 진입해라!!”
크라베스의 말에 렘벨크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크라베스가 조건을 클리어하게 됨으로써 제사장들에게 내재되어있던 가능성이 강제적으로 깨어나게 되어 그 또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람에서 흘러나와 타락한 망령이 되어 세상을 떠돌던 이들도, 그저 막연히 영혼 상태로 갇혀 있던 이들도, 이제는 본래의 육신을 되찾고 이 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크라베스에 의해 생을 되찾게 되었다.
“명을... 따릅니다.”
렘벨크와 이브의 움직임이 변했다.
서로를 견제하는 형태에서 협력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크라베스가 벨제뷔트를 응시하며 말했다.
“유세현, 내가 보라돌이를 상대하겠다. 너는 마법사 놈을 처리해라.”
“뭐어어? 보라돌이이이?”
명백한 조롱에 심기가 뒤틀린 벨제뷔트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치욕이었다.
“크하하하! 피부색이 보라색이니 보라돌이가 맞지 않나! 보라돌이를 보라돌이라고 부른 것뿐인데 왜 그렇게 발끈하지?”
“이, 이놈이 그래도오오!!”
벨제뷔트의 인상은 어느새 흉악한 마수보다도 더 일그러져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크라베스를 향해 언제 달려들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모습.
그러나 벨제뷔트는 부들부들거리기만 할 뿐 크라베스를 향해 곧이곧대로 달려들진 않았다.
‘크으, 빌어먹을...’
지금 달려드는 건 상대방이 의도한 바대로 움직여 주는 것일게 너무도 뻔했으니까.
때문에 벨제뷔트는 되려 거리를 벌리며 근처에서 전투중인 최측근, 아크샤와 파라간에게 통신을 보냈다.
[아크샤! 파라간! 놈들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당장 문지기를 넘어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라!]
[그렇게 되면 카시우스와 카그네프도 내부로 진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다. 지금 벨제뷔트에게 중요한 건 카시우스와 카그네프 따위가 아니었다.
이브나 렘벨크 같은 놈이 넘어오게 되면 당장 죽게 생겼는데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은 없는 것이다.
‘아니 되려 같이 넘어오면 좋다. 분명 서로를 견제 할 테니까.’
난전으로 유도한 뒤, 어떻게든 정수를 일단 손에 넣는다.
그 다음은?
‘이제 어쩔 수 없다. 제발 뭔가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벨제뷔트가 필사적으로 크라베스의 공격을 막아내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크윽!”
유세현이 휘두른 예리한 칼날이 데프하우어의 가슴팍을 횡으로 쓸고 지나쳤다.
데프하우어가 필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혀 회피한 것이었기에 자세가 무너져 이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런! 데프하우어를 도와야 된다!’
그러나 벨제뷔트의 앞에는 크라베스가 있었다.
당연히 방해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벨제뷔트는 놈을 어떻게든 물러서게 하기 위해 마력을 듬뿍 담은 지옥불을 퍼부으려 했으나, 그 순간 크라베스가 갑작스레 도약하며 돌발행동을 했다.
‘응?’
등 뒤, 그것도 데프하우어의 등 뒤가 아닌 유세현의 등 뒤로 접근한 것이다.
데프하우어를 마무리 지으려던 유세현의 눈이 크라베스를 확인하기 무섭게 동그랗게 변했다.
크라베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흐흐흐, 걸렸구나! 유세현!”
휘이익-
그의 팔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유세현의 심장을 향했다.
유세현의 갑주는 전투의 여파로 반파되어있었기에 클로를 장착하고 있는 크라베스의 공격을 받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너무 가까워서 지금 천마군림보를 운용해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 어떻게?’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유세현도 당연히 이번만큼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영혼각인, 영혼을 건 맹약은 어길시 목숨으로 이어지기에 절대 깰 수 없을 터인데...
‘제길! 역시 크람베르를 흡수해서 맹약 같은 걸 지킬 필요가 없어진 건가!?’
그러나 답은 크라베스의 바로 이어진 말에서 나왔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내가 더는 맹약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어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건 틀렸다! 이건 내가 만든 기회다! 난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루시아를 이용해 맹약의 허점을 공략했다!”
“뭐?”
“네가 이곳에 들어와 루시아를 도운 순간부터 맹약은 진즉에 깨졌다는 뜻이지!”
촤악-
“큭!”
클로가 유세현의 갑주를 완전히 박살내며 등가죽을 세 줄로 찢고 지나쳤다. 깊게 베여 결코 얕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크라베스가 무조건 죽일 생각으로 내지른 공격이란 걸 감안하자면 치명상은 아니었다.
“아, 아니? 왜...”
경로가 갑자기 틀어졌다.
그사이 데프하우어의 허리를 1/4 정도 베어버린 유세현이 재빨리 방향을 틀어 크라베스를 발로 차 그를 스스로부터 떨어뜨렸다.
유세현은 루시펠을 흘끗 흘겨보기 무섭게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악... 하악... 하악...”
루시펠에게 업혀 있던 루시아가 사색이 된 낯빛으로 그를 향해 양팔을 뻗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모든 기력을 짜내어 고유특성을 발현해 막아 준 것!
“세현씨!”
루시펠도 재빨리 있는 마력 없는 마력을 전부 사용해 스킬을 날려 도와주었으나, 유세현의 위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지금이다!’
크라베스가 떨어져나가자, 이번에는 벨제뷔트가 날아들었다.
“크윽!”
유세현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운용해 공간에 부츠에 담겨있는 옵션으로 대지를 융기시켜 접근을 불허했으나,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던 데프하우어가 그 순간 유세현의 머리를 붙잡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잡았다! 얼티메이트 스피릿 브레이크(ultimate spirit break)!”
손을 타고 데프하우어의 사념이 순식간에 유세현의 정신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10서클, 그중에서도 블랙드래곤 로드가 직접 시전한 최고 난이도의 정신계 마법은 아무리 유세현이라고 할지언정 감히 불완전한 몸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뇌가 타들어가는 고통.
마왕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마심원을 받았을 적 이상의 통증이 그의 정신을 난자한다.
머리를 감싸 안은 유세현의 몸이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 안돼! 루시펠씨! 저,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세현씨를!”
“큭!”
이에 루시펠은 온 힘을 짜내어 어마어마한 속도로 활강했다.
그러나 이미 유세현의 몸 아래에는 크라베스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유세현은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채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데프하우어의 사념은 더욱 그의 숨통을 죄어올 뿐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크라베스와의 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해봐야 10m.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
지금 자신이 당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루시펠도 루시아도 밖에 있는 아퀼라도 전부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확률이 컸다.
“으아아아아아아!”
유세현이 마지막 의지를 불태웠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정신은 돌보지 않고 온 힘을 다했다.
그때였다.
[거기까지. 더는 보고 있기가 안쓰럽구나 제자야.]
내면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세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스, 스승님...’
[멍청한 놈. 매번 무리나 해 싸고... 하지만 너는 운이 좋아, 생자와 사자의 경계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나와 그놈을 함께 품고 있으니...]
[내가 나서겠다. 천마(天魔).]
[그래라. 제자 놈의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는 지금은 나보다도 네가 나서는 게 낫겠지.]
‘아...’
유세현은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그 사건 이후로도 줄곧 둘의 영혼이 계속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음을.
[그럼 가서 밥값 하고 와라. 마왕(魔王).]
꺼져가던 어둠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구!
유세현이 붉은 눈을 번쩍 뜨자, 어둠이 확산되어 일대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동시에 루베르크가 거대한 대검으로 바뀌며 크라베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
콰아앙!
대검이 박힌 장소는 완전 개박살이 나며 폭삭 주저앉았다.
회피한 크라베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힌다.
다 죽어가던 이에게서 나온 힘이라고는 차마 믿을 수 없을만한, 그런 위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확히 나를 노렸다. 설마 연기였나? 사실 별로 강한 데미지를 입지 않았는데... 아니, 그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크라베스는 데프하우어와 벨제뷔트를 보고 생각을 고쳤다.
데프하우어와 벨제뷔트는 정말 눈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데... 데프하우어!”
“분명 제대로 적중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그때였다.
마치 스스로의 몸 상태를 체크하듯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던 유세현이 중얼거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군.”
동시에 새빨갛게 물든 유세현의 동공이 더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가 손을 뻗자 어둠으로 된 회오리가 순식간에 주위를 에워쌌다.
크라베스는 일단 다급히 자리를 뜨는 반면, 벨제뷔트는 기겁을 했다.
“이, 이건!”
[흑암(黑暗)]
마왕 강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