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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주희는 이강호와 함께 떨어진 상태였다.
벨제뷔트가 발동한 술식은 적을 배제하기 위한 강력한 술식이라 본래라면 좀 더 뿔뿔이 흩어졌어야 정상이었지만, 마지막에 유세현이 그 능력을 일부 쇠퇴시킴으로써 이정도로 끝난 것이다.
“같이 떨어져서 그나마 다행이군.”
이강호의 말에 김주희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다.
유세현과 아퀼라가 보이지 않음에도 그나마 이게 나은 편이라 해야 할 판이라니...
그만큼 벨제뷔트의 기습은 이곳을 완벽하게 꿰뚫지 못한 연합군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었다.
25명이 같이 사라진 델바람들이야 몰라도, 다른 이들은 목숨이 아까운 이상 소극적으로 되어버려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여 운만 따라준다면 어떻게든 천족과 마족에게 비벼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강호였지만 이렇게 되면 완전 나가리다.
‘아니 되레 최악이군.’
그는 지금까지 이 판도라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탐지 마법을 익혀왔다. 탐지마법의 한계점을 생각하자면 수준은 회귀전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장소는 그 특수성 때문에 탐지마법이 거의 통하지 않았다. 유세현이야 마력을 느껴 루시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세현이 사기인 것이지 이공간이 친절해서가 아니다.
고유특성이라 불리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능력.
아니, 되레 전체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매한 고유특성보다는 실질적으로 몇 배는 쓸모가 있다.
‘그러니 유세현은 알아서 잘하겠지.’
이강호는 더 이상 유세현에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동료가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는 게 최선이다.
실제로 잘 할 테고.
문제는 되레 이쪽.
“선배님 이쪽 길은 다 막혀있어요.”
“여기도 마찬가지야.”
이강호가 점액을 치워내고 외벽에 손을 짚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재질의 감촉이나, 서늘한 온도나 그들을 가두고 있는 벽은 아무리 봐도 진짜다.
재차 이 공간의 지독함을 체감한 김주희가 혀를 찼다.
“아, 어떡하죠? 아무리 봐도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닥치는 대로 부숴보자.”
“예? 하지만...”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이렇게 공간이 뒤틀려있는 곳은 함부로 건드릴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탓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알겠어요. 해보죠 선배.”
쉬이익-
서로 살짝 거리를 둔 김주희의 전신에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기로 인해 주위가 동결되며 땅에 서리가 진다.
“김주희, 백련화(白蓮火)를 사용해. 한곳을 노린다.”
백련화는 이형의 얼음으로 화염을 약화시키지 않는 유일한 빙공이었다.
“간다!”
“예! 선배!”
불과 얼음, 두 사람이 동시에 창을 내질렀다.
[빙백신공, 백련화(白蓮火)]
[태양신공, 열화창무(烈火槍武)]
쿠오오오오!
서로 다른 상반된 힘이 동시에 한 곳을 강타했다. 그러나 김주희가 발현한 백련화 덕에 불과 얼음은 서로를 잡아먹지 않았다.
팽창된 열기가 점액질을 순식간에 녹이며 공간을 잠식해나간다.
그 여파는 순식간에 김주희에게까지도 미쳤다.
“으으으!”
엄청난 폭염!
“괜찮아?!”
“괜찮아요!”
일반인이었다면 위험했을 테지만 김주희는 빙백신공의 후계자다. 최소한의 한기로 몸을 뒤덮고 있으니 여파 때문에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쉬이이익!
이강호가 더욱 마력을 끌어올렸다.
현재 이강호가 노리고 있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를 집약시켜 공간 자체를 뒤트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인식이 불가능한 길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치직-
노력 덕분일까? 허공에 금이 갔다.
김주희와 이강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가능하다!
“조금 더!”
그런데 그때였다.
“거기까지 하지.”
균열 저편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 * *
“?!”
깜짝 놀란 이강호와 김주희가 곧바로 마력을 거둠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 경계했다.
곧 목소리의 주인이 허공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카시우스?”
“그렇다, 나다.”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카시우스였다.
이어서 로리엔도 나타나 그의 옆에 서자, 순식간에 상황판단을 끝낸 김주희가 말했다.
“선배님 저 여자가 우리를 추적한 모양이에요.”
“눈치가 빠르군.”
카시우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이강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 그보다 둘 뿐인가?”
“보는 대로.”
김주희의 눈이 로리엔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적개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리 카시우스가 언질을 해놓은 것일까?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어오진 않는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벨제뷔트 녀석, 아주 대단한 짓을 해줬어.”
“유세현도 추적이 되나?”
“아니, 아쉽게도 지금 추적이 되는 건 카그네프 뿐이다.”
카시우스가 일축했다.
이에 이강호는 턱을 짚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단은 분산되어있는 병력들을 찾아나서는 게 우선이겠군.’
카그네프는 24명의 병사들과 사라졌다. 그것도 그냥 24명이 아니라 최고 중에 최고만을 데려갔기에 바로 합류하면 그 압도적인 수적우위를 바탕으로 목숨을 위협해올 가능성이 0%가 아니었다.
“그럼 일단은 흩어진 네 병력들을 좀 찾도록 하자.”
“흠, 역시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인가?”
“그렇지. 괜히 지금 바로 우리 넷이서 카그네프에게 가봐야 뒤통수만 깨지는 수가 있다.”
“하긴...”
네 명은 곧장 자리를 박찼다. 이강호는 굳이 놈의 동료를 운운했지만 델바람들도 찾을 생각이었다.
지금이야 카시우스도 잠자코 있지만 힘의 균형이 깨지면 언제 화살을 겨눠올지 모른다.
‘완전 난장판이군.’
이강호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카시우스가 흘깃 흘겨봤다.
‘그 열기... 분명 일시적이지만 공간을 부쉈다.’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들의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한 상태였다.
화염의 스페셜리스트, 얼음의 스페셜리스트, 마왕의 힘을 지니고 있는 자까지.
그는 당최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더더욱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순식간에 치고 올라올 수 있었을까? 대체 무슨 대단한 비밀을 지니고 있기에?
‘어쩌면 당장 유적공략에 힘쓰는 것보다도 그걸 알아내는 게 장기적으로는 훨씬 이득일 수 있다.’
전방을 응시하는 카시우스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 * *
쉬익-
콰아아앙!
루시아의 심마의 절규가 몬스터들을 휩쓸자 몸을 장악하고 있던 영혼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벌써 30회 이상의 전투.
그녀는 현재 크라베스의 안내에 따라 최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크라베스가 여러 연구소를 파괴해가며 주요 정보들을 얻어낸 상태였기에 꽤나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루시아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방금 전 크라베스가 한 말 때문이었다.
“공간이 흔들린다. 추종자 놈들이 특수 술식을 발동한 모양이군.”
제발 혹시 모르게 이곳에 들어와 있을 동료들에게 별일이 안 생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런데 그때였다.
치지지지직-
블랙홀같이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사이에서 초록빛 구체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크라베스와 사도, 그리고 루시아의 표정이 한순간 얼음장처럼 굳었다.
“저건?”
트득-
트드득-
마침내 구체가 깨지며 압축되어 찌부러져 있던 내부 인원들이 주위로 튕겨져 나왔다.
길쭉한 두개골과 멋지게 도드라진 두개의 뿔.
“빌어먹을...”
고개를 휘휘 턴 카그네프가 눈을 번뜩이자 루시아가 기겁했다.
‘저 자들이 왜?’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기 싫을 뿐 그녀는 사실 알고 있었다.
저들이 술식에 휘말린 자들이라는 걸.
‘그렇다는 건...’
그녀가 아랫입술을 곱씹는 순간 카그네프의 병력이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를 중심으로 일자로 나열했다.
루시아의 표정을 본 크라베스가 말했다.
“호오... 너희와 함께 행동하던 종족들이군.”
이에 루시아와 크라베스를 응시한 카그네프의 눈동자도 동그랗게 커졌다.
“넌 그때 천문대를 박살냈던?!”
“흐음, 그렇다만?”
크라베스는 무척 여유가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카그네프의 눈이 주의를 재빨리 흘겼다.
인간형 몬스터가 최소 10명에 배회하고 있는 망령들은 무수히 많다.
루시아랑은 싸우지 않는다 쳐도 전투가 발생하면 병력 손실은 메울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입으리라.
“협상하지, 크라베스.”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카그네프가 말했다. 크라베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구태여 왜?”
“흥! 허세부리지 마라. 네가 추종자들과 전쟁 중인 건 이미 다 알고 있다. 지금 병력 손실을 봐선 좋을 게 전혀 없을 텐데?”
“그것도 위협이 될 때나 그렇지.”
“하, 그렇군. 나를 우습게 본 거로군.”
쿠구구구!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카그네프의 몸에서 살기 섞인 투기가 터져 나왔다. 용인족, 최강자의 힘이 크라베스의 전신을 뒤덮는다.
기운을 느낀 크라베스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짚더니 이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다 거기까지. 확실히 네가 잔챙이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그래서? 답은?”
“좋다. 합류를 허락하지.”
크라베스는 마치 베푸는 것 마냥 말했다. 자존감이 높은 카그네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크라베스.”
“뭐지?”
“저 여자와는 특별한 관계인가?”
난데없는 물음에 크라베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러자 카그네프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건드려도 되느냔 뜻이다.”
“아니, 안 된다. 저 여자는 쓸모가 있어서.”
“죽인다는 게 아니다. 단지 좀 비밀이 많은 것 같아서 파헤쳐 보고 싶다는 거다.”
크라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당최 지금 카그네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죽이지 않는 선에서 파헤친다는 건 곧 고문 같은 걸 하며 물어보겠다는 것일 텐데, 저 여자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 자신이 아는 것을 토해내지 않을 인물이었다.
“네가 이 여자를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이 여자는 호락호락...”
“크크크.”
그 말에 카그네프의 입이 더욱 찢어지듯 올라갔다. 크라베스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옆에서 제2 사도, 렘펠이 소리쳤다.
“이놈! 감히 우리들의 왕을 능멸하다니! 죽고 싶은...”
“짜증난 거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기억을 읽을 수 있다.”
* * *
공기가 얼어붙었다. 크라베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그렇다.”
당당하게 말한 카그네프가 팔을 쫙 피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그가 이어 말했다.
“네가 어떻게 해서 이 여자의 일행을 만나게 됐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건 놈들이 알려주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이것만큼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카그네프가 루시아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들은 너무도 수상하다.”
“......”
“이 세계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주제에 너무도 많은 걸 알고 있다. 게다가 분한 말이지만 그 정보력은 사실상 우리를 뛰어넘는다. 네가 그 정보를 제공해주었나?”
‘그럴 리가.’
크라베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리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강호, 그놈도 [영혼각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추종자들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어 능력은커녕 크람베르라는 용어를 알고 있는 것조차도 신기한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어디서 그 정보를 손에 넣었을까?
휘이잉~
묘한 기류가 둘 사이를 오갔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죽이려 하지마라. 그런 행동을 보일 시에는 내 군세가 네놈들을 척살할 것이다.”
“맹세하지.”
카그네프가 말을 끝낸 순간이었다.
슈우우우우!
루시아가 발산한 심마의 절규가 카그네프가 서있는 장소에 몰아쳤다.
천사사냥(4)